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에 있는 큰 거울을 조심하도록’

‘호텔에 있는 큰 거울을 조심하도록!’
나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 방북단의 동행기자 120명 중 한 사람으로서, 2002년 9월 16일부터 18일까지 평양을 방문했는데, 사전에 이와 같은 주의를 비공식적으로 받았다. 숙소인 고려호텔은 45층 건물로, 트윈타워의 북한 최고급호텔이다. 3029호실의 키를 받고 엘리베이터로 30층에 오르자, 어두침침한 바닥을 바라보도록 정면에는 사방 2ｍ의 큰 거울이 부착되어 있었다. 거울 아래에는 세심하게 공기구멍까지 있다. 트윈룸의 방으로 들어가니, 침대 왼쪽에도 부조화를 이루는 똑같은 큰 거울이 끼워져 있다.

1층 입구 왼쪽에 있는 조선요리 레스토랑이 임시 프레스센터로 마련되어 있고, 한 회사에 한 명씩 안내원이라는 감시원이 따라붙는다. 나에게는 무슨 일인지 남녀 한 명씩(L씨와 S씨) 감시원이 붙었다. 두 사람 모두 일본어가 불가능해 북한어로 이야기를 했다.

평양외대 영문학과를 졸업한 재원인 30대 중반의 S씨가, 표정하나 바꾸지 않고 나에게 인사를 했다.
“오늘 일기예보에서는 비가 내린다고 했는데, 위대하신 김정일 장군님의 자비로 맑은 가을날씨 속에 여러분을 맞이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후에도 가는 곳마다 ‘위대하신 장군님(또는 영도자)의 덕분으로’라는 형용사구를 들었지만, 북한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속 깊이 그렇게 믿고 있는 듯 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방북이 다음 날이라, 오후에는 북한 외무부의 호의로 시내관광이 마련되었다. 한 시간 관광조는 이쪽으로, 두 시간 관광조는 저쪽으로라며, 일본 외무성 직원들이 기자들을 두 조로 나누었다. 이런 일을 공동기획하는 양국의 외무성도 이상했지만, 소풍 온 어린이들처럼 즐거워하며 정렬하는 기자들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저녁에는 투어의 연장으로 옥류관의 ‘냉면투어’가 기획되었다. 나는 프레스센터에서 기사를 쓰겠다며 안내원에게 거짓말을 하고, 마음대로 호텔을 빠져나와 주위를 돌아보기로 했다.

북한에서는 숙소를 벗어나 혼자서 외출하는 일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호텔 로비와 입구에는 스무 명 정도의 감시원들이 떡 버티고 서서, 안내원 없이는 외출할 수 없다며 무표정한 얼굴로 가로막기 때문이다. 나는 중국인 관광객 흉내를 내기도 하고, 호텔 앞에서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자 한다며, 감시원을 따돌리고 밖으로 나왔다.

외출을 해도 난관은 따라다닌다. 호텔 앞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시내에 3대 정도 있을 듯한)를 타려고 해도, 도로 반대쪽에 있는 ‘승리식당’에 들어가려고 해도, “안내원 없이는 이용할 수 없습니다”라며 거부를 당했다. (저녁에는 오랜 교섭 끝에, 나는 이 식당 개점이후, 안내원 없이 들어간 두 번째 일본 관광객이 되었다.) 북한에서는 일반시민이 적국(敵國) 일본 국민과 말을 하는 것만으로도 처벌을 받는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냉전상태를 절실하게 실감나게 했다.

세계에서 제일 한적한 중앙역

평양시내 도로에는 신호등이 전혀 가동되지 않고, 교차로에는 흰 상의에 푸른색 치마를 입은 교통여경이 깃발을 흔들고 있다. 호텔 앞 창광거리도 평양의 제일 번화가 중 하나이지만, 자동차는 드문드문하고, 사람들의 왕래도 별로 없다. 나중에 알았는데, 이 길 1㎞ 정도는, 말하자면 고려호텔에 투숙하는 외국인 숙박객의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한, 영화의 야외촬영 장소와 같은 곳이었다. 예를 들어, 호텔 도로를 사이에 두고 반대쪽에 있는 역전미용실은 ‘월요일 정규휴일’이라는 팻말이 걸려있지만, 이날(9월 16일 월요일)은 영업을 하고 있었다. 호텔 왼쪽에는 디지털카메라 현상소까지 설치되어 있는데, 안내원의 이야기로는 대부분의 서민은 소형카메라도 갖고 있지 않다고 한다.

창광거리의 비탈길을 300ｍ정도 내려가면, 중앙에 웃음을 띤 김일성 초상화가 걸려있고, 그 옆에는 ‘위대하신 수령, 김일성 동지 만세!’라는 붉은 글씨가 쓰여진 평양역에 도착할 수 있었다. 멋진 흰색건물의 역사 안을 창문너머로 들여다보니, 전등은 꺼져 있고, 오후 3시 전인데도 역사는 텅 비어있다. 상냥하게 보이는 여자역무원과 눈이 마주쳤다. 잠깐 망설인 나는 용기를 내어, 일본에서 왔는데 역을 안내 받고 싶다고 하자, 의외로 흔쾌히 좋다고 했다.

먼저 소개받은 곳은, 1964년 1월 22일 김일성 주석이 다녀갔다는 10평 가량의 방으로, 그 이후에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다음에 귀빈실을 보고, 아리랑축전과 조선노동당 55주년 기념사진이 붙어있는 복도를 지나 귀빈대기실로 들어갔다. 넓기만 할 뿐 어두침침한 실내에서 기다리고 있는 귀빈은 한 명도 없고, 눈앞에 보이는 매장에는 술과 과자 등이 진열되어 있지만 파는 사람도 없다.

그 옆이 일반매장과 개찰구로 되어있다. 시간표를 보니 하루 21대의 열차가 발착하는데, 역원에게 오늘의 열차수를 묻자, “글쎄요. 다음 열차는 19시 40분 도착의 신의주에서 오는 열차입니다”라고 했다. 매표소 앞에서는 지방에서 온 네 명의 젊은이가 열차는 언제 오느냐며 목소리를 높여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소리를 잠재우기라도 하려는 듯 ‘혁명민요’가 역사에 울려 퍼졌다.

매표소 옆에는 ‘2002년 8월 22일∼24일 위대하신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러시아연방 극동지역 방문 7천만리 불멸의 노정도’라는 거대한 극동지역 지도가 걸려있다. 한반도 전체가 북한 영토로 그려져 있고, 그 옆에 있는 일본의 큐슈는 없고, 북한보다 작게 그려져 있다.

다음 날 인터뷰한 평양주재의 외교관은, “김정일은 돈도 없으면서 부친과 조-러 철도건설에 합의했고, 평양의 지하철 3호선도 가까운 시일 내 착공한다.(현재는 2호선까지 있다.) 이것은 일본으로부터 받은 경제원조를 모든 예산에 포함시킨다”라고 했다.

역 앞 광장에는 언제 올지도 모르는 열차를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이 앉아있다. 여중생 한무리에게 말을 걸자, “우리 원산서구중학교의 학생들은 장군님의 덕분으로 평양에 있는 사회과 견학이 가능했습니다”라며 일제히 암송하는 것이다. 청진에 있는 혁명사업소에서 일하고 있다는 49세의 남성에게 “고이즈미 준이치로를 어떻게 생각합니까?”라고 물으니, 멍한 표정만 지을 뿐이다. 그 후, 다른 상점 점원들과 식당 직원들에게도 ‘고이즈미 방북’에 대해 물어보았지만, 모두가 ‘모른다’라고 답했다.(이때, 관 주관 하에 투어를 하고 있던 기자들이 [고이즈미 방북기사를 열심히 보는 평양시민]이라는 제목으로, 다음 날 각 조간신문을 장식할 사진을 찍고 있었다.)

거리에는 수리점(修理店)만 번성

고려호텔에서 평양국제문화회관을 향하는 작은 길을 걸었다. 도중에 남자들 몇 백 명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 도대체 뭘 보고 있나 살펴보았다. 평양제일중학교에서 중학생들이 체육수업으로 축구를 하고 있었다. 평일 오후인데도 풋내기 축구경기를 못 박힌 듯 서서 보고 있는 이 남성들은 일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것인지.

평양의과대학병원 앞의 김정일의 출생지 - 이른바 성지(聖地) - 를 연구하는 백두산연구소는 ‘21세기의 태양 김정일 장군님 만세’라는 현수막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흰 벽이 벗겨진 낡은 건물이다. 지하철 봉화역 모퉁이를 오른쪽으로 돌아 해방산거리로 가면 국립연극극장이 있는데, 건물은 폐쇄되어 있었다. 극장 지붕에 ‘위대한 김일성 동지는 영원히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 ‘있는 힘을 다하여 웃으면서 앞으로 나아가자’라는 어울리지 않는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평양 거리를 걷다보면 어느 곳을 가더라도 시민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평양시민은 외출 시에는 반드시 김일성 배지 또는 김정일 배지를 착용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어, 배지를 착용하지 않은 나는 다시 말해 이분자(異分子)였다. 큰길 모퉁이에는 대체로 두 명의 경관이 서 있고, 한 걸음 뒷골목으로 들어서니 ‘경방’(주 : ‘경무’를 잘못 본 듯함)이라고 쓴 붉은 완장을 찬 사람이 의자에 앉아 노려보고 있다. 나무로 만든 모형장총을 안고 걷는 여자아이가 많은 것도 썩 좋은 기분이 아니었다. 나는 사회주의 국가인 중국에서 생활한 적이 있고 세계 각 국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 정도의 긴장감이 넘치는 거리는 처음이었다.

시내 일반상점은 한결같이 닫혀있거나 팔 물건이 없어 폐점휴업 상태이다. 상점 입구에는 대부분 ‘봉사시간 10시∼7시까지’라는 영업시간이 표시되어있지만, 봉사는커녕 상점 안은 어둡기만 하다.
그런 가운데 유일하게 번성하고 있는 곳이 수리점이다. TV수리점(판매점이 아님)에는 30년 전에 본 듯한 낡은 TV가 3단 선반에 진열되어 있고, 가죽수리점에는 밑창이 너덜너덜한 가죽신발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다.

큰길과 뒷골목의 차이

고려호텔에서 동쪽으로 30분 정도 걸으면, 화려한 평양대극장에 닿을 수 있다. 상영중인 [당의 성실한 딸]의 주인공인 여 병사가 총을 들고 있는 큰 간판을 왼쪽으로 해서 영광거리를 건너면, 흰 벽돌로 지어진 6층 건물과 연결된다. 1층에는 양복점, 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그 한쪽 모퉁이에는 정원 안으로 통하는 좁은 입구가 있다. 세 명이 들어가려 하고 있어, 그들의 그림자처럼 나도 따라 들어갔다. 안으로 발을 들여놓는 순간, 나는 멈칫 그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곳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빈민가가 펼쳐져 있었다. 꼬질꼬질한 얼굴에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있는 두 명의 남자가 바닥에 앉아 장기를 두고 있고, 비슷한 모습의 열 명 가량의 남자가 그것을 보고 있다. 다 떨어져 가는 신발을 신은 여자들이 힘없이 걷고, 상의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아이들이 뛰어다니고 있다. 빈민가 특유의 이상야릇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곳에서는 김일성 배지를 착용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큰길에 있는 멋진 흰색 벽과는 대조되게, 뒷골목에 있는 건물 벽은 페인트와 벽돌이 벗겨지거나 떨어져나가 폐가와도 같았다. 원두막 같은 식당과 면을 파는 식당은 있지만, 어디에도 간판뿐이다. 안쪽에는 금이 간 콘크리트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그 옆에는 고장난 버스가 서 있고, 그 속에도 사람은 없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평양시내 각 구역마다 있다는 암시장을 찾았다. 하지만, 빈민들의 어리숭하게 공갈치려는 시선이 참기 힘들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고려호텔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김책공업종합대학교 안에도, 콘크리트가 반쯤 떨어져 나간 건물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벽이 무너지려는 듯 금이 가 있지만, 평양에서는 공사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다. 이틀 동안 종횡무진하며 거리를 돌아다녀도 공사현장이라고는 승리거리를 따라 건설중인 대극장과 해방산거리 두 곳뿐이다. 게다가 두 곳 모두 기계장비를 사용하지 않고, 망치와 삽으로 공사를 한다.

밤 9시를 지나 다시 평양역에 가보았다. 빛이라곤 밤하늘에 걸린 반달뿐, 먼 곳이 보이지 않아도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아 위험하지는 않다. 역 앞 지하도로 내려가니 벽 한쪽이 문으로 되어있고 안에는 1.5평 정도의 공간에 침대와 식기선반이 있어, 아마도 사람이 살고 있는 듯 했다.

어두운 역에는 열차도 오지 않을 뿐더러 내리고 타는 손님도 없다. 대신에 젊은 연인들이 벽 쪽에 쪼그리고 앉아 손을 잡기도 하고, 서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있었다. 그 주변을 십여 명의 경관이 어슬렁거린다. 불량자 단속이라도 하는 것일까.

역 앞에서 서성거리를 따라 보통강 쪽으로 올라가니, 오른쪽 건물 안에서 희미한 불빛이 보여 가까이 가보았다. 그 곳에도 오후에 보았던 빈민들의 주거지처럼 허술한 콘크리트 건물이 펼쳐져 있다. 달랑 셔츠 한 장 걸친 남자들이 입구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수도 평양의 중심부에서조차 이런 모습이라면 지방의 참상은 상상이 간다. 평양주재 한 서방측 외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평양에서 원산간 200㎞를 차로 달리면, 호메이니(주 : 이란의 종교학자이자 정치가. 1989년 사망)시대의 이란을 방불케 하는 기아세계를 눈으로 볼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훨씬 전에 붕괴나 쿠데타가 일어났겠지만, 이런 비참한 상태에서조차 한결같이 김일성·정일교(敎)를 믿고 따르는 북한 사람은 제정신이 아니다.”

역 앞에 있는 백화점

9월 17일 아침, 고이즈미 총리의를 맞기 위해 순안공항을 왕복했다. 총리가 백화원에서 김정일과 직접담합을 하고 있는 동안, 나는 다시 호텔을 빠져나와 거리를 배회했다.
큰길에 있는 상점들은 변함 없이 개점휴업상태여서, 어제 정기휴일이던 역 앞에 있는 백화점에 가 보았다. 입구의 여 점원은 “이곳은 위대하신 김정일 장군님도 61년에 방문하신, 제일백화점과 견주는 평양의 2대 전통백화점”이라며 자랑했다. 하지만, 1층의 식료품 매장을 제외한, 2층의 화장품과 조선특산품 매장에서 6층의 각 지역 특산품 매장까지 손님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와 에스컬레이터가 없어 6층까지 걸어 올라가자 “손님이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구석에서 잡담을 하던 여 점원들이 급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꽤 넓은 공간임에도 매장 내는 활기도 없고, 무엇보다 제대로 된 물건이 거의 없다.

예를 들면, 6층 입구에 있는 자강도(慈江道)의 특산품은 노트와 연필(색연필도 있었다)이라고 한다. 노트는 색이 바래 누랬고, 12자루가 1세트라는 연필은 길이와 두께가 제각각이다. 담당 여 점원에게 “자강도는 목재가 풍부해서 노트와 연필이 특산품입니까?”라고 묻자, 조금 부끄러운 목소리로 “저는 평양출신이라 잘 모릅니다.”라고 답했다.

북한은 2002년 8월에 △가격 대폭 인상 △급료 대폭 인상 △1달러=2.15원을 150원으로 인하한다는 골자의 ‘경제개혁’을 단행했다. 이것에 대해서도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1원하는 연필세트가 7월까지는 얼마였습니까?”, “5전(0.05원)이었습니다.”, “가격이 갑자기 20배가 되어 생활고는 없습니까?”, “급료도 10배로 오르고, 배급도 받기 때문에 괜찮습니다. 경제개혁은 위대하신 장군님이 직접 결정하신 것이므로, 앞으로 반드시 생활은 나아질 것이라 믿습니다.”

반짝반짝 눈빛을 빛내며 답을 하니, 더 이상의 할 말이 없었다.
백화점 안에는 유일하게 다섯 명의 손님이 있었는데. 1층의 사탕(15원)코너와 비스킷(30원)코너였다. 별로 사고 싶은 물건이 아니라, 옆에 있는 녹색상자 속의 쌀과자(60원)를 사려고 점원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여 점원은 잠깐 기다리라며 옆에 있는 동료에게 “이거 상했는지도 모르는데 팔아도 괜찮을까?”라고 속삭였다. “걱정되면 네가 하나 먹어봐.”, “그래.”

어이없는 대화를 나눈 여 점원이 상자를 열자, 쌀과자 10개가 바닥에 눌러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그냥 비스켓으로 주세요”라고 하자, 점원은 매우 죄송해하며 “그럼 특별히 포장해서 드릴께요”라며 ‘조선평양’이라고 써진 포장지를 꺼냈다. 그리고 “특별히 리본으로 묶어 드릴께요”라며 서비스 정신을 보이긴 했지만, 중요한 접착용 테이프가 보이지 않아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결국 어느 코너에서 빌려왔는데, 이번에는 테이프가 벗겨지지 않아 또 우왕좌왕하며 겨우 포장을 끝냈다. 손님이 유일하게 한 명인 1층 식료품 매장이 이런 모습이다.
그런데 이날 오후, 어느 조선노동당 관련 건물 안쪽에 눈에 띄지 않는 상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출입하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달랐다. 입구에 두 명의 감시원이 있어 순간 망설였지만 마음을 굳게 먹고 들어갔다.

입구를 지나자 북경(北京)맥주의 최신 상표가 쌓여 있었다. 왼쪽 가전제품 코너에는 테이프레코더와 CD, 중국제 VCD플레이어(13,500원 : 서민의 9개월치 급료!)까지 놓여있다. 오른쪽 의복코너에는 색색의 치마저고리가 진열되어 있고, 가을 향기를 풍기는 갈색 브라우스를 입은 부인이 옷을 만지고 있었다. 과자코너에는 홍콩제 과자류가 인기있는 듯 했다. 주류코너에는 위스키에서 7,117원이나 하는 위스키 XO까지 있다.
좁은 매장을 한바퀴 돌고 나니 뭔가 불만이 밀려왔다. 서민은 굶어가더라도 간부들을 위한 물건은 있다는 것이다.

한나절 강변의 대합창

고이즈미와 김정일의 회담이 막바지에 들어간 오후, 나는 또 호텔을 빠져 나왔다. 창광거리와 해방산거리의 교차로에는 상점이 세 곳 있는데, 그 중 유일하게 낮잠을 자지 않고 있는 빵집 아줌마에게 물어봤다.
“지금 일본 총리와 장군님이 북한의 납치문제에 대해 협의하고 있는 것을 아십니까?”
“우리같이 착한 사람이 납치 같은 것을 할 리가 없어요!”라는 날카로운 목소리 때문에 옆에서 졸고 있던 다른 상점 아줌마들을 깨우고 말았다.

두 정상이 ‘평양선언’에 서명을 하고 있을 즈음, 나는 맑은 가을의 대동강 강변을 걷고 있었다. 보도에는 ‘주체 89년(2000년) 완공’이라고 써 있지만, 한 장에 사방 20cm정도의 타일은 깨지거나 떨어져나가 패여 있다.
강 건너편에 있는 주체사상탑이 이쪽을 노려보고, 강가에는 개점휴업중인 유람선이 묶여있다.
그런데 등 뒤에서 갑자기 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십 명 정도의 당 조직 합창부대가 김일성광장 옆 언덕에서 회담장인 백화원까지 들릴 정도로 혼성합창을 하고 있는 것이다.

“김일성 장군님은 일제의 나쁜 무리들을 우리 땅에서 쫓아내셨고, 김정일 장군님은 그것을 잇기 위해 분투하고 계십니다. 우리들은 일심단결하여 김정일 장군님을 도와……♪♬……”

참으로 무시무시한 가사다. 그러고 보면 어제저녁에도 평양 FM라디오 방송에서 ‘수령님은 항상 우리들과 함께 하신다’라는 제목의 연속낭독 프로그램이 한 시간 정도 진행되었는데, ‘일제에 아부하는 친일파를 김일성 장군님이 소탕한다’라는 내용이었다. 낭독 후에는 보천보(普天堡)음악단의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님의 혁명적인 음악’이 약 한 시간 동안 흘러나왔다. 김정일 장군님이 겉으로는 아무리 웃음을 지어 보여도, 일본을 적시하는 일제에 대한 감정은 변할 리가 없다.

맥주를 마시는 무표정한 남자들

이렇게 평양을 둘러보고 있는데, 오후에 고려호텔 동쪽 영광거리의 상점가에 약간의 상품이 들어왔다.
한 서민이 큰길로 와서는 좁은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일본에서 말하는 파칭코(슬롯머신)의 경품교환소와 같은 작은 창문이 있고, 조금 지저분한 옷을 입은 남자들이 모여 있다. ‘배급소’라는 간판은 없지만, ‘식량권’을 발급하는 곳이었다. 남자들이 만원을 이루며 식량권을 사고 있었다.

식량권을 손에 넣자, 그것을 가지고 큰길로 나가 좁은 식당에 모인다. 가져온 유리병에 500ml의 평양맥주를 채운다. 그 자리에서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는 사람도 있고, 조심스럽게 갖고 가는 사람도 있다. 일본의 화려한 맥주집과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희미한 식당 안에서 말을 하거나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가 생활고에 찌든 모습이다. 옆에 있는 화장실은 페인트가 벗겨져 있고, 변기는 금이 가 있으며, 수돗물은 나오지도 않았다.
지금까지 두 번 본 생선가게에는 전갱이처럼 생긴 생선 세 마리가 있다.
식량권을 가진 아줌마가 ‘어느 놈이 맛있을까’라고 중얼거리며, 세 마리를 이리저리 비교하며 열심히 고르고 있었다.

가까운 빌딩 1층을 차지하는 원형식당은 여전히 폐점상태였지만, 식당 앞에 있는 포장마차의 소프트크림 가게에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한 개에 10원 하는 그것을 나도 사 먹어보았다. 바닐라는 당분이 적어 맛이 별로였고, 웨이퍼스(양과자)는 습기가 차 눅눅했지만 그것이라도 매우 귀중한 먹을거리라고 생각했다.

길에서 소프트크림을 핥아먹고 있는 어린이들의 얼굴에서, 처음으로 웃는 모습을 보았다. 서울에서 본 웃는 얼굴 그것과 같았다. 김정일 독재체제라는 멍에 속에, 남과 북이 공통되는 순수한 얼굴이 감춰져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김정일 장군님의 승리선언

고이즈미 총리의 기자회견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뭔가에 끌리듯 고려호텔로 돌아갔다.
호텔 입구에는 안내원 L씨와 S씨가 기다리고 있었다. 왜 마음대로 외출을 하느냐며 화를 냈다.
창광거리에 갑자기 가로등이 켜지고, 길가의 식당들이 일제히 문을 열었다. 고이즈미 총리의 리무진이 고려호텔로 들어간다. 총리는 호텔 2층에 있는 ‘영화장’에서 회견을 마친 후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다. 그러자 창광거리의 가로등이 갑자기 꺼지고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았다.

프레스센터에서 동행기자들이 일제히 원고를 쓰기 시작했다. 떠들썩한 실내에서 원고를 보낼 필요성이 없는 유일한 나는, 중앙에 놓여있는 TV를 보고 있었다. 조선중앙TV에서 김정일 장군을 칭송하는 매스게임을 중계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자 아나운서가 화면에 나타나 큰소리로 연설을 하기 시작했다.
“임시뉴스를 전달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위대하신 영도자 김정일 동지께서는 오랜 기간 고난을 극복하시고, 일본 총리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평양선언에 서명을 했습니다. 고이즈미는 김정일 동지에게 과거 식민지 지배를 사죄하고, 배상책임을 인정해……”

참으로 적국 일본 총리를 무릎 꿇게 한 김정일 장군의 승리선언이다. 뉴스는 계속되었다. “나이지리아 신문이 위대하신 영도자 김정일 동지의 선군정치(先軍政治)를 칭송하는 보도를 시작했습니다.”, “파키스탄 신문도 선군정치를 칭송하는 보도를 시작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세 명의 논설위원이 나와 임시좌담회를 시작했다. “고난을 극복하신 김정일 장군님의 신념에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국교정상화를 위해서 일본이 우리나라에 신세진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들은 전후 오랜 기간, 일본으로부터 사죄와 배상을 받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습니까?”…….

납치의 ‘ㄴ’자도 언급하지 않았다. TV를 보고 있자니, 김정일 장군은 일본과 선례가 없는 역사적인 과업을 이룩한 것 같았다. 이대로 평양에 계속 머문다면, 나도 금방 세뇌 당할 것만 같았다.

이런 광신적인 종교국가와 졸속하게 국교를 맺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히려 이대로 김정일 독재체제가 질식사하기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 아닌가. 납치문제를 국교정상화 교섭과는 별개로, 경제지원은 어쩌면 현 정권보다는 다음 정권에서 처리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초가을 평양에서 이런 것들을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