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이야기
가는 길 험난 한데 어떻게 웃으며 가나?

사실 이 인터뷰는 이번 중국 취재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했던 인터뷰이다. 대상자는 36살의 여성으로 함경북도 회령에 살았으며 이름은 이옥희(가명)이다. 그는 현재 어느 중국인 가족의 집에 숨어 지내고 있었다. 자신의 친척은 아니고, 함께 국경을 넘었던 사람의 사촌형뻘 되는 사람의 집에 살고 있다. 다행히 마음씨 좋은 사람들을 만나 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이 지내고 있었으며, 그들로부터 외부세계의 소식을 전해 듣고 뉴스를 보면서 토론도 종종 했다고 한다.

인터뷰 장소가 마땅치 않아 몇 군데를 찾아 헤매다 허름한 식당에 자리를 잡았다. 식당 주인이 혹시나 우리 이야기를 알아들을 지 몰라 탈북자들을 인터뷰할 때는 일반적으로 조선족이 운영하는 식당은 찾지 않는다. 주인이 조선족이 아니어도 한국말을 알아듣는 경우가 더러 있는데, 그래서 식당에 들어서면서 중국말로 “한국어를 할 줄 아니냐”고 물어보곤 한다. 주인장은 그 말을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종업원을 불러달라’는 말인 줄 알고 인근 상점에서 조선족을 불러오는 해프닝이 생기기도 한다.

여기는 안전한 곳이니까,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네. 사실 여기(인터뷰 장소)에 올 때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말로만 한 동포 한 민족 이라고 들어봤지, 지금껏 남한 사람은 한번도 못 만나봤단 말입니다. 북한에서는 한국사람을 만나면 나쁜 사람으로 취급해서 (감옥에) 가두고, 심한 경우는 죽이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두려운 마음을 안고 왔단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만나보고 보니 정말 한 동포이고 이상하게 생긴 사람도 아닌데……, 그렇지 않습니까?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고향이 어디입니까?
『회령입니다. 회령 XX에 살았습니다. 회령에서 국경쪽으로 XX리 들어간 마을입니다. 우리 마을에서 건너다 보면 중국 XX이 보입니다. 한 20가구 정도 사는 작은 산골 마을 입니다.』

중국에는 언제 처음 오셨습니까?
『처음 중국 넘어온 것은 1998년도 4월입니다. 작은 외할머니가가 중국 000에 살고 있어서 식량을 얻기 위해 건너와 일주일 정도 있다가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때는 자발적으로 북한에 돌아가셨습니까?
『예. 당시에는 살기 바빠서 그냥 도움 받으러 왔다가 갔습니다. 1998년도가 가장 살기 바쁠(힘들) 때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숱하게 굶어 죽을 때 입니다. 저는 고지식하게 자라서 강 건너는 것(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은 생각도 못했고 무서운 일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굶어 죽게 생겼는데 어떡합니까? 나도 한번 죽는다는 심정으로 건넜습니다. 살기 너무 바쁜데 어떡하겠습니까? 건너서 전화를 하니까 아메(아주머니)가 아바이(아저씨)하고 차를 가지고 나와서 두만강을 넘어온 나를 데리고 갔습니다. 아메 도움 받아서 일주일정도 지내다가 식량하고 돈을 얻어서 다시 북한으로 돌아갔습니다.』

식량과 돈은 어느 정도 가지고 북한으로 돌아갔습니까?
『북한은 하루 벌어서 하루 살기도 바쁩니다. 중국 돈으로 천원을 가지고 들어왔는데 그 때 조선 돈으로 바꾸면 2만 3천원 정도 됐습니다. 하지만 그 돈도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반신불구인 아버지 약값으로 쓰고, 동생들 둘 장가보내고, 장사할 만한 밑천으로 쓰고 나니까 그 돈이 맥이 없단(‘허무하게 사라진다’는 뜻) 말입니다.』

돌아갈 때는 강을 어떻게 건넜습니까?
『북한으로 들어갈 때 가지고 한 짐이 족히 100kg을 넘어갈 정도였습니다. 선생님은 그때 제 모양새를 상상도 못할 것입니다. 짐이 강물에 젖지 않도록 비닐로 단단히 싸서 건넜습니다. 그러니 그 무거운 짐이 물에 뜨더란 말입니다. 그 짐에 매달려 건넜습니다.』

주로 뭘 가지고 갔습니까?
『식량, 옷, 기름이나 조미료…… 하여간 가져갈 수 있는 것은 다 챙겨서 들어갔는데 차에 실으면 정말 한 차는 됐을 겁니다.(웃음) 』

중국에는 이번까지 모두 몇 번째 오신 겁니까?
『세 번째입니다.』

두 번째 탈북은 언제 하셨습니까?
『2003년 8월에 중국으로 넘어가다가, 국경을 넘자마자 잡혔습니다. 거기서 바로 북한으로 넘겨졌습니다. 회령 보위부에 20일 정도 있다가 보안서로 옮겨져 5일정도 갇혀있다 나왔습니다. 나오자마자 저녁에 다시 달아났습니다. 다시 넘어올 때가 9월 10일인데, (체포가)무서워서 길로는 가지 못하고 산을 넘어서 중국 ○○까지 왔습니다. 이번에는 다행히 성공했습니다.』

그러니까 이옥희씨는 엄밀해 말해서는 두 번째 탈북, 보다 엄밀하게는 첫 번째 탈북이다. 첫 탈북은 1998년으로, 그때는 탈출이라기 보다는 중국 친척의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자 몰래 국경을 넘었다 다시 들어간 것이다. 두 번째 탈북은 앞서 말한 대로 국경을 넘자마자 중국변방부대에 체포돼 송환되었다. 요새는 국경지역의 중국측 경비가 크게 강화돼 강을 건너서 큰 길로 걷다가는 십중팔구 체포된다. 익히 알려진 소식이지만 지난해 여름까지만 해도 북-중 국경의 중국 경비는 변방부대라 일컫던, 한국의 전투경찰에 해당하는 병력이 맡아왔다. 그런데 이제 중국의 정규 군인인 인민해방군이 파견되어 변방부대와 함께 경비를 서고 있다. 국경연선을 직접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국경지역 각 마을에 주둔하면서 무언가 과거와는 다른 긴장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따라서 이제 강을 건너면 길에 들어서지 않고 바로 중국의 산을 타야 한다. 산을 몇 개씩 넘어 국경에서 떨어진 도시로 이동하여야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이옥희씨는 국경을 넘자마자 체포되었던 것이며, 앞서 이야기한 대로 25일만에 풀려나자마자 다시 강을 건넜다. 이번에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결심으로 강을 건넜다고 한다. 따라서 강한 탈출 의지를 갖고 단행한 탈북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세 번째 국경을 넘을 때는 산으로 넘었는데, 특별히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다시 넘어올 때가 9월이었습니다. (체포가) 무서워서 길로는 들어서지 못하고 산으로만 통해서 걸어 왔습니다. 산을 맨발로 걷고, 벼랑을 올라가다 떨어지고, 나무에 찢기면서 중국 000라는 곳까지 왔습니다.』

그곳에서 친척분은 찾았습니까?
『000에 와서 아메 집을 찾으니 모두 이사를 갔단 말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찾겠습니까?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번에 강을 건널 때 같이 넘은 사람이 제 마을 사람이고 동생 친구라서 그 사람을 따라갔습니다. 그 사람 사촌 형님 집에 가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보위부 감옥에서 시달리고 산을 넘다가 몸이 많이 상했습니다.』

강을 건널 때 물은 어느 정도 깊었습니까?
『1998년 4월에 건널 때는 물이 키를 넘습디다. 근데 사람이 그렇습니다. 물이 키를 넘기 때문에 ‘잘못하면 죽겠다’는 생각을 하니까 정신이 차려지더란 말입니다. 이번 8월(2003년)에는 물이 많이 줄어서 목 정도까지 찼습니다.』

북한에 가족은 없습니까?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고, 남동생은 둘 모두 군사복무 마치고 제대해서 막내까지 장가를 보냈습니다. 저는 결혼은 스물 넷에 했는데 불행하게도 갈려졌단(이혼했다) 말입니다. 1999년도에 이혼을 하고 열 두 살 아이는 남편이 키우고 있습니다. 지금 남편은 다른 여자와 살고 있습니다.』

직업은 무엇이었습니까?
『중학교를 1983년도에 졸업하고 계속 재봉일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혼을 했습니다.』

시집가자마자 직장을 그만 두셨습니까?
『아닙니다. 시집가서는 광산에서 얼음과자나 청량 음료수를 만들어서 판매를 했단 말입니다. 봉사관리소라는 곳인데, 국가가 건물을 만들어 놓고 판매합니다. 얼음과자는 20전, 아이스크림은 50전에 팔았습니다. 그 당시 제 월수입은 80원이었습니다.』

미공급(未供給 ; 국가로부터 배급이 나오지 않던 1990년대 중반 이후) 때는 어떻게 사셨습니까?
『1990년대를 생각하면 치가 떨립니다. 그때 산 것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소름이 끼친단 말입니다. 내가 자랄 때는 쌀독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를 정도로 딸이 하나라고 곱게 자랐고 지금처럼 살기 바쁘지 않았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정말 바빴습니다. 어머니는 1991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어머니가 돌아 가신지 삼년 후부터 눕기 시작했습니다. 동생들이 군대 가고 없는 사이에 아버지가 맏아들이라 친할머니까지 모셨기 때문에 내가 시집가서도 친정집을 더 신경 썼단 말입니다. 그저 남편 비위 맞추면서 친정집하고 본가집 두 살림을 했습니다. 하루 1kg 벌었다 치면 친정집하고 본가집하고 500g씩 나누어 먹었습니다.』

가족부양은 무엇으로 하셨습니까?
『여자들이 딱히 할 일이 없으니까 옥수수로 국수를 해서 장마당에 나가 팔았습니다. 』

국수를 만들어서 내다 파는 과정을 설명해 주시죠.
『국수를 삶아서 나가면 짐이 60kg정도 됩니다. 그것을 구루마(손수레)에 싣고 회령까지 가는데 **리 길이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 시간이 꽤 됩니다. 사람이 홀몸으로 걸어나가도 두 시간인데 국수를 실은 구루마를 끌고 가자니 세 시간은 걸려야 된단 말입니다. 자본이 없으니까 강냉이를 (집에) 많이씩 쌓아두지 못하단 말입니다. 그래서 들어올 때는 국수를 판 돈으로 다시 강냉이를 사서 들어와야 합니다. 강냉이를 사 가지고 들어 와서 밤에 국수를 만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어떻게 살았는지,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국수장사를 해서 하루에 얼마 벌이를 했습니까?
『60kg을 팔면 8kg이 이익으로 남습니다. 그러면 이득이 약 200원정도 된단 말입니다. 강냉이가 30원씩 했으니까. 200원을 가지고 먹기만 하면 사는데, 사람은 옷을 입어야 하고 신발을 신어야 하고 씻으려면 비누를 사야 된단 말입니다. 먹어야지, 입어야지, 신어야지, 그러니까 살기가 바쁘단 말입니다. 국수를 모두 팔아서 1800원을 받으면 이백원은 생활하는데 쓰고 나머지 1600원으로 또 강냉이를 삽니다. 1600원이 본전인데 이것을 까먹으면 장사를 못한단 말입니다.』

돈은 좀 모으셨습니까?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본전마저 잃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그동안 장사를 하면서 (가져간 국수를) 다 못 판 날이 두 번 있었는데, 본전을 잃으니까 정말 울면서 집에 들어왔단 말입니다.』

아침 몇 시에 집을 나섭니까?
『아침 9시에 나서면 12시에 회령에 도착합니다. 저녁 6시까지 팔고 다시 들어오면 밤 10시가 된단 말입니다. 다시 저녁에 온 밤 동안 순서를 기다려 국수를 눌러야 하는데, 일이 끝나면 새벽 여섯시쯤 됩니다. 그래서 그냥 세 시간 자고 국수를 팔러 나간단 말입니다.』

‘온 밤 동안 순서를 기다’린다는 말은 국수 만드는 기계의 순서를 기다린다는 말이다. 국수 누르는 기계를 갖고 있는 집은 마을에 한 두 집 밖에 안 되는데, 기계에 비해 국수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수는 많으니 모두가 그 집에 가서 밤새 줄을 서야 한다.

이제는 흔히 알려진 은어(隱語)이지만, 북한에서 아내들은 남편을 ‘멍멍이’ ‘낮전등’ ‘열쇠’ 등으로 부른다. 배급이 끊기고 공장과 기업소가 멈추면서 남자들은 할 일이 없어졌다. 직장에 나가봤자 배급을 타오지 못하니 자연히 아내들이 장마당에 나와 돈을 벌어와야만 식구들이 살 수 있게 되었다. (혹자는 남자가 장마당에 나가 장사를 하면 되지 않느냐고 묻기도 한다. 그러나 장마당에서는 40세 이상의 여성만이 장사를 할 수 있었다. 참으로 ‘별 희안한’ 제약이 있었던 것이다. 장마당에 급속히 번성하면서 최근에는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장마당으로 쏟아져 나와 장사를 하고 있다.) 가정의 생사여부가 여성에게 달렸다고 여성의 지위가 높아진 것도 아니다. 아내들은 여전히 가부장적인 북한의 사회풍토에서 가사와 수입을 모두 떠안는 이중고(二重苦)를 겪고 있다. 그래서 아내들은 남편을 그저 집이나 지키고 앉아있는 ‘멍멍이’, 대문을 채워놓는 열쇠의 역할을 한다고 하여 ‘열쇠’라고 말한다. 나아가 낮에도 켜져 있는 전등처럼,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돈만 축내는 ‘낮전등’이라고 멸시의 뜻을 담아 말한다. 이옥희씨가 살아온 길도 이런 고단한 북한 여성들의 삶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저녁에 들어올 때 길을 잘못 들어서 밭으로 구루마채로 떨어진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과연 어떻게 그렇게 살았을까 놀랍기만 하지만, 그렇게 살지 않으면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게 살았단 말입니다. 그 당시에는 아버지가 누웠지, 동생은 군대에 갔지, 그러니까 내가 부모 구실까지 해야 한단 말입니다. 처음에는 중국에 올 생각을 못했습니다. 자식도 있고, 내가 나서 자란 땅인데, 어떻게든 여기서 난관을 극복하고 살아야지, 그런 생각만 했습니다.』

국수장사는 언제부터 했습니까?
『1995년부터 8년 정도 했습니다.』

늘 그렇게 구루마를 끌고 다녔습니까?
『1998년부터는 중국에서 얻어온 돈으로 자전거를 사서 타고 다녔습니다.』

8년 동안 장사를 하면서 다 못 팔고 돌아온 것이 단 두 번이라니, 장사수완이 좋으셨나 보군요.
『회령에는 사람이 많으니 다 팔았습니다. 다행히도 저한테 국수 사간 사람은 다음에 꼭 저한테 사갔습니다.』

국수장사는 그리 이익이 크게 남는 장사가 아닌데, 혹시 다른 장사를 해볼 생각은 없었습니까? 중국 친척에게서 돈도 얻어왔지 않습니까.
『다른 장사를 하자면 제가 집을 비워 두고 나가 살아야 하는데 집에 아버님 누워계신데다 여자가 밖으로 돌 수 없어서 다른 장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국수장사 밖에는 할 것이 없었습니다. 또, 장사를 크게 하자면 큰 돈이 있어야 하는데 돈이 없고, 우리는 기업소에서 일을 해오다 보니까 고지식해서 장사수완이 없었습니다. 그저 매일 하루 벌어서 하루 사는 장사를 했습니다.』

그 당시에 당(黨)에서는 뭐라고 하던가요?
『그 때 ‘고난의 행군을 이겨내자’라는 구호가 나왔습니다. 고난의 행군이 끝나면 우린 잘산다. 그렇게 말하니까 우린 그 말을 믿고 이를 악물고 살기 위해 돌아다녔단 말입니다. ‘굶어도 참으면 좋은 날이 오겠다’ 생각하고 3년을 이기자 했는데, 3년을 보내니까 이번에는 또 ‘고난의 강행군’이라고 나오는데……. 그게 끝나도 맨날 똑같단 말입니다.』

고난의 행군이란 말이 언제부터 등장했습니까?
『그러니까…… 아마 1995년도부터 입니다. 정말 살기 바빴습니다. 작년(2002년)에 기가 막혔던 것은 자전거를 못 타게 했단 말입니다. 구루마를 끌고 다니다가 좀 발전해서 자전거를 타게 되었는데…….』

1990년대 중반 이후 사상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졌습니까?
『저는 여맹(조선민주여성동맹)이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여맹 회의가 있었습니다. 저는 장사하느라 매번 참가는 못했는데 드문드문 갔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출석을 부른단 말입니다. 참가하지 않으면 좋지 않게 봅니다. 그럼 욕먹지 않게 여맹위원장에게 말한단 말입니다. 아버지 사정과 집안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사정을 봐달라고 말입니다. 거기 가면 들을만한 소리가 있습니까? 그저 벌어야 살지……. 맨날 ‘고난의 행군 이겨내자’, ‘강성대국 건설하자’,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살자’는 이야기만 했습니다. 동무 하나가 “가는 길 험난 하면 울면서 살아야지 어떻게 웃으면서 사는가” 하고 저에게 말하니까, “야! 너는 큰 일 날려고 그런 소리하냐”고 대꾸해 준 적이 있습니다. 동무는 신경질 나서 그런다고 말했습니다. 살기가 고단하니 이제 그런 말이 술술 나옵니다.』

이옥희씨는 ‘아마 1995년부터’ 일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북한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언급한 것은 1996년 1월 1일 발표된 신년사(당보·군보·청년보 공동사설)를 통해서이다. 북한 주민들 치고 ‘고난의 행군’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김일성 혁명역사 시간을 통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기 때문이다. 원래 ‘고난의 행군’은 김일성 항일무장투쟁 역사에 등장한다.

김일성 빨치산 부대는 1938년 12월부터 이듬해 봄까지 일본군의 대토벌에 쫓겨 중국 몽강현 남패자에서 압록강 연안 국경지대인 장백현 북대정자까지 총격전을 벌이며 이동하였다고 한다. 남패자에서 북대정자까지는 원래 일주일 남짓이면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이지만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일본군과 싸우며 이동하다 보니 100여 일이 걸렸는데, 이 과정에서 사령부(김일성 부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숱한 대원들이 희생되었다. 이 때 북한의 대표적인 빨치산 영웅으로 꼽히는 ‘오중흡’의 부대는, 자기 부대가 김일성 부대인 것처럼 행세하여 일본군을 억지로 유도함으로써 사령부를 지켜내었다고 한다. ‘오중흡 7연대 칭호 쟁취운동’이라는 말은 이로부터 생겨났다. 1930년대 후반, 이렇게 사령부를 지켜내기 위해 혹독한 행군의 길을 걸었던 과정을 북한에서는 ‘고난의 행군’이라 표현한다.

1996년에 등장한 ‘고난의 행군’이라는 구호는 이러한 1930년대 후반의 정신을 되살려 인내하고 희생하면서 살자고 독려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당시 당간부들은 “3년만 견디면 된다”고 말하고 다녔다 한다. 하지만 1998년. 북한 당국은 이번에는 행군 앞에 ‘강(强)’자를 붙여 ‘사회주의 강행군’ 혹은 ‘고난의 강행군’이라는 말을 새롭게 등장시켰다. 아무래도 행군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나 보다. 그러면서 이번에는 “1년만 더 강행군을 하자”고 재촉했다. 1999년. 이제는 한술 더 떠 ‘구보행군’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 힘겹게 행군하는 것으로도 부족해 구보(驅步 ; 뛰어감)로 행군해 나가자는 어이없는 선동이다.

이어, 이젠 더 이상 ‘행군’ 시리즈가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고 판단했던지, 2000년 1월에는 ‘1950년대의 정신’이라는 용어까지 내 놓았다. 전쟁이 막 끝나 어렵던 1950년대의 정신으로 살자는 의미다. 선군정치, 광폭정치, 인덕정치, 붉은기 사상, 4대제일주의, 성강의 봉화, 낙원의 봉화, 라남의 봉화, 고난의 행군, 강행군, 구보행군……. 표현만 달려졌지 모두가 ‘인민들의 피땀’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 피땀으로 북한이 재생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인민들은 ‘강행군’ 기치아래 풀죽을 쑤어 먹고 북한 전역이 암흑으로 뒤덮였던 때에 김정일은 개인별장의 불을 환히 켜놓고 환락의 파티를 즐기면서 오로지 관심은 ‘핵개발’에만 집중되어 있었으니, 아무리 인민들이 ‘구보행군’을 한다 한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아니겠는가.

다시 이옥희씨와의 인터뷰로 넘어가 보자. 앞에서 그녀는 중국 친척에게 받아온 돈으로 자전거를 사서 장사 나갈 때 타고 다녔다고 했다. 그런데 ‘자전거를 못 타게 했다’는 증언이 나온다. 그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기로 하자.

자전거를 왜 못 타게 합니까?
『여자는 자전거를 못 타게 한단 말입니다. 저도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보안소(한국의 ‘파출소’에 해당)에 한번 잡힌 적이 있는데 그때 제가 물어봤습니다. 왜 여자는 자전거를 못 타게 하는가, 여자가 벌어서 가정을 유지하려고 하는데 왜 못 타게 하는가? 구루마를 끌고 가면 회령까지 3시간이나 가야 하지만 자전거를 타면 1시간에 갈 수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 못 타게 하니 사람이 얼마나 맥이 듭니까? 그래서 “국가에서 사람을 살게 하려 하지 않고 왜 이렇게 못살게 만드는가”하고 따졌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안원 이 간나새끼가 내가 나쁜 말을 한다고 그럽니다. 당 정책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입니다. 제가 미친 듯이 울면서 말했습니다. “당 정책이 인민을 잘살게 하는 것이어야지 왜 이렇게 못살게 구는가”하고 막 따졌습니다.』

대단한 용기를 발휘하셨군요.
『그땐 정말 속이 탔단 말입니다.』

언제부터 자전거를 못 타게 했습니까?
『지난해(2002년) 들어와서부터 자전거를 못 타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왜 못 타게 하는 겁니까?
『윗사람들에게 물어보지는 못하고 동무들한테 왜 못 타게 하는가 하고 살짝 물으니까 한 동무가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외국사람이 북조선에서 차를 몰고 가다 조선사람이 타고 가는 자전거를 치여서 조선사람이 죽었답니다. 그 사람이 “북조선은 차가 많지 않고 자전거 타고 다니는 사람이 왜 이리 많은가?”라고 했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니까 국가에서 “여자가 자전거를 타는 건 망신이다. 나라 망신이다” 해서 자전거를 못 타게 한단 말입니다. 외국인 말 듣고 평백성을 고달프게 해야 되겠습니까? 골목골목 지켜 서서 자전거를 뺏고 벌금을 내라는 겁니다.』

벌금은 얼마입니까?
『자전거를 압수하고 100원을 내라고 합니다. 벌금을 내도 자기네끼리 쳐먹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다 벌금을 안냅니다.』

그러면 자전거를 돌려 줍니까?
『몇 시간씩 보안소 앞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준단 말입니다. 하루를 못 벌게 하고 애를 먹인 다음에 자전거를 돌려줍니다.』

이옥희 씨가 말한 이유로 여성들의 자전거 탑승을 금지했는지는 모르겠지만, 2001년 5월에도 북한 전역에서 여성들의 자전거 탑승을 금지하라는 지시가 있었다. 1990년대 초에는 남성들이 모는 자전거의 뒷자리에 타는 것도 금지한 적이 있었다. 당시 소문으로는 김정일이 승용차를 타고 가다 남녀가 함께 자전거를 타고 가는 모습을 보고 ‘볼 상 사납다’며 함께 타는 것을 금지했다는 말이 있었다. 최근 1-2년 사이의 여성 자전거 탑승도 김정일이 보기 싫으니 즉흥적으로 내린 지시는 아닌지.

미공급 때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사람들이 주로 죽었습니까?
『죽은 사람들을 가만히 보면 바보 같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고정(孤貞 ; 마음이 외곬으로 곧음)하고 고지식한 것 같기도 합니다. 저 같은 경우에는 중국에 가서 아메한테 식량하고 쌀이라도 얻어서 살았는데, 집에만 있는 고정한 사람들은 많이 죽었습니다. 죽을 것 같으면 국경이라도 넘고 쌀알이라도 훔치거나 기업소 물건이라도 몰래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하는데 이러지도 못하는 사람들 있지 않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고정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원래 착한 사람입니까, 아니면 사상이 강한 사람들입니까?
『사상이 높은 사람이 아니고 마음이 착한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굶어죽는데 사상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배급은 안 나오지 손에 가진 것은 없지, 그냥 앉아서 죽는단 말입니다.』

죽은 사람을 직접 본 적이 있습니까?
『우리 동네 사람들은 이악스러워서(‘악착스러워서’의 북한말) 죽은 사람은 없었는데, 옆 동네 제가 아는 언니의 딸이 죽은걸 봤단 말입니다. 언니가 아바이(아버지)하고, 자기 자식 둘하고, 자기 딸의 딸까지 넷을 데리고 살았는데, 아바이는 고정한 사람으로 일밖에 모른단 말입니다. 아바이가 계속 굶다가 죽으면서 이런 말을 했단 말입니다. “이밥(쌀밥)에다 두부 한 모만 먹어봤으며 소원이 없겠어” 그랬단 말입니다. 손녀 딸은 배고파서 장(醬)을 먹다가 염증이 돋아서 죽었습니다. 배가 부어서 숨을 제대로 못 쉬다가 죽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게 가슴이 아프단 말입니다. 그게 1997년도 정도 됐습니다.』

이옥희씨의 아버지도 돌아가셨습니까?
『우리 아버지도 대단히 고정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내가 회령에 국수 팔러 나가면 집에 가만히 앉아 있는데 우리 아버지도 얼마나 배가 고팠겠습니까? 못 먹고 병조리 못해서 돌아가셨습니다.』

미공급시기에 남편은 뭘 했습니까?
『남편은 전기나 통신을 담당하는 배전소에서 일했습니다. 전기나 통신은 죽으면(가동을 멈추면) 안되기 때문에 계속 일을 나갔단 말입니다. 그런데 일을 해도 돈을 안주니까 살길이 없단 말입니다. 돈을 안 줘도 말(항의)을 못한단 말입니다. 불만을 표시하면 가두고 죽이는데 어떻게 불만을 표시하겠습니까?』

가족들에 대해 소개해 주십시오.
『제 아래 남자동생이 1999년도에 13년 동안 군복무하고 집으로 왔습니다. 군대에 있는 동안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누워 계시고, 누나는 이혼해서 혼자 살고 있으니 기가 찼을 겁니다. 동생은 황해도 ××에서 사관장(특무상사)으로 군사복무를 했습니다. 동생은 사관장을 했기 때문에 ***대학 입학을 추천 받았습니다. 추천 받아서 왔는데 아버지는 반신불구이지 누나는 하루 벌어 하루 살아 죽이나 먹고 사는 형편이니 대학을 포기했습니다. 대학 졸업해도 뭐하겠습니까? 대학에서 공부할 돈도 없고, 공장 기업소도 다 가동을 멈추었기 때문에 졸업해도 할 일이 없으니 제가 반대를 했습니다.』

그 동생은 현재 어떻게 생활하고 있습니까? 둘째 동생은요?
『할아버지가 전쟁(한국전쟁)에 참여했는데 행방불명이 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행방불명된 군인의 가족은 성분을 좋지 않게 본다.) 그래서 아버지가 성분이 좋지 못하다는 이유로 입당을 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는 광산에서 설계 일을 하셨는데 머리가 비상한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원이 아니어서 힘들게 생활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가문은 당원이 되는 것이 소원이었는데 동생이 사관장으로 제대해서 당원이 되어 돌아온 것을 큰 자랑으로 생각했습니다. 군대에서 13년 동안 고생하고 당원증까지 받아왔지만 집안이 어려우니 공부를 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회에서 하는 일도 딱 부러지고 하도 똑똑하니까 그래도 대접 받는 건설일꾼이 되었습니다. 막내 동생도 13년 군사복무 후 부소대장으로 제대했습니다. 그 동생까지 결혼을 시키고 저는 국경을 넘어왔습니다.』

장사하는 8년 동안 장마당을 못하게 하는 경우는 없었습니까?
『국수장사는 국가에서 뺏지 않는데 중국물건, 약품 장사하는 사람들은 많이 잡힌단 말입니다. 한 3년 전에 한동안 장마당에서 쌀을 못 팔게 했습니다. 원인은 저도 모릅니다.』

그럼 쌀밥을 어떻게 먹습니까?
『우리는 원래 쌀밥을 못 먹는 법인가 봅니다. 명절이나 생일날 쌀 1킬로그램을 사다가 밥을 먹으면 그게 제일 크고 좋은 날이란 말입니다. 여기(중국)에서 사람들이 쌀밥을 먹기 싫어하거나 먹다가 남기는 거 보면 그거 조선에 가서 못사는 사람들 갖다 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못사는 사람들 생각하고 자식, 동생들 생각하면 밥이 목에 콱 걸린단 말입니다. 올해 농사가 안 되서 더 바쁘다는데 걱정입니다.』

여기서 이옥희씨는 말을 잇고 못하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그의 눈물에, 북한에 두고 온 어린 딸의 얼굴이 비치는 듯했다. 탈북자들이 중국에 와서 가장 놀라는 것 중 하나가 밥을 다 먹지 않고 남기는 것이라 한다. 탈북자들은 “중국에서 개 돼지들이 먹는 밥이 조선에서 평백성들이 먹는 밥보다 낫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필자와 식사를 함께 한, 국경을 넘은 지 이틀 된 어느 탈북자는 식당에서 나오는 반찬 그릇까지 깨끗이 비워버려 필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반찬은 공짜로 나오는 것인데 이런 걸 남기면 어떡하느냐”며 이미 밥을 다 먹었는데도 반찬만 계속 먹었다. 또 어느 탈북자는 중국에서 식당에 들어가 일을 했는데, 손님들이 먹다 남기고 간 고기 덩어리들을 보면 북한에 두고 온 자식들이 생각나 차마 버리지 못하곤 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냉장고에 음식을 잔뜩 쌓아두고도 먹지 않아 유통기한이 지나면 버리곤 하던 필자의 지난 날이 생각나, 참으로 부끄럽고도 가슴 아리던 식사시간이었다.

2002년 7월 1일, 북한에서는 경제관리조치라는 것이 실시됐습니다. 그 조치 이후 상황은 어땠습니까?
『물가가 오르면 돈도 올라갑니다. 우리는 황당했단 말입니다. 얼마 안가서 강냉이도 120원이 넘어가고 돈이 없는 사람은 갑자기 물가가 올라가니까 당황한단 말입니다. 최고 130원까지 올라가는 것을 보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체험한 장마당 물가는 어떻습니까?
『여자가 신는 중국 편리화(운동화)가 100원이었다가 300원으로 올랐습니다. 공산품은 국가에서 생산하는 것이 없으니까 다 중국산입니다. 오이는 1kg에 40원씩, 닭알(계란)은 한 알에 30원, 맛내기(조미료)는 300원입니다. 닭알은 아픈 사람들이 회복용으로 먹지 보통사람은 못 먹습니다.』

이옥희 씨와 인터뷰를 하고 난 몇 일 후 함경북도 청진시 출신의 북한 청년을 만났다. 그는 중국과 밀무역을 하며 오가는 사람이었는데, 그에게서 최근 북한의 장마당 물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작은 수첩에 장마당에서 거래되는 각종 상품의 가격을 빼곡히 적어두고 있었다. 그가 적어온 것은 2003년 12월 16일 청진시 인민위원회 가격재정처에서 발표한 지정가격다. 이는 북한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물가로, 이러한 가격에 팔라고 권장을 하나 강제를 할 수는 없다고 한다. (시장관리원이 가격을 점검하고 다니면서 규정가격에 팔지 않는 물건을 회수하고 세금도 받지만 그런 일은 대개 없다고 한다.) 따라서 아래 가격은 공식 가격이며, 괄호 안에 실제 거래가를 적어두었다. 수첩에 적힌 모든 물가를 다 옮길 수 없어 주요물품 가격만 적은 것임을 밝힌다. △흰쌀 국내산 250원(실제 판매가 270-280원), 수입쌀 245원(실제 판매가 250-280원, 대한민국 쌀이 가장 고가에 판매) △강냉이 130원(유엔강냉이의 실제 판매가는 160원) △돼지고기 800원(실제 판매가 900원) △닭알 60원 △사과 190원(실제 판매가 국내산 200, 중국산 좋은 것은 600원까지) △배추 50원(실제 판매가 70원, 봄이 되면 가격이 더 오른다) △명태 700원 (실제 판매가는 20마리에 2만원, 즉 한 마리에 천원이상) △콩기름 1000원(실제 판매가는 1150-1200원) △비누 국내산 90원, 수입산 150원(실제 판매가는 중국산이 250원) △세수비누 국내산 100원 수입산 180원(실제 판매가는 수입산이 250-300원) △양복지 3000원 (양복 한 벌을 만들 수 있는 양으로, 실제 판매가는 4000원) △학습장 한 권 30원 (실제 판매가는 30-100원)

살던 마을에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같은 가전제품을 갖고 있는 집은 얼마나 되었습니까?
『저희 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었습니다. 라디오나 녹음기 전축 같은 것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자전거만 하나 있었습니다. 다른 집도 대부분 마찬가지입니다. 냉동기나 텔레비전이 있는 집은 대부분 밀수를 해서 사온 것입니다. 흑백 텔레비젼은 마을 전체 가구중 삼분의 일정도 있었던 걸로 압니다. 채색(컬러) 텔레비젼은 보기 드물었습니다.』

중국에 와서 한국 텔레비전을 본 적 있습니까?
『옆집에 가서 봤습니다.』

어떻습니까?
『한국사람들은 아주 유쾌하게 살더란 말입니다. ‘아침마당’(KBS의 아침 프로그램)이라는 것을 봤습니다. 게임을 하면서 맞추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면서 웃고, 유쾌하게 살더란 말입니다. 텔레비전에서만 그렇게 나오는지 모르겠지만 매우 활달하게 보였습니다.』

북한에서 한국에 대한 정보는 많이 들었습니까?
『우리는 자라면서 남조선은 미제의 식민지다, 노예가 많고 거지가 많다는 말만 들었습니다. 미국은 가장 철천지 원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광주인민항쟁(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때 학생들의 모습을 텔레비젼에서 봤는데 옷도 잘입고 그렇습디다. 우리들끼리 옆구리를 툭툭 치면서 “남조선에는 거지가 많고 실업자가 많다는데 대학생들이 옷도 잘입었네”라고 수근거렸단 말입니다. 그 때 광주 학생들한테 그런 느낌을 약간 받았지만 남조선에 대해서는 잘 몰랐단 말입니다. 남조선에 대해 확실히 알게 된 것은 1998년도에 중국에 왔을 때 작은 할아버지가 말씀 해주시는 걸 듣고 알았습니다. 작은 할아버지가 그런 말(북한당국에서 선전하는 말) 믿지 말라고 했습니다. 한국은 경제가 발전해서 잘 살고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니 통일될 때까지 견디라고 했습니다. 굶어죽지 말고 두만강 물을 잘 이용해서 어떻게든 살아 남으라고 했단 말입니다.』

오랜 시간 인터뷰를 한 탓에 이옥희씨는 좀 피곤해 보였다. 피곤하냐고 물으니 오랜만에 사람들과 마주 앉아 이렇게 이야기하게 되니 피곤한 줄 모르겠다고 답했다. 지난해 9월에 중국에 와서 3개월 동안 집 밖으로 나가본 적이 딱 3번이라고 하니 사람이 그리울 만도 했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준비해갔던 질문들을 짧게 줄일 수 밖에 없었다. 인터뷰를 정리하면서 북한의 공개처형, 최근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는 대북지원식량이 장마당에서 판매되는 실태, 탈북자 난민촌 문제, 북한 정권의 변화 가능성 등에 대해 간단하게 물어보았다.

공개처형을 최근에 본적이 있습니까?
『1995년부터 1999년 사이에 공개재판으로 사람을 많이 죽였습니다.』

죄목은 무엇입니까?
『인신매매, 소를 잡아먹는 것……. 우리는 개인이 소를 소유할 수 없습니다. 소는 전부 다 국가소유란 말입니다. 그런데 배가 고파서 이것을 잡아먹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잡아서 죽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공개재판 하는 곳에 모이죠?
『예전에는 단체로 몰려갔는데 최근에는 본인이 보고 싶으면 보고 보기 싫으면 안봅니다.』

그럼 안보면 될 텐데 왜 사람들은 그것을 보러 갑니까?
『다른 사람들 생각은 모르겠습니다. 나는 ‘아까운 인생이 죽는구나’ 하는 애처로운 마음에 그저 얼굴 보러 갔습니다. 제가 볼 때는 큰 죄가 아닌 경우도 있단 말입니다. 인신매매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런데 자기 친척집에 여자를 데리고 가다가 중국 사람들이 납치를 해가는 경우도 있단 말입니다. 데리고 나갔는데 들어올 때는 안 데리고 들어오면 영락없이 인신매매범이 됩니다. 또 여자들을 중국의 병자(病者)나 늙은이한테 팔아먹은 사람들은 죽어 마땅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고 여자가 원해서 중국 남자한테 시집을 보내줬다든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렇게 애매하게 죽은 사람도 많단 말입니다. 그런 사정이 있어도 말을 못한단 말입니다.』

공개처형을 직접 몇 번 보셨어요?
『1999년도에 두 번 보고 나머지는 말만 듣고 직접 보지 않았습니다.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면 몸이 산란해지고 스산해진단 말입니다.』

직접 본 사람들의 죄목은 무엇이었습니까?
『처음에 본 총살은, 죽인 사람이 세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다 인신매매였습니다. 두 번째 본 것은 열명을 한꺼번에 죽였습니다. 소 잡아먹은 사람도 있고, 인신매매도 있고, 한국으로 가려고 시도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 때는 그런 사람들(한국으로 탈출하려던 사람들) 다 죽였습니다.』

모두 남자였습니까?
『남자도 있고 여자도 있었습니다.』

처형시간은 얼마 정도 걸립니까?
『한 20-30분 걸립니다. 사람들이 모여 기다리는 곳 앞에 말뚝을 (처형대상자) 숫자대로 박아 놓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있으면 그 시각에 차에 실어옵니다. 올 때는 손을 묶고 입을 흰 천으로 가려놓았습니다. 소리칠까 봐서 그런답니다. 눈은 가리지 않습니다. 손에 묶인 끈을 풀고 말뚝 앞에 세워 놓습니다. 그 다음에 이 죄인은 무슨 죄인이다, 또 이 죄인은 무슨 죄인이다, 이렇게 보안소에서 말합니다. 그 다음에 판결을 발표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형법 몇 조 몇 항에 의해 이 사람은 징역 몇 년, 혹은 사형, 이렇게 발표합니다. 징역 갈 사람들은 묶어서 다시 차에 실어갑니다. 사형당할 사람들은 말뚝에다 묶어 놓습니다.』

처형을 당할 사람들은 반항을 하지 않습니까?
『반항을 못한단 말입니다. 입을 막아놓고 묶기 때문에 소리도 못치고 반항을 못합니다. 그 다음에 사람을 총살하는데 한 사람 당 세 발을 쏜단 말입니다. 사형수가 열 명이면 보안원 열 명이 서서 한 사람씩 쏜단 말입니다. 어떤 사람은 뒤로 매달려 있고 어떤 사람들은 옆으로 꼬꾸라지기도 합니다. 정말 처참한단 말입니다.』

사형수들의 가족이 사형장면을 지켜 봅니까?
『보는 사람이 있답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본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이옥희씨는 공개처형의 끔찍한 광경이 떠오르는지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떨었다. 그리고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손을 저었다.
혹시 북한에 지원되는 쌀이 장마당에서 팔려나가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차에 싣고 가는 쌀자루에 ‘U.S.A’나 ‘대한민국’, ‘우리민족돕기’라고 쓰여 있는 것은 봤습니다. 시장에서는 그런 자루에 넣고 못 파니까 다른 자루에 넣고 팝니다. 한국 쌀 이라는 말은 못합니다. 파는 사람들은 말로 중국 쌀이니, 미국 쌀이니 하고 팝니다.』

하지만 북한민주화네트워크와 일본의 북한인권단체 ‘구출하자 북조선민중, 긴급행동네트워크’(RENK)의 기자회견을 통해 공개되었듯 현재 북한 각지의 장마당에서는 인도적 목적으로 지원된 식량이 빼돌려져 판매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다른 단체들에 의해서도 재차 확인된 바 있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만난 탈북자 가운데서도 장마당에서 한국쌀을 본 적 있으며 사 먹은 적도 있다는 사람을 만난 바 있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지원식량을 배급 받았다’는 탈북자는 단 한 명만 만날 수 있었다. 어찌되었든 주민들이 먹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이 있겠지만, 정말로 인도적 목적에서 식량을 지원한다면 그저 던져주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 필요한 사람에게 나눠주도록 하는 ‘마지막 책임’까지 다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이번 취재과정에서 다시 한번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혹시 부익부 빈익빈을 심화시켜 북한 경제를 더욱더 파탄 내고, 그것으로 인해 인민봉기를 유도하려는 ‘깊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배급의 문제는 신경 쓰지 않는 걸까? 대책없는 인도주의에 의구심이 생긴다.

중국에 탈북자 난민촌을 만들자는 국제사회의 움직임이 있습니다. 만약 난민촌을 만들어 체포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 수 있다면 그곳에 가서 살겠습니까?
『나는 안 갈 것입니다. 중국에서는 살지 않겠습니다. 나는 차라리 내 땅에 가서 산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수십 명을 만나면서 매번 “난민촌이 생기면 그곳으로 갈 것이냐”고 물어보았다. 2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나눠 볼 수 있었는데, 우선 난민촌이 생겼을 때 과연 자신의 신분이 드러나지 않고 그곳에 머무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난민촌의 안정성과 보안성을 걱정하는 의견이 가장 앞섰다. 그리고 한국이 있는데 뭐 하러 중국에 난민촌을 따로 만드느냐는 의견, 그런 곳에서 ‘돼지처럼’ 배부르게 살려고 목숨 걸고 북한을 탈출한 것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었다. 거의 모두가 난민촌이 중국에 생겨날 수 있으리라는 것 자체를 믿지 않았다. 어떤 사람에게는 ‘난민수용소’라고 말했다가 항의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수용소’라는 표현에 큰 거부감을 갖고 있었다. “우리가 죄인이냐”는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에 탈북자 난민촌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북한에 대한 외교적인 압박수단은 될 수 있겠지만 탈북자들의 실질적인 보호처가 될 수 있을까, 혹은 탈북자들이 정말 그것을 반길까 하는 데 대해서는 약간 회의감이 들었다.

그럼 북한이 개혁개방을 하고, 돌아온 탈북자들을 처벌하지 않고, 자유롭게 장사를 하도록 허락한다면 북한으로 돌아가시겠습니까?
『그렇게 절대 될 수 없습니다.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김정일이 바뀌지 않는데 어떻게 바뀌겠습니까?』

그래도, 만약에 바뀐다면 고향을 돌아가겠습니까?
『(한참을 생각한 후에) 개혁 개방하면 다 고향 땅에 가서 살겠지요. 그런데 언제 그게 바뀌겠습니까? 제가 다 늙어버린 후에 바뀌면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북한의 정치가 바뀌면 되지 않습니까? 즉, 김정일이 물러나면 개혁개방 되지 않겠습니까?
『남한은 평백성이 투표해서 대통령을 결정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단 말입니다. 김일성의 후계자가 김정일이 되고, 또 김정일이 나이가 차면 그 아들이 후계자를 할 텐데 어떻게 바뀌겠습니까?』

금강산 관광이 실시되고 이산가족 상봉이 몇 차례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들었습니까?
『듣긴 들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하는지도 모른단 말입니다. 다 윗사람들이나 하는 걸로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이옥희씨의 최근 생활과 심정에 대해 물었다.

생활하면서 불편한 것은 없습니까?
『남의 집에 있으니까 그런 게 있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여기는 그래도 북한에 비하면 천국입니다. 다시는 안들어 가려고 맘 독하게 먹고 들어왔지만 밥 한술 먹어도 새끼생각, 동생생각이 납니다. 밤마다 울음이 앞섭니다. 그런데 제가 운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결심하고 들어온 이상 결심한 대로 살자, 울지도 말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잡히면 쥐약먹고 죽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난 8월 보위부에 잡혀갔을 때, 보위부에 20일 있으면서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야……, 내……, 보위부에 잡혀갔을 때 나 때린 새끼, 나오면서 찬찬히 쏘아봤습니다. 언젠가는 내 손에 죽이리라 생각했습니다. 살기 바빠서 강을 넘었지 제가 사람을 때렸습니까, 잡아먹었습니까? 사람이 죄가 있다고 할 때는 인간이 인간을 때리고 죽여야 죄 아닙니까? 이건 완전히 반역자 취급하고 동물취급한단 말입니다. 한참 나이어린 스무 살 어린 것들이 ‘개간나’ ‘소간나’ 하고 조금만 움직여도 몽둥이로 때린단 말입니다. 야……, 쥐약 먹어도 다시는 보위부 감옥에 절대 안 간단 말입니다.』

그녀는 북한에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는 듯했다. 북한의 체제가 변할 때까지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체제가 과연 언제 변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감을 갖고 있었다.

이제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부모도 내 앞에서 돌아가시고, 동생들도 내 손으로 장가를 보냈기 때문에 후회는 없습니다. 이제는 독하게 마음먹고, 인간답게 먹고 입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것이 꿈입니다. 태어나서 그런 인간다운 생활을 해보고 죽고 싶습니다.』

“인간다운 생활을 하다 죽고 싶다”는 그녀의 마지막 말이 다시 한번 무겁게 가슴을 짓눌렀다. 숨어 지내고 있는 집으로 그녀를 배웅하면서 ‘나는 과연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하는 반성을 하고 또 했다. 저들이 그렇게 바라는 자유를 나는 너무나도 배부르게 만끽하고 있는데, 이렇게 자유로운 나는 인간으로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 것인가. 고통으로 신음하는 2천만 북한 인민의 현실이, 내가 무슨 일에 청춘을 바쳐야 ‘인간’이라 말할 수 있을지 또렷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인터뷰 장소였던 식당을 나서면서 그녀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은, 내 나라를 헐뜯고 그러자는 것이 아닙니다. 안타까운 심정에서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말해서, 그래서 빨리 조국통일이 이루어져서 같이 살고 싶습니다. 제 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작은 할아버지를 찾으라고 했습니다. 작은 할아버지는 고려대학교에 다니다가 집에 잠깐 왔는데, 그때 전쟁이 터져 다시 학교로 갔다고 합니다. 그분 이름은 오△△라고 합니다. 고향은 함경북도 회령군 XX리 입니다. 한국에 돌아가면 꼭 그 분을 찾아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