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황장엽의 증언으로 밝혀진 북한의 핵보유 전략

1. 북한의 준비된 핵카드

이른바 2차 북핵사태가 벌어진 계기는 널리 알려졌듯이 지난해 10월 켈리 미국무부 차관보가 방북했을 때 북한의 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추진의 시인이었다. 켈리 차관보의 추궁에 대해 북한이 처음에 부인하다가 갑자기 시인으로 선회한 배경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가지 추측이 있어왔다. 김정일 위원장의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판단 착오라는 분석도 있었고, 부시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에 대한 대응이라는 상황론적 해석도 나왔으며, 일각에서는 미국의 모략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방미 과정에서 황장엽 전(前) 노동당 비서가 이와 관련한 결정적 증언을 하였다. 노동당 국제비서의 자격으로 외교부장, 대남비서와 함께 핵개발의 대외담당을 했던 황 전비서는 지난 ‘10월사건`은 이미 오래 전에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는 증언을 한 것이다. 월간조선 2003년 12월호에 따르면 황 전비서는 미국무부 관계자들과의 대화에서 북한의 핵전략을 파악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고 한다.

황 전비서에 따르면 시나리오의 발단은 1994년 제네바 합의에서 비롯된다. 제네바 합의에 따르면 경수로의 핵심부품이 들어가기 전에 특별사찰을 실시하도록 되어 있다. 특별사찰의 대상은 제네바 합의 이전에 가동한 원자로의 사용 후 핵연료이다. 이의 재처리 상황에 대해 사찰을 하게되면 어느 정도의 플루토늄이 추출되었으며, 동시에 사라졌는지(핵무기 제조에 쓰였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황 전비서 등이 참여한 회의에서 당시 전병호 당군수공업비서는 ‘제네바 협상에 따르면 5~6년 후에는 사찰을 받아야 하는데 대책이 없다’고 하자 김정일은 ‘5년 후에 (핵무기 보유사실을 )선포하고 (미국과)대결할 수 밖에 없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또한 김정일은 ‘NPT(핵확산방지조약)에 괜히 들어갔다. 사찰을 공연히 하겠다고 했다’고 후회했다고 한다.(월간조선 2003년 12월호 P248~249) 어차피 사찰을 통해 핵개발 사실이 밝혀질 거라면 미리 공개하고 치고 나가자는 선택을 이미 5년 전에 해둔 것이다.

사실 우라늄농축 핵개발이 쟁점이 되기 이전에 특별사찰을 둘러싼 논란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대해 북한은 그 시기를 몇 년 뒤로 미루자는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사실상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이 미국측에 들키게 되자 김정일 정권은 계획된 대로 ‘울려고 하는데 빰 때려준다’는 속담처럼 다시 ‘벼량끝 전술’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나리오대로 하자면 북한은 결코 핵포기 의사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핵보유국으로 인정(방치)받거나 아니면 핵을 포기하는 척해서 대가만 챙기고 나중에 다시 뒤집는 두 가지 중의 하나를 현실적 목표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북한의 이런 전략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난 90년대의 북미제네바 협상에서 후자의 전략을 이미 써먹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당시와는 달리 핵보유를 공개했다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북한에게 안전보장이나 경제지원 등의 대가를 주면 핵을 포기할 것이며, 심지어 북한의 핵카드는 대가를 얻기 위한 일종의 핵개발 ‘시늉`에 불과하다는 식의 주장은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만 한다.

2. 핵 보유국의 야심

실제로 지난해 ‘10월사건’ 이후 지금까지 북한이 취해온 핵정책은 황 전비서가 증언한 시나리오와 철저히 부합한다.

첫째, 북한은 핵보유를 시인하였다. 이를 판을 키우거나 협박의 강도를 높이기 위한 단순한 협상전술로 일면적으로만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오히려 핵보유국으로 인정받는 상황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는 것이 현실적이다. 아울러 NPT탈퇴를 서둘러 강행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임을 알 수 있다. 인도나 파키스탄처럼 NPT체제 밖에서 핵보유국의 지위를 갖겠다는 것이다.

둘째, 북한이 이번에도 제네바합의 방식의 해결방법을 고집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지난 6자회담 등에서 이른바 일괄타결, 동시행동`이라는 제안을 했는데 이는 제네바합의 모델을 반복하자는 것으로 간주된다. 제네바합의는 핵사찰이나 핵시설 해체와 같은 실질적인 해결을 뒤로 미루고 일단 핵동결이라는 차원에서 경수로 제공 등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이었다. 선언과 동결만으로 핵포기를 인정하는 매우 특별하고도 관대한 방식이 적용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북한은 실질적인 핵폐기는 뒤로 미루어 놓고 포기선언만으로 안전보장 등의 대가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대가는 얻고 결국 핵포기는 안 하는 일종의`사기전술’의 가능성을 예고한다.

셋째, 미국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요구를 제기하고 있다. 북미불가침협정 체결제안이 대표적이다. 최근 북한이 부시 미대통령이 제안한 다자간 안전보장에 관심을 보이고 있는데 그 내용이 결국은 문제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만약 북한이 한미군사동맹을 실질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내용의 안전보장을 요구한다면 이는 실현 불가능한 요구이며 이를 북한도 모를 리가 없다. 아울러 북한은 경수로 공사중단에 따른 전력손실을 보상하라는 요구를 하고 있는데, 이 또한 미국의 입장에서 적반하장(賊反荷杖)격인 요구에 다름 아니다.

넷째, 북한은 핵협상에 대단히 소극적이다. 지난 3자회담부터 향후 예정된 2차 6자회담까지 중국이 북한의 등을 떠미는 모양이 매번 반복되고 있다. 일설에 의하면 중국은 북한의 회담 참여를 유도하면서 여러 가지 물질적인 특별원조를 제공하고 있다고 한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북한의 협상에 대한 소극성은 스스로 신뢰를 손상시키는 잦은`말 바꾸기`에서도 드러난다. 핵보유를 시인했다가 다시 이를 뒤집기도 하고,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시인과 부인을 여러 차례 반복하고 있다.

3. 북미간의 핵협상 쟁점

황 전비서가 증언한 북한의 준비된 시나리오는 어떻게든 핵보유를 관철시킨다는 것이 그 핵심이며, 가능하다면 제네바 합의와 같이 대가도 챙겨보자는 +α가 포함되어 있는 셈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몇 차례의 핵협상 과정에서 도출된 쟁점들을 살펴보면 이런 시나리오가 작동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 핵포기의 대상 또는 개념
미국은 북한의 핵포기에 대해 `가시적이고 입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법으로 폐기돼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갖고 있다. 또한 그 대상에 대해 완성된 핵무기, 플루토늄 프로그램, 농축우라늄 프로그램 등 크게 3가지로 보고 있다. 반면 북한은 지난 6자회담에서부터 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전면 부인하면서 이를 논의대상에서 제외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북한의 김영일 수석대표는 지난 6자회담에서 지난해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차관보 방북으로 제기됐던 우라늄 농축 프로그램은 ‘오도된 것’이라고 밝힌 것이다.

북한의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은 북핵문제가 다시 제기된 원인과도 관련된 핵심주제이다. 만약 북한의 주장대로 지난해 10월의 사건이 미국의 일방적 오해나 뒤집어씌우기라고 한다면, 제네바 합의로 다시 복귀하면 문제는 간단히 해결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북한이 핵보유를 공개한 만큼 이의 폐기문제는 특별히 다루어져야 된다. 그러나 미국무부의 볼턴 차관은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농축우라늄을 생산하고 있음이 틀림없다`며 `(미국 정부는) 검증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하고 있으며 북한이 농축우라늄을 만들고 있다는 확고한 증거(solid evidence)를 갖고 있다`며 북한의 주장을 일축하고 있다.

이후에도 북한이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계속 부인하게 되면 회담진전은 거의 불가능해진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입장에서 이는 양보나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 제네바 합의과정에서 클린턴 행정부는 ‘핵폐기’를 유보하고 당면한 ‘핵동결’을 선택하여 북한과의 타협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부시행정부는 북한의 비밀 핵개발 시도로 인해 제네바 방식의 실패가 검증되었다고 평가하는 만큼,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적당히 덮어두는 길을 선택할 가능성은 거의 희박해 보인다.

한편 우라늄농축 프로그램 외에도 북한이 보유하고 있다고 선언한 핵무기의 폐기문제도 쟁점으로 잠복해있다. 검증과정에서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얼마나 인정하고 공개할지 여부가 아직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북한이 핵위협을 가할 때와는 달리 핵포기를 선택하고 이를 검증하는 과정에서 핵보유 자체를 전면 부인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또한 검증과정에서 핵무기를 일부 공개하더라도 이를 미국이 액면 그대로 믿어주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2) 핵포기의 대가
두 번째로 쟁점이 되는 사항은 핵포기의 대가를 주는 시점과 방식의 문제이다. 지난 6자회담에서 북한은 ‘단계별 동시이행 방안’을 내 놓았다. 북한이 핵포기 선언/ 핵시설과 핵물질 동결 및 감시사찰 허용/ 핵시설 해체 등의 3단계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미국은 중유제공 재개/ 불가침조약 체결 및 경수로 건설지연에 따른 전력손실 보상/ 대북 외교관계 수립과 경수로 완공 등의 상응하는 조치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의 핵포기에 대해 대가의 형식으로는 아무것도 줄 수 없다는 입장이다. 부시대통령은 ‘대담한 접근’이라고 표현했듯이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미국을 비롯하여 국제사회가 북한을 지원하자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다만 이 지원은 핵포기의 대가가 아니라 북한이 잘못을 교정하고 노선전환을 하는데 대한 지원의 의미라는 것이다. 이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는 현실에 있어서 대가를 주는 시점의 차이로 이어진다. 북한이 주장하는 동시적 타결 즉 ‘맞바꾸기’는 결국 핵포기의 대가로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시차를 두고 사후에 대북지원을 하겠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다. 즉 선(先)핵포기를 정책화하고 있는 것이다.

대북지원의 시점문제는 북미간에 단순한 자존심 싸움만은 아니다. 핵포기는 현실적으로 선언, 사찰과 같은 검증, 최종 폐기 등의 여러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검증과 최종폐기과정에서 새로운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상존하게 되며, 언제든지 원점으로 회귀될 수 있다. 따라서 미국은 불확실한 단계에서 먼저 대가를 주는 흥정은 결코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핵문제에 관한 한 미국은 철저히 북한에 대한 불신을 전제로 접근하는 만큼 ‘사기’당할 위험을 줄이는 안전한 방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아울러 북한측의 동시행동의 대가지불 방식은 필연적으로 협상의 초점이 핵포기가 아니라 대가의 크기로 모아지게 된다. 즉 ‘무엇을 받아야만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식의 거래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깨고 잘못을 저질러서 2차 북핵 문제가 시작된 만큼 이런 방식의 협상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다. 잘못된 행동에 대해 보상을 하거나, 협박에 굴복하는 식의 전례를 남기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한편 북한이 북미불가침협정을 고집하지 않을 가능성이 생긴 만큼, 6자회담에서 일정한 진전이 이루어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파월 미 국무장관이 “이것을 핵위기 해소를 위한 하나의 돌파구로 부르기는 이르다”고 말한 것처럼 북한의 불가침에 대한 태도변화가 조속한 핵포기 결정의 전조(前兆)인지 여부는 여전히 불투명하다. 앞서 언급한 보다 중대한 쟁점들이 여전히 미해결 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2차 6자회담을 비롯하여 대화가 지속되면 북미간에 일정한 상호 입장의 변화는 생길 것이다. 그러나 앞서 검토했던 쟁점들은 중간적인 타협보다는 대체로 한편의 기본적인 입장변화 없이는 진전이 어렵다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최근의 대북안전보장 방안에 대한 북미간의 의견 접근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6자회담의 갈 길이 멀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4. 자의적 해석의 위험성

지난해 10월부터 수년만에 다시 북핵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이른바 북한의 의도에 대한 나름대로의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에너지문제 해결을 위한 핵 개발이라거나, 미국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방어적 차원의 핵개발 위협(일종의 시늉)이라는 비교적 북한의 선의(善意)를 부각시키려는 주장이 있는 반면, 실제 핵보유에 관심이 높다는 주장도 있다. 북한이 핵보유를 선언하면서 전자의 주장이 다소 무색해진 바는 있지만 여전히 북한의 의도를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홍진표 | 시대정신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