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y 36호를 띄웁니다. Key가 발행 횟수를 거듭하면서 열성적인 팬들이 많아졌습니다. 독자들에 따라 좋아하는 코너가 조금씩 다릅니다. 북한에서 오신 분들은 제가 쓰고 있는 『편집자와 편지』와 과거에 연재했던 『김정일 시리즈』를 가장 좋아한다고 합니다. 글을 읽으면 속이 다 후련하다고 말씀해주십니다. 졸문(拙文)에 과분한 칭찬을 해주셔서 부끄러울 따름이지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남한과 외국의 독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코너는 단연 『이주일(李周逸)의 북한 이야기』입니다. 본 잡지의 편집위원으로, 북한 평성(平城) 출신인 이주일 씨는 외화벌이를 하면서 북한의 여러 도시를 다녀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실감 있는 설명을 해주고 있습니다.

이주일 씨가 쓴 원고는 편집장인 제가 문장을 윤색해 발표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야에 종사하고 계시는 분들은 익히 알고 계실 텐데, 원고를 쓰는 것보다 고치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차라리 이주일씨가 구술(口述)해주고 내가 받아쓰는 것이 더 빠르겠다”고 투덜거리기도 하지만, 기실 이주일씨의 원고를 처음으로 받아보는 독자인 저는 매번 글을 읽으며 울고 또 웁니다. 이번에도 모두가 퇴근한 사무실에서 혼자 원고를 다듬으며 서러운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이주일 씨는 굉장히 건조한 문장을 씁니다. 할 말만 딱 하고 맙니다. 문학적으로 수식하고 덧붙이는 경우가 없습니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설명해 주고 끝냅니다. 이런 투박한 원고에 색깔을 입히는 것이 제 몫입니다. 그러나 비록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석 같은 초고이지만, 양심이 있는 사람은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글이란 화려한 문장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솔직한 현실전달에서 나온다는 것을, 저는 이주일씨의 글을 읽으며 새삼 느낍니다. 바로 북한 인민의 ‘현실 자체’가 우리를 울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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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호(통권 제 34호) Keys를 통해 이주일씨는 <북한의 주민동원 외화벌이 실태>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외화벌이사업 중 ‘사금(砂金)채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조금 길지만 그중 일부분을 인용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크고 작은 강기슭마다 사금판을 펼쳐 놓고 사토(沙土)를 인다. 판자로 만든 1～1.5m의 길쭉한 채취판에 40㎠ 크기의 모직천 4장을 깔고 그 위에 모래를 담고 물을 흘려보내는 것이다. 모직천은 대개 인민군 장교들의 겨울 외투를 이용한다. 여기에 미세한 알갱이들이 달라붙으면 이 모직천을 대야에 담고 씻어낸다. 이렇게 수 차례 반복하면 대야에 담긴 물에 앙금이 생긴다. 이것을 쌀을 이는 듯이 일어낸다. 금은 다른 금속에 비해 무거우므로 맨 나중에 걸러진다. 이 앙금 속에 있는 사금을 수은으로 굳힌 다음 가스불로 태워 순금을 얻어내는 것이다.

이 간단치 않은 방법으로 대강 3～5인이 한 개 조를 형성해 하루종일 1～2t의 모래를 처리하면 0.1～0.2g의 사금을 채취할 수 있다. 지역에 따라 사금 채취량이 다르다. 평안남도 회창, 평안북도 운산, 함경남도 요덕 등 금광(金鑛) 주변에는 순도 높은 금이 나오지만 대동강변에서 사금을 채취하면 7～8t을 처리해야 이 정도나마 얻을 수 있을까 말까 한다."

이 대목을 읽을 때 제 머리 속으로는, 모래 몇 톤을 걸려내야 영점 몇 그램이 나올까말까한 사금을 채취하기 위해, 강가에 사람들이 개미떼처럼 모여 사금판을 흔드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글을 읽은 어느 기자가 “어떤 식으로 하는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고 물어봐 약간의 설명을 덧붙여주긴 했지만, 태어나 한번도 그런 일을 해보지 않은 제가 어찌 그 고통까지 알 수야 있겠습니까. 햇살이 눈부신 여름날 오후에 저는 지금 컴퓨터 앞에 앉아 이번 주말에는 일을 마치고 멋진 강가로 드라이브나 해볼까 궁리를 하고 있지만, 반짝이는 강물을 배경으로 사금채취에 한창일 북녘 동포들의 얼굴이 떠올라, 그럴 때면 일종의 ‘죄의식’마저 느끼게 됩니다.

이번 호에 이주일씨는 북한의 아편 생산에 대해 소개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지금이 한창 양귀비의 열매에서 진을 재취할 시기입니다. 아편과 관련된 작업에는 중학교 학생들을 주로 동원한다고 합니다. 뙤약볕 아래 검게 그을리며,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마약의 원료가 될 끈적끈적한 진을 채취해 컵에 담아내고 있을 아이들을 생각하니 울컥 목이 메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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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남한의 학생운동권과 사회과학 연구자들 사이에는 ‘한국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하는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했습니다. 어떤 이는 한국은 미국의 완전한 식민지로서 기형적인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며 ‘식민지반봉건사회’라고 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한국 사회의 본질은 독점자본에 의한 국가운영에 있다며 ‘신식민지국가독점자본주의’라 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리석은 주장들이지만 그때는 자못 심각한 논쟁이었습니다.

북한 사회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냐고 물어오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남한의 좌파정당인 사회당에서는 북한을 ‘수령자본주의’라고 주장한 바 있고, 북한민주화네트워크의 토론게시판에 한 네티즌은 “사회의 일부 특권층, 즉 관료층이 하나의 계급으로 전화되어 다수의 근로인민들이 생산한 잉여가치를 국가를 매개로 하여 집합적으로 착취하는 ‘관료적 국가자본주의 사회(State-Capitalism)’라고 나름의 분석을 내어놓기도 했습니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에서는 지금껏 ‘수령절대주의사회’라는 표현을 써왔습니다. 전 조선노동당 비서 황장엽 선생이 가장 먼저 사용한 표현이고, 이것이 김정일만이 유일권력자인 현 북한체제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수령절대주의사회’라고 하면 약간 막연하기 때문에 역사상 이와 유사한 체제에 빗대어 이야기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북한민주화네트워크의 이숭규 연구실장은 ‘파라오(Pharaoh)체제’라고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 현재 북한 사회에서 김정일은, 태양의 왕이라 불리는 절대권력자였던 고대 이집트의 왕 파라오에 비견할 수 있다고 해서 이런 표현을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김정일이 정권을 유지하는 비결(?)의 차원에서 본다면 저는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당하다고 봅니다. 마피아(Mafia)! 아편, 헤로인, 코카인, 암페타민 등 마약 수출, ‘슈퍼 K’라 불리는 위조달러 제작, 전 세계 분쟁국가로의 무기류 수출, 납치와 테러 살인, 핵개발 및 무력공격 위협을 통한 갈취……, 첩보영화에 나오는 악당들이나 할 법한 그런 온갖 추잡한 범죄행위들을 빠뜨리지 않고 자행하는 인물이 김정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또 뭘 합니까. 세계 도처에서 사들이는 고급 양주, 식탁 위에 올라갈 산해진미를 위한 요리재료, 고급 승용차, 별장을 치장하기 위한 대리석과 보석, 수령의 동상을 세울 금덩이, 기쁨조에게 선사할 속옷과 시계…… 이게 바로 마피아가 아니면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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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 동양화를 보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사이로 강이 흐르고, 뗏목 위에서 유유하게 낚시질을 하는 어부가 있습니다. 어부의 옆에서는 황새처럼 보이는 검은 색의 새 한 마리가 앉아 있습니다. 이 새는 어부의 한가로운 모습을 보고 사뿐히 내려앉은 새가 아닙니다. 강이나 바다의 절벽에 둥지를 틀고 사는 ‘가마우지’라는 새로, 어부는 지금 ‘가마우지 낚시’를 하는 중입니다.

조선시대 실학자 정약전(丁若銓)은 『자산어보(玆山魚譜)』에서 “물 속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아내는데, 한참동안 숨을 쉬지 않고도 버틸 수 있는 기운을 지니고 있는 것이 문자 그대로 물고기의 매라 해야겠다”고 가마우지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중국 꾸이린(桂林) 지방에서는 이러한 가마우지의 특성을 이용한 ‘가마우지 낚시’라는 것이 대대적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가마우지는 S자의 목을 갖고 있습니다. 이 가마우지를 잡아서 목 아랫부분을 끈으로 묶습니다. 어부는 가마우지 여러 마리를 뗏목에 싣고 가 강 한가운데에 풀어놓습니다. 그러면 가마우지들은 물 속으로 자맥질 해 물고기를 잡습니다. 하지만 목이 줄로 묶여 있어 입안에 들어간 먹이를 삼키지 못하고 어부에게로 돌아옵니다. 어부는 이 물고기를 토하게 해 자신의 바구니에 집어넣습니다.

요즘은 가마우지 낚시로 생계를 유지하는 어부는 없지만 관광객들을 위해 ‘가마우지 낚시’의 시범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는 관광객들이 뗏목과 가마우지를 대여해 직접 체험해 보기도 한다고 합니다. 저는 동물보호주의자는 아니지만 기껏 목에 들어간 물고기를 토해내게 하는 모습을 상상하며 약간 눈살이 찌푸려졌습니다.

북한의 외화벌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북한 인민들의 처지가 저 가무우지와 같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금뿐 아니라 송이버섯, 실뱀장어, 조개, 송이, 산삼, 오징어, 명태, 털게, 토끼, 달팽이, 개가죽…… 돈 되는 것은 모조리 잡아서 외화벌이를 해야하는 북한 인민들의 처지. 참으로 눈물나는 북한 인민들의 삶입니다.

그렇게 악착같이 벌어서 비록 소액이긴 하지만 그것으로 인민들이 오순도순 나눠 먹고산다면, 저는 그렇게 사는 북한인민들의 모습을 아름답게 바라볼 것이며 북한민주화운동을 할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또한 그런 인민들을 돕기 위해 거액의 지원을 했다면, 그것이 비록 탈법적인 경로로 조성된 검은 돈이라 할지라도, 돈을 보낸 사람들 앞에 감사의 큰절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피땀 흘려 긁어모은 외화가 주민들의 목을 적시고 배를 채우는데는 한푼도 들어가지 않고, 가마우지가 어부에게 물고기를 토해내듯 김정일의 개인 주머니에 몽땅 들어간다는 데 있습니다. 남한의 전(前) 정권이 북한에 건네준 거액의 외화가 인민들의 생활향상을 위해서는 10원짜리 반토막도 쓰이지 않고 마피아의 사치향락, 체제유지를 위한 무기구입에 거의 전액이 쓰여졌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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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층적으로 살펴볼 때, 대북송금 사건의 더욱 심각한 문제는 송금당사자들이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껏 자신들이 얼마나 엄청난 짓을 저지른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자신들의 행위를 훗날의 역사가 인정해줄 것이라는 대단한 착각에 빠져있습니다. 일종의 ‘이완용 신드롬’과도 같습니다.

일각에서는 대북송금을 비판하면서 ‘국민의 혈세(血稅)를 퍼줬다’고 비난합니다만, 앞서 말했듯 그 피(血)가 죽어가는 인민들을 살리는데 수혈되었다면 피가 아니라 살을 떼어줘도 좋습니다. 그러나 그 피가 김정일의 혈맥을 타고 흘러 인민들을 탄압할 수 있는 재활(再活)의 힘을 키워주었으니, 세상 어떠한 역사도 이러한 미친 짓을 정의라 기록하지 않을 것입니다.

혹자는 대북송금을 낱낱이 밝히면 그동안 쌓아왔던 남북관계의 성과가 깨어진다고도 말을 합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논리입니다. 대북송금의 실체를 캐는 것이 왜 남북관계의 신뢰를 망치는 일일까요? 피치 못할 사정으로 당시에는 송금사실을 숨겼다 하더라도 그 돈이 떳떳하게 쓰여졌다면, 뒤늦게라도 박수를 쳐줄 수 있는 일입니다. 당당하지 못한 일에 쓰여졌기 때문에 못 밝히는 것이며 김정일도 그것을 껄끄러워 하는 것 아닙니까.

오늘도 마피아 김정일은 2천만 가마우지 인민들의 목에 끈을 묶어 휘파람을 불며 낚시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불법적인 가마우지 낚시를 계속 인정해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강에 독극물을 살포하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습니다. 가마우지의 목에 묶인 끈을 풀어주는 것이 북한민주화운동입니다. 자유의 날개짓을 하게 된 가마우지들이 까옥까옥 기쁨의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을 까맣게 뒤덮게 되는 날, 마피아는 혼비백산하여 도망갈 것입니다. 그러나 가마우지의 날카로운 부리는 그를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마피아의 생존을 도왔던 사람들도 조심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