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특집 르포
북-중 국경지역을 가다

프롤로그 : 살아있는 공산주의

늘 그렇지만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만나는 일은 긴장의 연속이다. 그 동안 여러 차례 재중(在中) 탈북자 인터뷰를 진행해봤어도 이번처럼 탈북자들을 만나기 어려운 적이 없었다. 북-중 국경지역엔 여전히 탈북자들이 많았지만, 인적이 드문 겨울에 그들을 찾아 농촌마을에 들어가 장시간 인터뷰를 한다는 것은 서로에게 위험한 행동이었다. 따라서 그들을 안전한 외곽도시로 데리고 나와야 했는데, 그 과정에 몇 개의 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위조 신분증을 갖고 있거나 중국말을 대단히 잘 하는 탈북자의 경우 통과가 가능하지만, 이런 사람들은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특히 올해는, 중국 당국이 탈북자에 대한 체포뿐 아니라 탈북자들을 지원하는 단체 및 개인 활동가를 체포하는 일에 무게를 싣기 시작하면서 긴장감이 더했다.

매년 그렇지만 겨울이 되면 탈북자들은 더욱 갈 곳이 없어진다. 일감이 없으니 농촌마을에서 일을 도와주며 기숙하기가 어렵다. 눈치를 보고 이리저리 옮겨가며 살 수 밖에 없는데, 그러다 보면 눈에 띄게 되고, 탈북자들을 신고하는데 따른 포상금(중국 인민폐 200위안 = 한국 원화로 3만원 정도)를 노린 사람들에 의해 체포되는 경우가 잦다. 따라서 산 속으로 들어가 움막을 짓고 살던지, 요행 선량한 중국인을 만나 얹혀 살던지 해야 한다. 특히 올해는, 지난해 ‘왕청현 배초구 폭살(爆殺)사건’(37페이지에 자세히 설명)의 영향과 탈북자들을 숨겨주다 걸리면 물어야 하는 벌금(중국 인민폐 2000위안 = 한국 원화로 15만원 정도이며, 웬만한 중국 노동자의 1∼2개월 분 월급에 해당한다)이 인상된 관계로 탈북자들을 인간적으로 동정하며 도와주려는 중국인들이 많이 줄었다.

원래 우리에게 탈북자들을 소개해주기로 했던 안내자(그 역시 탈북자다)가 갑자기 연락이 두절되었다. 그는 우리가 귀국을 하는 날까지 연락이 되지 않았는데, 아마도 체포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무거운 마음을 안고 다른 안내자를 찾았다. 40대의 조선족 아주머니로, 북한을 드나들면서 10여 년간 장사를 해 북한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분이다. 1999년에는 어느 NGO의 부탁으로 인도지원식량을 전해주러 함경북도 청진에 들어가 일하다, 당시 북한에 창궐하던 전염병인 파라티푸스(소화기 계통의 급성전염병으로 고열과 전신쇠약 증상을 보인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적도 있다. 그녀의 어머니는 한국전쟁 때 중공군(中共軍)으로 참전했으며(당시 중국공산당은 언어가 통하는 조선족을 한국전쟁에 대거 징병했다고 한다), 지난 50년간 줄곧 북한과 무역하는 일을 해왔다. 이런 인연으로 인해 그녀는 중국 내에 방랑하는 탈북자들을 보면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계속 도와주었으며 그 때문에 몇 번이나 벌금을 물기도 했다.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하며 만난 그녀는 “북조선을 안 가본 사람은 그 끔찍한 상황을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1999년 겨울에는 가장 절정에 달했어요. 아침에 되면 역전마다 굶고 병들고 얼어 죽은 시체들이 즐비했습니다. 도로변에도 줄을 서듯 시체가 널려있었습니다. 사람들을 그것을 보고도 무심히 지나갔어요. 내가 살면서 그렇게 많은 시체를 봐 본 적은 처음입니다. 시체를 하도 많이 보니까 사람이 길가에 죽어 있어도 모두가 그냥 무심히 지나가요. 그 시체들을 정부에 소속된 트럭이 지나가며 마치 쓰레기 거두듯 집어서 어디론가 싣고 갔습니다. 아마 산 속 어디에 구덩이를 파고 그냥 묻어버렸겠죠.”

그녀는 “산등성이에 무덤이 가득해서 북조선 전체가 무덤 같았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리고 최근 북한 실정에 대해 말을 이어갔다.

“요새는 그 무덤들이 보기 싫다고 무덤을 모두 평평하게 만들라고 했다고 합디다. 허 참, 묘까지 이래라 저래라 하니 참 대단한 나라이지요. 인민들을 한시도 편하게 내버려두질 않아요. 2002년에 무슨 개혁을 한다면서(2002년 7월 1일자로 시작된 경제관리조치를 말함) 물가를 한창 올려놓는 바람에, 사람들이 조금 살만하던 참에 다시 힘들어졌다고 합니다. 하여간 김정일이 문젭니다. 나라의 문만 열면 될 텐데, 제 권력을 놓기 싫어 그런 거지요. 우리 어머니가 북조선을 한창 드나들던 1970년대만 해도 북조선이 중국보다 잘 살았습니다. 그땐 조선족 가운데 북조선에 몰래 들어가 살려는 사람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이젠 완전히 반대로 되었습니다. 보시오, 중국은 개혁 개방 하니까 이젠 이렇게 살만해졌지 않습니까.”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이, 그녀의 말이 모두 답(答)이었다. 북한 내부에서 인민들의 현실을 눈으로 똑똑히 보고, 중국의 개혁개방 이전과 이후를 경험해본 사람만이 내 놓을 수 있는 정답이다. 이 결론만큼 명쾌한 답이 어디 있는가. 그녀는 최근 중국 내 탈북자들의 실정에 대해서도 전해주었다.

“산속에 들어가 움막을 짓고 살던 22살 북조선 청년이 얼마 전 나무에 목을 매 자살했습니다. 이 지방 겨울 추위는 집안에만 있어도 찬 바람이 느껴질 정도인데 나뭇가지로 움막을 짓고 한겨울을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결국 유서를 써놓고 죽었습니다. ‘내가 죽으면 북조선이 내다보이는 강가에 묻어달라’고 써져 있었다고 하더군요. 유언대로 강가에 묻어줬습니다.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중국에 와서 산속에 숨어 지내다 얼어 죽은 탈북자들이 꽤나 많습니다. 여자들은 (중국인들에게) 시집이라도 가 살 수 있지만, 남자들은 겨울에 살길이 막막합니다.”

그녀의 도움으로, 농촌마을에 있는 탈북자들을 한 두 명씩 외곽도시로 데리고 나와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번에 인터뷰 한 탈북자들은 모두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중국인들의 집에 숨어 지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전혀 도움을 손길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고 있을 숱한 탈북자들에 비하면, 그래도 이들은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탈북자들은 모두 그녀를 ‘천사’라고 불렀다. 한 탈북자는 “조선에도 진실한 공산주의자들은 다 죽고 모두가 자기 살기에 바쁜데 이 아주머니야말로 ‘살아있는 공산주의’”라고 이야기 해 필자와 유쾌하게 웃기도 했다.

이번 인터뷰는 가급적 ‘2인 동시 인터뷰’로 하기로 했다. 취재 기간이 빠듯하기도 하거니와, 이동이 어려운 상황에서 탈북자 한 명만을 단독으로 인터뷰 장소로 데려오기보다는 두 명씩 한꺼번에 만나는 것이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통계학적인 조사에서야 이런 인터뷰는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두 명이 함께 이야기하다 보니 서로의 의견을 보충하고 거들어주면서, 때론 서로 의견이 다른 부분에 대해 격렬하게 토론하면서 자연스럽게 인터뷰 할 수 있는 큰 장점이 있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적잖은 탈북자들을 만났다. 국경을 넘은 지 5일된 부자(父子)를 만났고, 벌목장에서 일하고 있는 청년들을 여러 명 만났다. 기차로 10시간이 넘는 거리에 살고 있는 탈북자를 인터뷰를 위해 데리고 온 경우도 있었다. 아내를 잃어버린 채(동네청년들에게 인신매매 당함) 두 아들을 데리고 망연자실 하늘만 쳐다보고 사는 아버지를 만났고, 죽기 직전 탈출하여 다행히 목숨을 건진 후로 10년 째 한 농가에 얹혀 살고 있는 80세 노인을 만나기도 했다. 탈북한 지 6개월 된 평양출신 여성을 만나기도 했는데, 그녀는 공포에 질려 지난 6개월간 장롱 속에서만 숨어 지냈다고 한다. 필자를 만나서도 몇 시간 동안 무서워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경계의 눈길을 늦추지 않았다.

국경을 넘어 이틀 동안 산 속을 헤맨 끝에 중국 00시로 들어왔다 우연히 필자를 만나게 된 29세 청년도 있었다. 탈북하여 처음 만난 사람이 필자였으니 참 기막힌 우연이었다. 그는 인민군을 제대한지 1년이 조금 넘었다. 12년 동안 휴전선에서 군복무 하면서 한번도 휴가를 가보지 못했다고 했다. 제대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너무나 달라진 고향의 모습에 놀라 분노의 심정을 안고 살다, 누이와 함께 강을 건넜다. 군대에서 입당(入黨)하고, 대학입학증까지 손에 쥐어 자랑스럽게 고향에 돌아왔으나 교재비는 고사하고 등교할 차비마저 없는 집안형편을 보고, “지난 10여 년간 도대체 내가 무엇을 위해 청춘을 바쳤나” 하는 배신감을 느꼈다 한다. 식당에 있는 반찬그릇까지 깨끗이 비워내는 그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눈시울을 적실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사람들 가운데 인터뷰 내용을 공개하도록 허락한 탈북자들의 사연을 싣는다. 가급적 목소리를 그대로 옮기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한국(남한)식 맞춤법에 익숙한 독자들을 주대상으로 이번 특집호를 만들었기 때문에 표현을 약간 다듬었음을 밝혀둔다. 인터뷰 대상자의 신분을 알 수 있을만한 지명, 연령, 직장, 경력 등은 다르게 표현하였으니 현실과 조금 다른 점도 발견될 수 있음을 양해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