이 고통스런 이야기가 당신 개인의 행복과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되면 글을 읽지 말라

책<칸다하르>를 읽었습니다. 이란의 영화감독 모흐센 마흐말바프(mohsen makhmalbaf)가 썼습니다. 원래는 <아프가니스탄의 불상은 파괴된 것이 아니라, 치욕스러운 나머지 무너져 버린 것이다>는, 다소 긴 이름의 책입니다. <칸다하르>라는 한글판 제목은 아프가니스탄의 실상에 대해 알린 마흐말바프 감독의 동명 영화의 제목에서 따왔습니다.

‘책’이라고는 했지만 <아프가니스탄의 불상은…>은 약 60페이지 분량밖에 되지 않습니다. 저자가 말한 대로 “읽는데는 아마 한 시간쯤 걸릴 것”입니다. 책이라기 보다는 보고서, 혹은 아프가니스탄의 어제와 오늘에 대한 작은 백과사전이라 할 만 하겠습니다.

흔히 보고서의 맨 앞장에는 제목과 함께 지도교수의 이름, 작성자의 학과, 학번 등을 적어 놓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불상은…>이라는 긴 제목의 보고서를 쓴 마흐말바프 학생은 자신의 신상 소개 대신 엉뚱하게도(?) 사람의 심장을 콕 찌르는 이러한 문장을 적어놓았습니다.

“당신이 이 글을 주의 깊게 읽는 데는 아마 한 시간쯤 걸릴 것입니다. 바로 그 한 시간 동안 14명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전쟁과 기아로 죽어 가고 다른 60명은 아프가니스탄을 떠나 난민이 됩니다. 이 글은 이 비극과 죽음과 기아의 이유에 대해 쓴 것입니다. 이 고통스런 이야기가 당신 개인의 행복과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되면 이 글을 읽지 마십시오.” 마치 “이 비디오 테잎을 24시간 내에 복사해서 배포하지 않으면 저주가 내릴 것이다”는 어느 공포영화의 메시지처럼, 그는 첫 장부터 우리에게 엄포를 놓습니다. “이 고통스런 이야기가 당신 개인의 행복과 상관없는 것이라 생각되면 이 글을 읽지 말라”고 말입니다. 도대체 어떤 이야기이기에 그럴까요?

왜 아프가니스탄은 한국과 같은 아시아권 사람들이 들어본 적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잊혀져 버렸나

보고서는 먼저 2000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있었던 일로 시작합니다. 마흐말바프의 영화 <고요>는 제3회(1998년)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초청된 바 있으며, 2000년에는 <순수의 순간> <민주주의의 실험> 등이 특별작으로 상영되었습니다. 이때까지는 주로 자신의 조국인 이란을 배경으로 한 영화들이었습니다. 마흐말바프는 그때 한국을 찾았습니다.

한 참석자가 그에게 물었나 봅니다. “당신의 다음 영화의 주제는 무엇인가?” 이에 말흐말바프는 “아프가니스탄”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질문한 이는 “아프가니스탄이 뭡니까?”라고 되물었다 합니다. 마흐말바프는 애석해 합니다. “왜 그럴까? 왜 한 나라가 한국과 같은 아시아권 사람들이 들어본 적도 없을 정도로 완전히 잊혀져 버렸단 말인가?”

이제 한국 사람들에게 아프가니스탄을 물으면 90%이상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2001년 10월에 시작된 미국-아프간 전쟁 때문입니다. 그 전쟁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아프가니스탄을 “아프리카 어디쯤 있는 나라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많겠지요.

사실 지금 잘난 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몰랐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이 한국보다 큰 나라인지도 몰랐고, 그 나라의 바미얀(Bamian)이라는 곳에 있는 세계 최대 규모의 불상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소식은 들은 적이 있지만 그 나라에서 그렇게 숱한 사람들이 굶어 죽어 갔는지, 수십 년 간 내전의 소용돌이 속에 수백만 명이 스스로 조국을 등지고 떠났는지, 탈레반의 가혹한 형벌아래 공포스럽게 사회질서가 유지되고 있었는지, 세계 최대의 마약 생산국이었지, 아무 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9.11 테러가 있고, 그 배후에 알 카에다와 빈라덴이 있고, 이들에게 훈련 장소와 은신처를 제공하는 나라로 아프가니스탄이 지목되고, 그래서 미국-아프간 전쟁이 시작되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역사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그러나 마흐말바프의 보고서를 읽으면서 나는 반성했습니다. 내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해서 알아봤자, 상대팀이 정해지자 그때서야 부랴부랴 피아 간의 전력(戰力)을 분석하는 축구팀 감독과 같았다고. ‘일’이 터지자 아프가니스탄을 조금, 아주 조금, 그것도 머리로만 공부한 것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마흐말바프는 그런 아프가니스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공인 받은 학문적인 조사방법에 의한 것도 아니고, 출처가 분명한 통계치와 분석자료를 곁들인 것도 아니며, 체계와 질서가 잡힌 두툼한 논문도 아니지만 그의 보고서는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여느 서적과 자료에 비할 바 아닙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듣고 느낀 것을 토대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인 것은 ‘인간의 눈’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난 20년 간 5분마다 한 명씩 아프간 인이 죽어 가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았다

보고서는 시종 두 가지 이야기의 길을 오갑니다. 하나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고, 다른 하나는 그것에 무관심한 세계 인류에 대한 질책(혹은 원망 또는 호소)입니다.

“1992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인구는 2천만 명이었다. 지난 20년 간 250만 아프간 인들이 살해당하거나 사망했다. 원인은 군사공격, 기아, 의료설비 부족이었다. 다른 말로, 매년 12만 5천 명, 혹은 매일 340명, 시간당 14명, 5분당 1명이 살해당하거나 사망했다. 한편 몇 달 전 러시아 잠수함이 침몰했을 때 위성 방송이 그 사고를 시시각각 방송하고, 불상이 파괴되는 소식을 논스톱으로 보도하면서도 지난 20년 간 5분마다 한 명씩 아프간 인이 죽어 가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런 보도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렇습니다. 2000년 8월 노르웨이 북부 바렌츠해에 러시아의 1만8000ｔ급 핵잠수함 쿠르스크호가 침몰했을 때 세계 언론은 이를 속보로 타전하며 사건 해결의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습니다. 그런 사건이 발생하면 몸 값 높은 유능한 기자를 급히 비행기에 태워 수 천 킬로미터 밖으로 내봅니다. 취재 경쟁을 벌이다 보니 확인되지 않은 일들이 우후죽순 보도되기도 하고, 주위의 사소한 일까지 가십(gossip)거리로 전파를 탑니다. 온갖 전문가와 관련자를 데려와 자문을 구하고 독자와 시청자의 편의를 위해 친절하게 그래픽으로 현장을 묘사해 주며 3D 시뮬레이션까지 만들어 보여줍니다.

물론 당시 잠수함 침몰 사건은 ‘강대국’으로 꼽히는 러시아의 잠수함, 그것도 규모가 큰 핵잠수함이 침몰한 사건이고, 침몰 원인과 탑재된 미사일의 향방 등이 큰 관심거리가 되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매년 12만 5천 명, 혹은 매일 340명, 시간당 14명, 5분당 1명이 살해당하거나 사망”한 일은 신문 한 귀퉁이에 보일 듯 말 듯 소외되어왔던 것에 비해볼 때 ‘도대체 인간이란 존재는 균형감각이 존재하는가’하고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말 그대로 ‘강대국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세계 지도를 펴놓고 러시아나 미국을 찾아 보라 하면 못 찾을 사람이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프가니스탄을 찾아 보라 하면 아직도 찾지 못하는 사람이 절대 다수일 것입니다. 지구상 어디에 붙어있는지 쉽게 알고 있는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 이 단순한 차이 때문에 앞선 나라는 그 나라의 대통령이 과자를 먹다 목에 걸려도 세계적인 빅 뉴스가 되고, 뒤 나라는 수백만 명이 굶어 죽어도 세계인은 ‘모른 척’입니다.

국가 주권이란 ‘인간은 원래 하나’라는 사실을 잠시 잊게 만든 ‘망각(妄覺)의 수단’일지 모른다

마흐말바프는 이야기합니다. “나는 어느 나라도 사망으로 인구의 10퍼센트가 감소하고, 탈출로 인해 30퍼센트가 감소하고, 그러면서도 세계의 무관심 속에 방치된 예를 알지 못한다.”

마흐말바프의 지적에 충분히 공감하면서 저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지금 지구상에 몇 개의 나라가 존재하느냐”하는 질문은 대단한 우문(愚問)이긴 하지만, 속국(屬國)이거나 세계지도에 하나의 점으로조차 표시가 안 되는 작은 섬나라까지 합치면 대략 560개의 나라가 있다고 합니다. 이중에서 인구가 3백만 명이 채 안 되는 나라를 세어보니 대강 세어도 200개 나라가 넘습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지난 20년 간 250만 명이 살해당하거나 기아와 질병으로 죽었다고 합니다. 지구상의 작은 나라로 치면, 한 국가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셈입니다. 인구가 채 몇 만, 몇 십만에 이르는 나라 여러 개가 한꺼번에 사라진 셈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했다면, 예를 들어 화산 폭발로 소국(小國) 10개가 한꺼번에 날아갔다고 하면 어땠을까요? 아마 그 해 최고의 토픽(topic)감일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는, 작은 나라 몇 개가 한꺼번에 날아간 일은 대단한 화젯거리이지만 제법 큰 나라 안에서 수십만 명이 내란으로 다치거나, 수백만 명이 굶어 죽은 일은 ‘남의 나라 일’이라고 생각하는 듯 합니다.

잠시 ‘국가 주권’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울타리 쳐진 한 나라 안에서 수백만 명이 굶주려 조용히 죽어가고 있을 때 사람들은 관심이 없습니다. 내전으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면서 숱한 아이들이 피를 흘리고 여자들이 강간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그 울타리만 벗어나지 않는다면’ 개의치 않습니다. 그야말로 ‘그 나라의 일’로 치부합니다. 혹자는 그것을 ‘자주권’이라는 말로 미화하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 지금 지구상에서 UN에 가입한 나라는 2백 개 국가 정도이지만, 잘게 따지면 6백 개에 이르는 나라가 있습니다. 이것을 대체 독립적인 국가라고 보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의문스러운 형태의 나라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그 개념조차 모호한 ‘국가’라는 틀 안에 ‘주권’이라는 나름대로 확정된 개념을 갖다 붙입니다. “알아서 하라”는 것입니다. 너희끼리 죽든 말든 우리만 안 다치면 된다는 말입니다.

흔히들 국가 주권을 ‘근대의 소산’이라고 합니다. 고래(古來)로 국가는 존재해왔지만, 국가의 주권을 인정하고 내정 불간섭의 원칙에 동의하게 된 것은 고작 300년 정도의 일입니다. 그 근원을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Peace of Westfalen)에서 찾기도 합니다.

그러나 과연 국가 주권은 근대의 소산일까요? 물론 국가 주권 개념은 인류의 발전에 긍정적인 기여를 해왔던 것이 사실이지만,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인류가 양심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어왔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더구나 독재권력이 자신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악용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국가 주권이란, 국가라는 테두리를 쳐놓고 ‘인간은 원래 하나’라는 사실을 잠시 잊고 지내게 만든 ‘망각(妄覺)의 수단’ 혹은 ‘무지(無知)의 수단’일지 모릅니다.

마흐말바프는 통렬히 우리를 질책합니다. “슬프게도, 사이(Sa di)의 유명한 시구 ‘모든 인간은 한 몸의 일부’라는 말은 시인의 정신은 사라진 채 UN 정문 위에 공허한 말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인간이란 존재는 꼭 문제가 터지면 호들갑을 떤다 이러고도 인류는 진보했다 말할 수 있나

한편으론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세계 인류는 아프가니스탄처럼 조용히, 서서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고, 한 사람이 비명 지르며 죽어 가는 일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비명 지르며 죽어 가는, 거칠게 표현하자면 ‘시끄럽게 죽은’ 사람들의 생명과 인권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다만 <칸다하르>를 읽으면서, 그리고 최근 세계의 움직임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과연 인간은 진보(進步)했는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진보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퇴보의 길을 자초했습니다. 조금 민감한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지금 이라크에서는 포성이 풀리고 있습니다. 이 글이 활자화되어 나올 즈음엔 전쟁이 종료될지도 모릅니다. 전쟁을 앞두고, 그리고 전쟁이 한창 진행중인 지금도 전 세계에는 반전 시위가 들끓고 있습니다. 신문과 방송은 하루종일 이라크전의 진행과정을 속보로 쏟아냅니다. 아프간 전쟁 때와 마찬가지로 중계하는 아나운서의 배경에는 커다란 이라크 지도가 그래픽으로 깔려있고, 해설자는 이라크 도시들이 상세하게 그려진 지도를 짚어가며 연합군의 진격로와 교전(交戰) 위치를 설명해 줍니다. 바그다드 시내를 모형으로 만들어 정말 친절한 설명을 해주는 곳도 있습니다. 종군 기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전장(戰場)에 뛰어들어 전쟁 상황을 비디오폰으로 전 세계 안방에 전해주고 있습니다.

바스라, 나자프, 카임, 모술 같은 이라크 도시의 이름을 우리가 전쟁 전에 알기나 했습니까? 아니 관심이나 있었습니까? 바그다드 어디에 후세인 관저가 있는지, 국방부는 어느 건물이고, 바트당 청사는 무엇인지, 바그다드 여행을 해 본 사람조차도 잘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더욱이 이라크의 민족과 종파 구성은 어떻게 되어있고, 어느 지역에는 어느 민족, 종파가 모여 살고 있는지, 이 분야에 관련된 전문가가 아니라면 잘 알지 못했고 관심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후세인 치하에서 이라크 민중의 처지가 어떠했는지, 반항하는 쿠르드 족을 후세인이 화학무기로 대량 학살한 사건에 대해서도 우리 대부분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인간 - 지금의 세계인 - 이란 존재는, 꼭 문제가 터지면 호들갑을 떱니다. 전쟁 전에는 지구상에 이라크라는 나라가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모르다가 이제는 그들 나라의 작은 도시 이름까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인터넷의 인기검색어로 ‘Iraq’가 떠올랐습니다. 전쟁 전까지는 이라크의 철자(spelling)가 어떻게 되는지 조차 잘 모르던 청년들이, 한 편은 이름 모를 이라크 어린이들의 사진을 들고 나와 “너희들의 생명을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는 때늦고도 이상한 눈물을 흘리며 ‘평화(?)’를 외치고, 다른 한 편의 청년들은 군 통수권자의 명령에 따라 태어나서 구경조차 안 해봤을 사막의 모래폭풍 속으로 영문도 모른 채 달려가고 있습니다.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다쳐서는 안되다’고 주장하던 지고지순의 생명주의자들이 반전 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각설하고, 도대체 지금까지 뭘 했던 것입니까? 전쟁 전까지 말입니다. 우선 전쟁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아무리 정밀한 폭탄이라지만 오폭(誤爆)으로 인해, 혹은 군인들 틈에 끼어있던 민간인들이 죽고 있습니다. 이들은 피난의 기회조차 갖지 못한 돈 없고 굶주린 사람들이거나 자기가 태어난 땅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순수한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민간인의 피해가 전혀 없을 수는 없고, 그들 중 최소한 몇 백에서 몇 천 명은 죽으리라 예상됩니다. 전쟁의 화염 속에 고강도(高强度)로 죽는 사람들입니다.

전쟁 반대론자들은 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마치 이라크 민중의 대변자인양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들은, 세계 유수의 산유(産油) 국가의 지도자인 후세인이 수십에서 수백만 명을 저강도(底强度)로 죽이고 있을 때는 왜 침묵했습니까? 전쟁을 반대한다면 우리는 언제까지 후세인 독재 치하에서 조용히, 서서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 가는 것을 방치해야 할까요? 이라크 민중은 ‘조용히 서서히 많이 죽더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왔던 사람들을 과연 자신들의 편이라 생각할까요?

평소에 ‘지구상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도 함부로 다쳐서는 안되다’고 주장해왔던 지고지순의 생명주의자들이 반전 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게 생각하지만, 평소에 그렇지도 않았던 사람들이 수십 년 간 독재치하에서 죽어간 수백만의 사람들을 외면하다가 짧은 전쟁으로 죽는 몇 백 명의 생명만을 앞세우는 것은 그야말로 그 정치적 의도를 의심하게 만듭니다.

이라크 전쟁 이전에도 이라크 민중은 독재자 후세인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며 세계인의 무관심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다시 마흐말바프의 목소리를 옮겨 이번에는 전쟁을 주도하고 있는 미국 행정부의 잘못을 지적해 봅니다.
“미국은 필요하다고 판단이 서자 이라크로부터 쿠웨이트를 3일만에 탈환했다. 근대주의를 주창하는 미국이 왜 교육도 못 받고 사회적 활동도 못하며 부르카에 갇혀 지내지 않으면 안 되는 천만 여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가? 미국은 현대에 출현한 이 야만성을 왜 막지 못하는가? 그럴만한 힘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동기가 부족한 것인가? 나는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마흐말바프의 보고서는 아프간 전쟁 이전에 쓰여졌습니다. 보고서가 나온 얼마 후 9.11 테러가 있었고, 그때서야 미국은 ‘행동을 취했’습니다. 테러에 대한 보복이 전쟁의 원인이라고 사람들은 말했지만, 미국이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어쨌든 전쟁의 결과로 ‘현대에 출현한 이 야만성’은 사라졌습니다. 마흐말바프는 “부르카가 그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아마 누군가가 강제로 부르카를 벗겨야 할 것이다”라고 했는데, 여성들의 부르카는 벗겨졌고, 학교와 병원에 갈 수 있게 되었으며, 극장에서는 십여 년 만에 영사기가 돌아갔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앞날이 순탄하지만은 않겠지만 피비린내 나는 살육은 당분간 멈췄습니다. 살육은 오랫동안 계속되어 왔지만 자기 나라 빌딩이 두 개나 무너져 숱한 사람이 죽어서야 미국이 깨닫고, 그것이 동기가 되니 드디어 움직일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소리내어 울고만 싶습니다.

다시 이라크로 되돌아갑니다. 전쟁을 보도하는 신문과 방송을 통해 폭격 당한 건물과 죽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치고 있습니다. 전쟁 전에 그곳엔 지극한 평화만이 계속되고 있었다고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쟁 이전에도 이라크 민중은 후세인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총 들고 대포 쏘는 것만이 전쟁이 아니라, 죽어도 상관없다며 방치하는 독재자의 잔인함 앞에 숱한 사람들이 아사(餓死)하는 것도 전쟁입니다. 이라크 민중은 독재자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으며, 세계인의 무관심과도 전쟁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현재 목숨을 건 취재경쟁을 벌이며 전장(戰場)에 뛰어든 기자들이 후세인 치하에서 계속된 그 전쟁을 먼저 고발했다면 상황이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흘러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수단이 전개되어서야 바그다드와 바스라, 나자프, 카임, 모술을 이야기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식인은 ‘국가주권’이라는 위선의 덫에 걸려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진보라 착각해 왔다

어설픈 양비론이 아니라 전쟁을 지지하는 사람과 반대하는 사람 모두가 이제는 차분한 이성으로 되돌아와, ‘과연 이래도 인간은 진보한 것인지’ 스스로를 되돌아봐야 합니다. 지구촌 한구석의 우리 식구들이 조용히, 서서히, 많이 죽어가고 있는 것에 대해 우리는 무심합니다. 그러나 지금도 여전히 한 사람이 비명 지르며 죽어 가는 일에는 관심이 많습니다. 거기에 함께 비명 지르며 끔찍해 하면서, 바퀴벌레 한 마리 함부로 죽이지 못하는 자신을 평화주의자라 착각합니다.

거악(巨惡) 앞엔 침묵하면서 미악(微惡) 앞엔 단호합니다. 만약 유명 가수가 괴한에게 피격 당해 사망했다면 그 사건은 사진과 함께 크게 보도되고 그를 위한 특집 프로그램이 마련되고 추모행사가 이어지겠지만, 아프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이 있기 이전에 민중의 참상을 끈기 있게 세상에 알린 단체와 언론은 드물었습니다. 지식인은 ‘국가주권’이라는 위선의 덫에 걸려 남의 나라 일에 간섭하지 않는 것을 진보라 착각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내 등이 따습고 배부르면 됐지 먼 나라 일까지 왜 신경을 쓰냐고 귀찮아했습니다.

이제는 ‘국가주권’이라는 근대적인 용어를 ‘인권(人權)’으로 대체해야 합니다. 자주권(自主權)이란 자기들끼리 알아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인민이 자유롭게 먹고 살 수 있는 체제를 보장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재정립될 필요가 있습니다. 현대사의 경험은, 국가주권이나 자주권을 강조하는 나라일수록 민주국가가 아니라 독재사회에 가까웠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 보였습니다.

마흐말바프의 보고서를 읽으며 ‘북한’을 생각합니다. 마흐말바프는 “1992년까지 아프가니스탄의 인구는 2천만 명이었다. 지난 20년 간 250만 아프간 인들이 살해당하거나 사망했다. 원인은 군사공격, 기아, 의료설비 부족이었다. 다른 말로, 매년 12만 5천 명, 혹은 매일 340명, 시간당 14명, 5분당 1명이 살해당하거나 사망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을 ‘북한’으로 바꾸어 이야기해 봅시다.

“1994년까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인구는 2천 3백만 명이었다. 그로부터 채 5년이 안 되는 기간동안 300만 북한 인민이 굶어 죽었다. 원인은 인민이 굶어 죽든 말든 문을 걸어 잠그고 정권 유지에만 급급했던 김정일에게 있다. 다른 말로, 매년 60만 명, 혹은 매일 1644명, 시간당 68명, 1분당 1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여기에 이런 말을 덧붙입니다. “현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는 5개소의 정치범 수용소에 약 20만 명이 수감되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아직도 사회에는 공개처형과 체포.고문이 횡행하고 있다. 1994년 이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거나 사망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독재자가 국제 사회를 향해 저주를 퍼부을수록 민중은 희망과 용기를 얻는다

‘제 4차 대전’이라고도 하는 미국의 대테러 전쟁의 다음 목표가 어디가 될 것인지, 벌써부터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그것이 북한이 될 것이며,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전쟁 가능성에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우선 말해 둘 것은, 본질을 따지자면 이라크 전쟁 이전에 이미 이라크 민중이 후세인과 전쟁을 치르고 있었듯 지금 북한 민중은 김정일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민이야 죽든 말든 나는 상관하지 않는다며 방치한 정권, 그 학정아래 3백만 명이 죽은 것은 이미 내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세상 어느 내전도 3백만 명이 죽을 정도로 잔혹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폭력의 형태가 다를 뿐이지 그것은 엄연히 ‘학살(虐殺)’입니다.

사람들은, 전쟁 현황을 전하는 뉴스 앵커의 배경에 걸린 이라크 지도가 걷히고 그 자리에 북한 지도가 걸리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앵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바그다드, 바스라, 나자프, 카임, 모술 같은 지명이 평양, 청진, 원산, 함흥, 신의주로 대체되는 것을 가장 끔찍한 악몽이라 이야기합니다. 이제 ‘내 문제’가 되니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숨길 것도 없는 이야기이지만, 지금 북한에 사는 사람들의 심정은 “전쟁이라도 났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전언입니다. 어느 정도는 죽어도 좋으니 누구든 어서 빨리 이 고통을 끝내줬으면 좋겠다는, 어쩌면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죽을 날만을 기다리는 시한부 환자의 심정과도 같을 것입니다. 남한의 산업시설과 경제규모를 잘 모르니 ‘엇비슷한 처지에 그게 그것 아니겠냐’ 하는 의식 배경도 깔려 있을 것입니다.

북한 민중의 입장에서야 전쟁을 통해서라도 독재정권을 종식시킬 수만 있다면 기쁜 일일 수 있지만, 그로 인해 감내해야 할 피해가 너무도 커 우리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기적이다’는 비난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분명히 ‘김정일 정권의 퇴진’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한반도에서 전쟁의 위협을 막는 유일한 길입니다.
전 세계가 똘똘 뭉쳐 김정일 정권을 완전히 포위해야 합니다. 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분열되었던 국제 사회의 여론이 오히려 전쟁을 부채질했고 귀중한 생명들을 잃게 했습니다. 국제사회가 하나로 뭉쳐 포위, 압박하고 있는데 무분별한 도발을 일삼는 정권은 없습니다. 독재자는 미쳐서 흥분하겠지만, 그가 국제사회를 향해 저주의 목소리를 퍼부을수록 민중들은 세계의 변화를 감지하고 희망과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혹자는 그러다가 자포자기 식으로 공격을 해오면 어떡하냐고 묻지만, 그렇다면 자기 정권을 내어놓는 것이 아까워 먼저 불길질을 할 독재자를 같은 민족으로 인정해줄 필요가 없습니다. 김정일에 대한 신뢰(?)가 두터운 사람일수록 오히려 그를 포위 압박하여 권좌에서 내려오도록 해야 합니다. 그의 독재는 너무 길었고, 또 지독했습니다. 이제는 내려올 때도 되었습니다.

“전쟁 아닌 방법도 있다”는 인류 진보의 한 사례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북한이 되기를 희망한다

연합군이 이라크 대통령궁에 진입했다는 소식이 속보로 들려오고 있습니다. 벌써 전쟁은 끝났다는 진단도 나오고 있습니다. ‘전쟁 이후’의 재건 문제에 대한 논의도 일고 있습니다. 마흐말바프는 책 <칸다하르>에 실린 또 다른 보고서 <우리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가?>에서 “최소한의 수준이긴 하지만 국제 원조가 있어서 이제 아프간인들은 더 이상 굶어 죽지는 않는다”고 최근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에 대해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전후 아프가니스탄에서 문맹 퇴치 운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고 합니다.

전쟁이 끝나면서 걱정이 되는 것은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 갖게 됐던 관심의 속도보다 훨씬 빠르게 그들을 ‘잊어 가는 것’입니다. 성급한 인사말이긴 하지만, 전쟁이라는 극단의 방법이 동원되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극단의 상황에서 신음했던 이라크 민중에게 자유와 해방이 찾아온 것에 대해 축하의 인사를 전합니다. 이라크 민중이 빠른 속도로 경제를 일으켜 세우고 민주 국가를 형성해 가리라 믿습니다.

전쟁을 마치며 인류는 앞으로 이라크에 잠재된 이권을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관심의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독재와 내전, 전쟁에 멍든 이라크인들의 상처를 하루속히 아물게 하는데 가장 큰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더 이상 제 2, 제 3의 탈레반, 후세인이 나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집중적으로 고민하여야 할 것입니다.

당연히 전쟁이란 인간무능의 한 표현입니다. 대화로 풀어야 할 것을 힘으로 해결하고 있으니 무능하다는 자기표현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회의적인 시각으로 볼 때, 그러나 그것이 인간의 현재 수준인 것 같습니다. 남의 나라 일에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던 행복과 사치, 제 발등에 불똥이 떨어져야 뜨거움을 느끼던 불감증이 독재를 키웠고 결국 전쟁을 불러왔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대테러 전쟁을 “더 발전된 이성을 갖고 세계 민주화로 나아가기 전에 치르고 있는 ‘인류의 마지막 전쟁’”이라고도 했습니다. “결국 전쟁 밖에는 수단이 없다”고 인간 스스로를 회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전에, 진정한 평화주의자들은 “전쟁 아닌 방법도 있다”는 인류 진보의 한 사례를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이 북한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나는 앞에서 마흐말바프를 이란의 영화감독이라고 했습니다. 그의 책을 덮으며 ‘이란의 영화감독’이라는 말을 취소합니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영화감독이며, 나아가 세계의 영화감독입니다. 우리 모두가 마흐말바프처럼 세계인이 되었을 때, 독재는 종식되고 전쟁의 포성은 멈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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