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민주화네트워크

NKnet이 만난 사람 - 좌파가 북한인권에 침묵하니 우파가 득세하는 것이다

일본의 좌파 지식인이 한국의 진보운동가들에게 던지는 충고
"좌파가 북한인권에 침묵하니 우파가 득세하는 것이다"

이시마루 씨는 일본 국적의 프리랜서 기자다. 그는 일본의 식민지지배 때문에 한반도가 가슴아픈 수난의 길을 걷고 남북으로 갈라졌다고 생각하며 한반도를 위해 무언가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일종의 부채(負債)의식을 늘 갖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 때문에 한국어를 배웠고, 1980년대 남한의 민주화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연계를 맺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북한의 인권개선과 민주화를 위해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하며 카메라를 들고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을 누비고 있다. 지난해 그는 탈북자들을 오랫동안 인터뷰해 온 그동안의 활동성과를 모아 일본에서 『북조선난민(北朝鮮難民)』(講談社) 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는 한반도에 애정을 갖고 한반도의 미래를 위해 힘을 보태야겠다는 신념을 책상머리에서만 키워오지 않았다. 한국을 알고자 서울 유학의 길을 결심했고, 북한의 현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자 평양과 라진, 선봉, 함경북도 은덕군을 다녀왔다. 또한 중국 만주에서 수백 명의 탈북자들을 직접 만났다. 그가 찍은 영상과 취재기사는 일본 사회에 북한의 인권실상을 알리는 촉매 역할을 하였고 탈북자들의 난민지위인정을 요구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기여했다. 지금 그는 "김정일 정권의 붕괴만이 북한 인민이 사는 길"이라고, 나지막하면서도 묵직한 감정을 실은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는 양심을 가진 세계인들에게 호소한다. 사실(事實)에 충실하자고! 끔찍한 인권탄압의 '사실'이 북한 땅에서 지금 이 시각에도 계속되고 있는데, 왜 이 엄연한 사실 앞에 엉뚱한 변명을 늘어놓느냐고 질책한다. 특히 그는 남한의 진보운동가들에 대한 실망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 비판에는 적의(敵意)가 담긴 것이 아니라, 아직도 그의 가슴에 살아있는 한국 진보운동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의 마음이 짙게 배어있었다. 취재 차 한국을 찾은 그를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사무실로 초대해 만나보았다.

한국에서도 그렇지만 더우기 일본에서 북한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는 것은 쉽지 않은 문제인데 북한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일을 하게된 어떤 특별한 계기나 이유가 있었습니까?

"일본에는 재일(在日) 조선인이 대략 20만 명 정도 있는데 오사카 지방에 가장 많이 살고 있습니다. 이 지방에서는 재일 조선인들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한 투쟁도 많았고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연대하는 투쟁도 많이 했습니다. 그들 중에는 북한 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한국 국적을 갖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것을 보면서 자랐고,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 대우도 심하기 때문에 이것은 좋지 않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해왔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때 광주사태(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가 있었습니다. 그것과 관련해 오사카지방에서도 시위를 많이 했는데 이웃 나라에서 일어난 비극의 참상을 들으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한국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주로 어떠한 시위였습니까?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시위였습니다. 또 김대중씨를 구명하기 위한 시위도 많이 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재일 조선인의 권리문제와 관련된 시위도 있었습니다. 저는 그 와중에 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때가 80년대 초반이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여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는 학생모임에 자주 참가했습니다. 중심 멤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지지하고 그들과 연대하려는 일본 젊은이들이 많이 있습니까?

"그때는 많았습니다. 지금은 별로 없지만...... 당시 한국의 박정희, 전두환 정권은 한국 국민들의 민주화 투쟁을 탄압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일본 정부와 친하게 지냈고, 우리는 일본의 자민당 정권이 한국의 보수세력들이나 독재정권과 밀착하여 민주화 운동을 탄압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즉 한국의 독재정권을 미워했기 때문에 그 정권을 지원하는 일본의 정권도 함께 미워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역으로 보수적인 자민당 정권에 반대하는 감정이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독재정권을 미워하는 감정이 생겨나기도 했겠죠.

일본도 그렇고 한국도 그렇고 진짜 민주화, 민중의 시대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일본의 좌익들은 한국의 민주화세력들에 큰 동정심과 연대의식을 가졌습니다. 제가 대학교에 들어갔을 시기에는 마침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본격적으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바다 건너에서 바라본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너무도 감동적이었습니다. 비록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닐지라도 동세대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서 목숨걸고 싸우고 있으며 사회를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크게 고무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대하여 공부를 하기 시작했고 일본 내에서 한국과 관련된 운동에 참가했습니다."

한국에는 언제 처음 와봤습니까?

"1983년도에 처음 와봤습니다."

그 당시면 대학생이었겠는데요?

"예. 대학에 재학중일 때입니다. 한국에 대해 더욱 알고 싶은 생각이 있었고, 중요한 목적은 한국 학생들과의 연대문제를 알아보자는 생각이었습니다."

참 막연하고 무모한 도전이었을 것 같은데, 한국에 와서는 어떤 분들을 만나셨습니까?

"그때 참 재미있었습니다. 무작정 연세대와 고려대에 가서 어떻게든 학생들과 관계를 가지려고 시도했습니다. 물론 성과는 전혀 없었죠. 서승(徐勝) 형제를 상징으로 하는 정치범 석방운동에 참여하여 한국에서 모임도 갖고 각종 지원활동도 벌였습니다."

1971년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재일교포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 여기에는 두 재일교포가 끼어 있었다. 서승, 서준식 형제. 형 서승씨는 1심에서 사형, 2심에서 무기징역형을 선고받고, 19년 만에 감옥문을 나섰다. 동생 서준식씨는 7년의 만기를 마치고 출소하였으나 사상전향을 거부하였다는 이유로 10년의 보호감호처분을 더 받고서야 세상에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서승씨는 보안사에서 조사를 받을 때 고문을 견디다 못해 수사관이 자리를 비운 사이 몸에 경유를 끼얹고 분신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들 형제는 군사정권이 만들어낸 한국의 대표적인 양심수로 꼽혀 국제인권단체들이 꾸준히 석방운동을 벌였다.

이시마루 씨는 한국의 386세대보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더 긍지와 추억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혹시 한국 사람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가 살아온 길은 한국 386세대의 정서적 굴곡과 너무도 흡사하다.

"1987년도에 한국에서 6월 민주화 항쟁이 일어났을 때 나는 영국에 있었는데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드디어 한국에 민주화의 봄이 오는 구나! 그것도 우리 동세대가 이루어냈구나....., 정말 감동적이었습니다. 그 흥분된 감정을 안고 한국에서 유학을 할 것을 결심했습니다."

밖에서 감상적으로 바라볼 때는 애정이 솟더라도 실제 안에서 겪다보면 인식이 많이 바뀌는 법인데, 한국에서 직접 살아보니까 어떻던가요?

"공부도 하고 실지 생활하면서 보니까 내가 생각했던 것과 조금 달랐습니다. 우선 너무 정치 위주로만 한국을 보았습니다. 한국 국민이면 누구나 독재정권을 싫어하고, 또 누구나 투쟁에 나설 각오가 되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같이 살면서 보니까 먹고, 자고, 연애도 하고, 술도 먹고...... 지극히 당연한 현실이지만, 한국에 대해 책이나 방송매체를 통해서만 접해왔다는 반성을 깊이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유학 온 재일 조선인(재일교포) 학생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두가 민족애에 넘쳐 한국의 민주화문제에 관심이 많을 줄 알았고, 또 일본에서 차별 받아온 사람들이라는 시각으로 불쌍하게만 생각해왔는데 같이 생활하면서 부정적인 모습들도 자주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일본에 있는 부잣집 부모들이 공부하기 싫어하는 자식들에게 지나치게 많은 돈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물론 진짜 가난한 집안의 자식으로 한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살아가는 학생도 있었지만, 아무튼 사람들의 다양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도 일본 역시 여러 가지 문제가 있을텐데, 내 나라의 문제도 해결 못하면서 남의 나라의 일에 상관을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은 안해봤습니까? 혹은 주위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은 없습니까?

"물론 일본 내부의 문제에도 관심을 갖고 학생운동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저는 특별하게 한국 문제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에서 투쟁하는 사람들에게 힘이 돼주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더 강하게 했습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라 일본의 운동권 안에서도 위와 같은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북한 문제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까?

"제가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했던 1980년대 후반에는 세계적으로 냉전이 끝나고 한국의 민주화가 진척되어가고 있었습니다. 1990년대에는 어느 정도 달성이 되었다고 보였습니다. 그래서 다음에는 북한이 민주화의 대상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북한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때부터 조금씩 북한으로 관심의 무게중심을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한국 학생들이 민주화 운동을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민주화의 틀이 마련되고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했는데도 말입니다. 과격한 시위는 계속되고 있는데 도대체 목적이 뭔지 의아할 때가 많았습니다. 어떤 사회적 변화보다 시위 자체가 목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하여튼 90년대에 귀국해서 일본에서 기자가 됐습니다. 한국에서 유학을 하면서 알게 된 이모저모를 일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자가 됐습니다. 그러면서 머릿속으로는 어떻게든 북한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계속 취재신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취재비자를 주지 않았습니다. 아니, 대답 자체가 없더군요."

당시에는 북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그 당시만 해도 북한의 정보 자료가 별로 없었기 때문에, 북한에 대해서는 차라리 한국의 노태우 정부보다는 친근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일단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이고, 외국군대가 없고, 또 경제적으로 힘들다 하더라도 자주, 자립, 자위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일본 정부가 북한에 대해 계속 적대 정책을 취해 왔던 것도 나쁘다고 생각해왔고, 일본 정부가 북한에 대해서도 식민지배에 대한 배상을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종의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자가 나오지 않아, 북한에 가는 것은 포기했습니까?
"북한사회를 보지 않고서는 북한에 대해 말을 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비자를 주지 않는다면 제일 가까운 현지까지 가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1993년 7월에 북-중 국경지대인 압록강 하류에서부터 시작하여 두만강 하류까지 다 가봤습니다."

1993년이면 북한에서 본격적인 식량난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인데요.

"식량사정으로 고생한다는 소문이 한국에도 있었고 일본에도 있었습니다. 아직도 한국의 적잖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당시 저는 그러한 소문을 북한의 사회주의를 나쁘게 인식시키기 위한 선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소문보다 어느 정도 마이너스해서 생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찾아갔습니다. 북한이 그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은 '지상낙원'이 아닌 것처럼 현재 북한 상황에 대한 소문에도 과장이 많을 것이라는 판단이었죠.

그런데 실지 그 곳에 가보니까 한국과 일본의 언론 말하는 것이 거의 다 옳았습니다. 탈북자도 만나고 북한을 드나드는 조선족들도 많이 만났습니다. 그런데 북한이 좋다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모두가 한결 같이 말하는 게 '왜 그런 나라에 가고 싶은가? 먹을 것도 없는데......'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당시 북한의 식량사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상황이 어떻던가요?

"북쪽지역(양강도, 함경북도 지역)에는 배급이 끊긴 지역이 많았고 친척방문 때문에 북한에 갔다온 사람들은 '아이들이 뼈만 남았고 굶어 죽는 사람도 늘어나기 시작했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한 탈북 청년과 인터뷰를 하면서 북한에서는 말 한마디 실수로 잡혀간다는 이야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들었습니다. 그런 과정에 내가 그동안 북한에 대해서 너무도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됐습니다. 북한에 대한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변명아래, 참으로 끔찍한 일들이 전개되고 있는 것을 묵인한 셈이었습니다. 북한의 이런 실정을 열심히 취재해서 세계에 알려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됐습니다. 그 뒤로 계속 중국을 방문해 북-중 국경지역을 취재했습니다."

그동안 중국에는 몇 번이나 가보셨습니까?

"최근에 갔다 온 것까지 해서 29번째입니다. 단순히 국경지대에 취재원이 많아서가 아니라 기자가 취재를 한다 할 때에는 핵심 현장에까지 최대한 접근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런데 북한에 못 들어 갈 경우에는 거기(국경지역) 밖에 없으니 최선의 수단으로 접근 방법을 취해 왔습니다."

그럼 북한 내부로는 한번도 못들어가보셨습니까?

"아닙니다. 1995년도에 평양을 갔다 왔습니다."

어떤 계기로 갔다 오셨습니까?

"관광을 이유로 갔습니다. 취재기자의 자격으로 가면 자유로운 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관광비자를 내서 갔습니다. 당시 평양에서 행사가 있었는데 취재기자 인원을 제한하는 바람에 저는 일반 관광객의 자격으로 갔습니다."

당시 평양에서는 세계 프로레슬링계를 석권했던 역도산(본명 김신락, 1925～63년)의 제자인 안토니오 이노키(アントニオ猪木)의 제의에 따라 프로레슬링 초청경기가 열렸다. 이전까지 북한에서는 주민들에게 '프로레슬링은 양육강식이 지배되는 미국식 자본주의 나라에서 벌이는 체육경기'라고 선전을 해오고 있었는데 외화를 끌어들이기 위한 수단으로 이 대회를 진행한 것이다. 당시 일본을 비롯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방북하기는 했으나 북한에 가면 먹을 것도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먹는 물까지 자기나라에서 가져다 먹는 바람에 소기의 목적을 거두지는 못했다.

북한 방문은 그때 한번뿐이었습니까?

"1997년도 7월에 북한에서 난민(탈북자)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난민 조사를 목적으로 중국을 갔는데 마침 중국인 친구가 북한에 몰래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줘 2일간 함경북도 라진시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998년 3월, 4월에 20여 일간 식량지원활동을 하러 북한에 들어갔었습니다. 당시에는 대북식량지원 활동을 하던 NGO의 부탁을 받고 갔습니다."

어떤 단체였습니까?

"'무지개 다리'라는 이름의 단체였습니다. 그런데 그 단체 회원들 중에는 북한에 들어가서 식량분배활동을 감시할만한 한국어 능력을 갖춘 사람이 없었나 봅니다. 아는 사람을 통해 제가 소개되었고, 중국에서 쌀을 사는 교섭부터 시작해서 문건 작성, 감시활동(쌀 분배 감시)까지 제가 도맡아했습니다. 라진, 선봉, 은덕군에 갔었어요.

거기서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98년 3월, 4월이면 제일 어려운 시기였는데 98년 7월말까지가 식량난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식량을 나누어주는 것을 촬영하면 거칠게 방해했고, 분배과정을 제대로 안 보여주니까 북한 관료들과 많이 싸우기도 했습니다. 당시 장마당에 가보니 안철의 비디오처럼 길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어 먹는 아이들도 많았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습니다."

북한 사람 안철씨는 1998년 10월 북한의 중부지역인 함경남도 고원일대와 강원도의 원산일대 장마당에서 꽃제비들의 모습, 어린이들이 수감되어있는 9.27수용소를 몰래 카메라에 담아 국제사회에 공개했다. 안철씨가 촬영한 영상은 1998년 10월에 KBS에서 방영되어 북한의 비참한 실정을 생생하게 눈으로 확인시켜준 최초의 화면이었다. 세계의 비디오 저널리스트들에게 상을 주는 로리펙 트러스트 위원회는 목숨을 걸고 북한에 들어가 참상을 세계에 전한 탈북인 안철씨를 정의로운 카메라맨으로 선정하여 2001년 '로리펙상'을 수여하였다. 로리펙상은 1993년 모스크바에서 옐친에 대항하는 폭동을 촬영하다 사망한 로리펙을 기리기 위한 상으로, 프리랜스로 활동하는 카메라 기자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지원 식량을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모습을 왜 못 보게 합니까?

"자기들이(북한의 권력 기관에서) 알아서 나눠주니까 오지 말라, 걱정 말라는 것입니다. 내가 북한에 갔을 때도 선생님이 희망하는 대로 해 줄 테니 가라, 선생님은 좀 사무실에 앉아 계시라고 하더군요. '희망하는 대로'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나중에야 그 뜻을 알게 됐습니다. 나는 식량분배 과정을 확인해야 할 의무가 있고 책임이 있으니 꼭 내 눈으로 봐야겠다고 이야기를 하면 그 쪽(북한) 관료들은 '그러면 선생님이 100% 보셨다는 증명을 떼어 줄 테니 그걸 가져가라'는 것입니다. 나는 일본 단체에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실지 주민들에게 나눠주는 진실된 마음을 봐야된다고 누누이 말해도 그들은 이해를 못하는 겁니다."

이 대목에서 이시마루 씨는 어이없다는 듯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실제 북한의 간부들은 아래 단위에 지도를 한다고 내려와서는 일을 하지 않고 관료주의나 부리다가 상급단위에 가서는 힘들게 일을 한 것처럼 허위 문서를 보여주는 기풍에 물들어 있다. 예컨대 군당위원회 지도원급 이상 유급 당 일꾼들에게는 1년에 한 두 달 정도 '현실체험'을 하라는 김정일의 지시가 있다. 현실체험이란 노동현장에서 노동자들과 같이 일하고 생활하면서 그들이 겪고 있는 실생활을 직접 느껴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앙당 간부는 물론이고 하부 군당위원회의 유급당 간부들까지 기관, 기업소에 내려가면 사무실에 틀어 앉아 아래단위 간부들에게 훈시나 하고 잡담이나 늘어놓다가 올라간다. 그래도 기관, 기업소에서 발급해 주는 '현실체험 확인서'에는 어떤 작업반에서 노동자들과 일을 같이 했다고 적혀있다. 이것을 상급 조직에 제출하면 고생했다고 등을 두드려준다.

이런 풍토에 물들어있으니 외국의 NGO 활동가들이나 국제기구 요원들이 식량분배 과정을 확인하러 왔다하면 '확인증만 잘 끊어주면 되겠지'하고 자연스럽게 생각한다. 어차피 다 아는 사이에 뭘 귀찮게 그러냐는 식이다. 이러한 실상을 이시마루 씨는 톡톡히 경험한 것이다.

그럼 이제 화제를 좀 바꾸어 보겠습니다. 일본에서 사회주의 경향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남한의 민주화운동에는 관심이 많고 연대를 꾀했으나 북한에 대해서는 우호적인 경향을 가졌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북한 사회가 그동안 알아왔던 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되면서 오는 혼란이라든가 배신감 같은 것은 없었습니까?

"당연히 있었습니다. 1993년도 북한에 대해서 취재를 하면서 '이건 아니다'라는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졌지만 남북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 하에서 북한을 비판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고, 일본 좌파 내에 북한을 옹호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북한을 비판하게 되면 우익하고 가깝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실을 외면하고 종전의 자기 입장만을 고수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 남한 좌파의 실정도 이와 비슷하다고 판단됩니다. 그래서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대단히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일본 좌파들이 북한에 대해 특별히 우호적일 만한 이유가 있습니까?

"한반도 문제는 일본의 좌익들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이슈입니다. 이웃나라이고, 식민지 지배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미안함도 있지요. 그리고 일본 안에서 남한 쪽에 가까운 민단(재일대한민국민단)과 북한 쪽에 조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회)이 서로 경쟁을 하니까 일본 좌파들도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일본 지식인들은 사회주의 쪽을 좋아하고, 혁신분자, 진보주의자라는 평가를 받으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조총련과 더 가까웠습니다.

늘 억압받고 설움 받는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받는 거대단체 조총련에게서 민족차별주의자다, 반동이다라는 소리를 듣게되면 치명적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비난을 받아도 별로 거리낄 것이 없는 우익들이 북한 문제에 더 적극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본에서 좌파 청년운동을 하다가 북한민주화운동으로 전환한 RENK(Rescue The North Korean People! Urgent Action Network / 구출하자 북한 민중! 긴급행동네트워크)라는 단체도 있습니다. RENK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십니까?

"저는 RENK의 회원은 아니지만 결성과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들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RENK는 내가 1993년도에 중국에 처음 취재를 갔다 왔을 때 발대식을 했습니다. 그 때 북한을 민주화해야한다고 말하면 '미쳤냐?' 하는 비어(鄙語)들이 많았습니다. 단체결성 시 '김정일 타도'를 외칠 수 없었고 단지 '북한에 쌀을 보내야 된다, 북한을 민주화 해야한다'로 시작했습니다. 그 집회장에 조총련 사람들이 와서 쌀을 내보이며 '이거 북한에서 가져 왔는데 해마다 풍작이다'고 하면서 '거짓말 선전을 하지 말라'고 협박했습니다. 그리고 폭력도 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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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상황에서 일본의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은 대담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신(新)좌익 지식인 친구들과 이 운동을 시작했는데 일본 내 좌파들은 계속 '안기부 특무(스파이)'라고 선전하였고 조총련의 지목을 받기 싫어 운동을 외면하는 등 매우 힘들게 진행됐습니다. 제가 중국 취재를 갔다와서 기사를 보고 RENK 사람들을 만나 봤습니다. 그렇게 해서 RENK를 알게 됐습니다."

조총련의 방해가 그렇게 심했나요?

"1994년 4월 15일에는 북한 민주화를 해야한다는 시민단체들, 사람들이 오사카에 모여서 집회를 하기로 했습니다. 그 날은 바로 김일성 탄생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조총련이 회원 200여명을 동원해 집회장을 습격해서 집회가 무산됐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조총련의 협박에 대해서 일본정부가 수사에 들어갔습니다."

방금 앞에서 말씀하신 일본의 '신좌익'이란 어떤 사람들을 말합니까?

"일본의 신좌익이란 개념은 일본의 공산당세력에서 벗어난 세력을 말하는데, 공산당은 너무나 권위주의고 스탈린주의적 독재이기 때문에 타도 할 대상이고 새로운 당을 만들어야 한다라는 것이 핵심적인 주장입니다. 그런데 각 당파간의 입장이 달라 세력화되지는 못했습니다.

북한문제와 관련해서 보자면 예전의 일본 좌익은 북한이 일본의 침략을 받았던 나라고 조총련에 뭉친 사람들은 피억압 민족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든 뭐든 절대로 비판을 못했습니다. 미안해서 말입니다. 사실이나 양심에 충실한 것이 아니라 조선사람들이 하는 것은 반대를 하지 못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 북한의 실상을 담은 영상물이 방영되기 시작하면서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많이 달라졌습니까?

"적극적으로 북한민주화를 주장하지는 않아도 적어도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이제는 그 실상을 부인할 수 없게 된 거죠."

지난해 일본 고이즈미 총리의 북한 방문 때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사실을 시인한 것이 조총련이나 일본 좌파들에게는 큰 충격이었겠습니다.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를 직접 시인하면서 친북세력, 특히 조총련과 연계를 맺고 일하던 사람들이 너무도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런 말을 하더군요. '혹시 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왜 장군님이 그것을 인정하느냐? 있었다하더라도 인정을 하지 않으면 되었을 텐데'라고 말입니다. 그만큼 충격이 크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인정을 해버렸으니 어쩌겠습니까. 지금 조총련 사람들은 진짜 핵심분자들을 빼고는 다 마음이 떠났습니다."

지난해 10월 북, 일 정상회담에서 김정일이 고이즈미 총리에게 일본인 납치 사실을 시인한 이후 일본의 신문과 방송은 온통 북한에 대한 특집 기사로 봇물을 이루었다. 기자들이 대거 한국으로 몰려와 탈북자들을 인터뷰하고, 한국 주재 기자들도 눈코 뜰 새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하루 방송의 거의 모두를 북한관련 프로그램으로 편성한 방송사도 있었다.

별의 별 것을 다 취재해갔다. 처음에는 일본인 납치문제와 관련한 정보를 갖고 있는 탈북자들을 인터뷰하더니, 한 방송국에서 정치범수용소 문제를 다뤄 시청률이 높자 연이어 수용소 출신 탈북자들을 만나게 해 달라고 전화가 빗발치고, 다음에는 북한의 군사력, 마약 및 미사일 수출 문제, 여성의 현실, 재중 탈북자들의 실태 등으로 확대되어갔다.

물론 이웃나라 일본의 방송이 북한문제에 관심을 갖고 집중적으로 이를 보도한 것은 너무도 고마운 일이며, 북한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의 입장으로 볼 때 머리 숙여 감사해야할 일이다. 아마 남한 방송국 기자들이 그렇게 열성적으로 북한의 실상에 대해 보도하고, 남한 방송사들이 당시 일본 방송에서 편성했던 시간의 1/3이라도 북한관련 프로그램을 제작한다면 남한 사람들의 인식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북한의 민주화도 그만큼 앞당겨질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의 분위기는 우익의 목소리를 한껏 높여 놓았다. 이시마루씨는 이에 대해 '좌익의 업보'라고 이야기한다. 북한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두둔했던 과거 때문에, 이제 막상 북한의 실상이 만천하에 드러나고 나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일본의 대표적인 친북지식인으로 국내에도 그의 저서가 여러권 출판된 바 있는 와다 하루끼(和田春樹). 그는 그동안 '북한이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것은 어떠한 증거도 없는 거짓선전'이라고 주장해오다가 김정일이 제 입으로 시인을 해버리니 하늘만 쳐다보는 꼴이 되었다(그는 얼마 뒤 아사히신문에 태연히 북한문제와 관련한 기고를 했다. 참으로 낯짝도 무껍다). 현재 일본에서는 북한문제와 관련해서는 좌파가 전혀 목소리를 내지 못할 정도로, 우익에게 완전한 '북한문제 전매특허'를 내준 상황이 되었다.

"김정일의 일본인 납치 시인은 일본의 우익들에게 찬스가 되었습니다. 북한의 핵, 미사일에 대응하여 우리도 핵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쉽사리 나옵니다. 일본 땅에 있는 조선사람들을 다 추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마저 생겨나고 있으며 북한이라는 나라하고는 일체 관계를 가지면 안된다는 주장도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저도 한국에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했던 친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북한의 인권상황에 대하여 아무리 이야기해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북한의 실상을 담은 비디오를 보여주면 그때서야 좀 '아, 이렇구나'하는 정도입니다. 한국의 좌파들이 북한문제에 대해 지금과 같은 입장을 계속 취한다면 일본 좌파처럼 완전히 목소리를 잃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 한국에는 아직도 북한의 인권실상을 인정하지 않고, 극히 소수이긴 하지만 주체사상을 신봉하고 김정일을 위해 투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북한문제에 대한 입장의 차이는 사상(思想)의 차이가 아닙니다. 북한 사회의 현실을 정확히 안다면 자연스럽게 북한의 인권실상을 규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좌익이든 우익이든 말입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취해왔던 입장을 생각지 말고 진정으로 북한 인민을 위하는 것이 뭔지, 다음 세대의 요구가 무엇인지 잘 판단해보고 행동하길 바랍니다. 문제는 잘 알려고 하지 않고 믿으려 하지 않는데 있습니다."

한국 사람들처럼 북한이 같은 민족임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서 일하는 것이 쉽지 않은데, 선생님과 같이 민족도 다른 분이 북한 민주화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원래 저는 조선민족과 친하게 관계를 가지고 살고 싶다는 결심을 가졌습니다. 그것은 한국에서 유학을 마치고 일본에 돌아갔을 때도 그렇고, 또 운동을 하고 있는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 경제적인 형태의 사업을 할 수도 있지만 그 결심이 변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북한 주민들이나 조선족, 한국 사람들을 만나면서 일본사람에 대한 반발심이 많다는 것을 느낍니다. '일본 사람인 내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라고 생각해보면 북한문제 해결에 이바지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합니다. 기자로서 해야 할 일이고, 내 인생을 걸어 꼭 성공해보고 싶은 일입니다."

선생님은 여전히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현재 저는 그냥 무정부주의라고 할까요......, 세상에서 말하는 진보, 보수는 다 버렸습니다. 다만 사실에 충실하자는 것입니다. 좌든 우든 옳은 것은 옳다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나타난 사실'에 기초하여 판단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만약 북한의 독재정권이 퇴진된다면 북한의 재건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지원이 필요할 것이라 예상되는데 여기에는 동참할 의향이 있습니까?

"그건 한국사람들이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한국 사회는 민주적으로 아주 성숙됐습니다. 일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으로 문제가 없는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하고 다르다고 믿습니다. 북한의 김정일 정권만 무너지면 한국이라는 건전한 정부가 있기 때문에 걱정을 안 해도 된다고 봅니다.

그 가운데 일본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지원입니다. 만일 북한에서 난민들이 오면 무조건 받아야하고 사회가 안정될 때까지 재정지원을 하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북한 주민들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조건은 금방 만들어질 것이라 확신합니다."

북한의 민주화를 추진하기 위해서 한국정부에 하고 싶은 말은 없습니까?

"저는 외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정부에 대하여 크게 하고 싶은 말은 없고, 있다해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권과 민주주의를 보편적 원리로 자각하고 한국이든 일본이든 그 어떤 나라이든 양심적으로 북한 주민들의 인권개선과 민주화를 위해서 힘을 합쳐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내 동생 철수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저쪽에 보니 옆 집 민수가 지나가고 있다. 그런데 나는 민수와 사이가 좋지 않다. 어제도 한바탕 싸웠다. 그래서 동생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민수를 부르지 않았다.

한국의 좌파들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북한 민주화를 주장하면 우파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밖에 안 된다고. 이런 'B급 좌파'(논객 김규항의 표현)는 죽어 가는 동생보다 어떻게든 민수와 얼굴을 보지 않고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할 사람들이다. 설령 우파에 힘을 좀 실어주면 어떤가. 우파가 득세하는 것이, 북한 인민들이 세기의 침묵 속에 죽어 가는 것보다 더 심각한 문제란 말인가. 이시마루씨의 경고대로 이렇게 가면 한국의 좌파는 적어도 북한문제와 관련해서는 영영 할 말을 잃어버릴 것이다(양심이 있다면 그렇겠지만 양심 없는 좌파들은 또 무언가 변명을 늘어놓겠지). 북한 인민들이 그들의 과거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이시마루 씨와의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내내 머리 속에는 '국제주의(國際主義)'라는 말이 맴돌았다. 19세기 후반 제국주의(브루주아 국제주의)의 팽창에 대항하여 좌파들은 '프롤레타리아의 국제주의'를 주창했다. 1864년 영국 런던에서는 노동운동가들과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제1인터내셔널(International Working Men's Association)이 깃발을 올렸다. 1889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제2인터내셔널이, 1919년에는 러시아의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Comintern)이라는 이름의 제3인터내셔널이 창설되었다. 애초에 사회주의자들은 본질적으로 국제주의자들이었다.
21세기의 벽두에서, 세계화에 반대하는 반(反)세계화 운동가들이 세계적으로 연대를 맺고 운동을 펼치는 아이러니컬한 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스스로를 좌파라고 말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아무렴 좋다. 세계화에 반대해 세계적으로 연대를 맺든, 세계화를 추진하려고 정상회담을 하든 인류의 미래를 국적에 상관없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흐름이다. 마르크스가 저승에서 껄껄 웃을 일이다.

그런데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 북한 인민의 현실을 '북한 내부의 문제'라고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크게 꾸짖을 것이다. 그는 어느 '계급'의 인간이냐를 중시했지 어느 '나라'의 인간이냐 하는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가 분석했던 시대의 프롤레타리아보다 더욱 비참한 운명에 처해있는 사람들이 지금의 북한 인민이다. 마르크스가 살아있다면, 김정일이라는 유일지배자 밑에 신음하는 피착취계급으로서의 북한인민을 해방하기 위해 온 인류가 떨쳐나서자고 호소했을 것이다. 공산당선언의 말미에 쓴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구호에 빗대자면 '만국의 좌파여, 그리고 우파여, 온 인류여 단결하라! 북한 인민의 해방을 위해'라고 외쳤을 것이다.

북한의 민주화를 위해 벽안의 서양인도, 일본의 좌파 지식인도 나서는 마당에 한국의 좌파들은 언제까지 망설이고만 있을 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