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이야기
간부들만 살기 좋은 세상

이번 인터뷰는 회령 출신의 남성 두 명을 동시에 만나보았다. 이들은 탈북하여 광산이나 벌목장 등에서 일하다 탈북자들에 대한 단속이 거세어진 현재는 중국인의 집에 함께 기거하고 있었다. 탈북한 지 3년, 5년 된 이들은 북한에서 중학교 교사, 광산 굴착기 운전공의 직업을 갖고 있었다. 중학교 교사 출신의 탈북자는 김영길(41세), 굴착기 운전공 출신의 탈북자는 이종익(42세)라고 각각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물론 가명이다.

이들은 중국에서 비교적 오래 생활하였고, 체포되어 북한에 송환되었던 경험이 있기 때문에 주로 중국에서의 생활방식, 송환 후 북한에서 어떻게 취급 받는지에 초점을 맞춰 물어보았다.

언제 북한을 탈출하셨습니까?
김영길(이하 ‘김’) : 『2000년 1월에 나왔습니다.』
이종익(이하 ‘이’) : 『1998년에 처음 들어왔습니다.』

그 동안 몇 번 체포되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이 : 『1999년도에 일하던 마을에서 절도사건이 있었는데, 그 바람에 일제히 단속이 있어서 붙잡혀 갔습니다. 북한에 갔다가 2000년도에 다시 들어왔습니다. 그러다가 또 잡혀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2001년도에도 잡혀서 나갔다가 12월에 들어왔습니다.』
김 : 『저는 올해(2003년) 9월에 붙들려 나갔다가 11월 24일인가 다시 들어 왔습니다.』

두 분 다 고향이 회령이라고 했는데, 고향에서 서로 알던 사이입니까?
이 : 『아닙니다. 몰랐습니다. 중국에 와서 만나 알게 됐습니다.』
김 : 『여기(중국)서는 서로 알아도 모른 척하는 것이 최곱니다.』

그런데, 김형은 북한에 잡혀갔다가 비교적 빨리 다시 탈출하셨네요. 붙잡혀 가서는 어떻게 되셨습니까?
김 : 『붙잡혀 가서는 보위부 구류장에 간단 말입니다. 거기서는 기본 알아보는 게 ‘한국사람들하고 접촉했는가’, ‘기독교인들과 접촉했는가’ 입니다. 이 두 가지만 걸리지 않고 그저 (중국에서) 일하다가 붙잡힌 사람은 괜찮습니다. 또 돈을 많이 갖고 있으면 보위부 선생들이 돈을 뽑자고(뺏으려고) 하기 때문에 좀 편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어떻게든 뇌물을 받으려는 보위부원들을 행동에 대해 어이없다는 쓴 웃음을 지으며) 허참…….』

조사할 때는 특별히 걸린 것이 없었나요?
김 : 나는 그저 일했단 말입니다. 탄광에서 일했습니다. 거기서 조선 사람이 18명 정도 일했습니다. 탄광 소장이 말하기를 “너희들 도둑질하지 않고 싸움하지 않고 고스란히 일만 하면 붙잡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꼬장(고발)하면 할 수 없이 붙잡혀 가야 하지만, 하여간 사고만 안치면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들 조용히 지냈습니다. ○○시 같은데에서 탈북자 단속을 심하게 해도 제가 있었던 곳은 괜찮았습니다. 그런데 배초구 폭발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붙들려 나갔단 말입니다. 제가 ××파출소에 붙잡혀 가보니 폭발사건의 연고자가 잡혀 있더란 말입니다.』

배초구 폭발사건의 범인이였나요?
김 : 『예. 걔는 4년 일했다고 합니다. 이 집의 노판(老板, 중국어 발음은 ‘라오반’으로, 중국에서 사장 또는 주인을 이르는 말)이 조선사람들을 네 댓 명 정도 썼는데, 그 노판이 파출소하고 대단히 잘 통한단 말입니다.』

거기서 무슨 일을 했답니까?
김 : 『농사도하고, 산에 가서 나무도하고, 아침에는 배타고 나가서 그물로 고기도 잡아오고 그랬습니다. 노판은 조선사람들이 일해서 벌어온 것들을 파출소 사람들에게 고이다(뇌물로 바치다) 보니 사이가 대단히 가깝단 말입니다. 조선사람들이 거기서 먹고 자고 하면서 1년에 임금을 1000원(인민폐) 받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1년이 지나 임금 받을 시기가 되면 파출소에서 잡아간단 말입니다. 그러면 집주인이 공안국 사람들을 내세워서 그 사람들을 뽑아 낸단(석방시켜준다) 말입니다. 집주인은 “너희들을 뽑아 내오는데 3000원을 썼다”면서 임금을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그러면 1년 임금은 하나도 받지 못하고 그저 일만 해야 합니다. 기껏해야 담배나 좀 사주고……. 그런 식으로 4년 동안 공짜로 일했단 말입니다. 그러다보니 한이 맺히지 않겠습니까.』

실제 중국에서 종종 있는 일이다. 뒤에 증언이 이어지겠지만 탈북자들은 신분이 불안한 이유로 같은 일을 하고도 중국인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다. 또 위의 사례처럼 실컷 부려먹고 임금을 받을 때가 되면 신고해서 잡아가도록 만든다. 탈북자를 보호해주는 사람도 벌금을 내게 되어있지만 공안(公安)과 짜고 이런 사기극을 벌인다.

『그러다가 왕청현(汪淸縣) 배초구에서 도로를 새로 내는데, 폭발사건의 연고자(범인)가 거기에 인부로 일하게 됐습니다. 공사를 하다 보면 굴도 뚫어야 하니 폭약이 있었단 말입니다. 거기서 화약을 3킬로그램 빼냈다고 합니다. 그걸 그 집의 부스께(아궁이)에 잡아넣었단 말입니다. 그리고 그 집 오토바이를 타고 흑룡강까지 달아났단 말입니다. 집 식구들은 화약이 터지면서 다 죽고…….』

중국 왕청현 배초구 폭살(爆殺)사건에 대해서는 지난 Keys 36호(2003년 7월호)를 통해 보도한 바 있다. 당시 Keys는 북한인 형제가 중국인 집에서 일을 하다, 형을 다른 곳에 팔아버려야겠다는 말에 분개하여 동생이 구들장에 화약을 설치, 일가족을 폭살했다고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왕청현에서만 200여명이 체포되었으며, 중국 길림성 전체의 탈북자 단속이 대폭 강화되었다,

이번 취재 기간 중 배초구 폭살사건에 대해서 여러 사람을 통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북한 청년이 중국인의 집에 폭약을 설치하여 죽였다는 이야기는 같았지만 그 동기에 대해서는 서로 말이 달랐다. 조선족들은 그 중국인이 탈북자를 잘 대해줬는데 죽였다고 이야기하고 있고, 탈북자들은 이와 반대로 이야기한다. 정황상 탈북자들의 이야기가 맞을 가능성이 높지만, 하여간 이 사건으로 인해 조선족들이 탈북자들을 멀리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김형은 북한으로 끌려가 어떻게 됐습니까?
김 : 『보위부에 며칠 있다가 안전부로 넘겨졌단 말입니다. 지금은 안전부를 보안서라고 하는데 거기서 13일 동안 있다가 최종(최종 심사)을 받고 거주지 보안서로 호송한단 말입니다. 자기 거주지 보안서로 이동을 할 때 좀 눈을 돌리는 똘똘한 애들은 두 사람에 하나씩 손가락 족쇄를 채우고, 그리고 맥이 없어서 후저분해 있는(영양실조에 걸려 무기력한) 애들은 제 신발끈을 풀어서 손가락을 묶는단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 기차를 타고 호송한단 말입니다.』

여기서 ‘손가락 족쇄’라고 하는 손가락에 채우는 형구(刑具)를 말한다. 수갑(手匣)은 손목, 족쇄(足鎖)는 발목에 채우 듯, 이 형구는 양손 엄지손가락에 채워 움직이지 못하도록 한다. 크기는 엄지손가락에 들어갈 정도로 작다. 그런데 이 ‘손가락 족쇄’가 북한에 부족한 모양인지 탈북자들을 호송할 때 좀 기력이 있어 보이는 탈북자들에게는 형구를 사용하지만, 기력이 없어 도망갈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탈북자는 그의 신발끈을 풀어서 묶는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고 있는 탈북자들은 허약한 척 한다. 신발끈으로 묶어봤자 쉽게 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기회를 봐서 도망을 칠 수 있다. 김영길씨는 ‘손가락 족쇄’의 모양을 자세히 그려가면서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 호송 도중에 뛴(도망간) 겁니까?
김 : 『기차로 세 시간 간단 말입니다. 회령 사람들은 회령 안전부에 호송하고 타 지역 사람들은 청진 안전부로 호송합니다. 우리는 회령에 가게 되었는데 회령에 가면 죽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도중에 뛰었습니다.』

어디서 떠났는데요?
김 : 『온성군 남양(남양노동자구)에서 떠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족쇄를 풀었습니까?
김 : 『저는 허약한 척 하면 신발끈으로 묶는다는 소리를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억지로 아픈 척 했습니다. 그래서 신발끈으로 묶었습니다. 도중에 이빨로 풀고 뛰었습니다.』

그 때 송환돼 가는 사람들은 몇 명이었습니까?
김 : 『총 72명이었는데, 회령 사람들이 12명, 청진으로 나가는 사람들이 60명이었습니다.』

감시는 별로 없었나요?
김 : 『감시는 심합니다. 기차가 떠날 때에는 심하게 합니다. 하지만 기차가 한참 달릴 적에는 조금 안심하게 되죠. 거기다 기차 칸에 불이 없으니까……. 우리는 하늘이 도왔는지 온성에서 새벽에 떠났단 말입니다. 열차에서 뛰어내리자 마자 두만강으로 뛰어서 집에 들리지도 못하고 그 날밤으로……. (온성에서 청진방면으로 가는 철길은 두만강 가까이에 있다.) 』

그 때 왕청 주변에서 얼마나 잡혀갔습니까?
김 : 『그 폭발사건이 생기면서, 그 때 잡힌 조선사람 남자, 여자 합해서 100여명이 있었는데 한 방에 40여명 정도씩 잡혀 있었단 말입니다.』

거기가 도문(圖們) 변방구류소였겠습니다?
김 : 『네. 큰방에 남자, 여자……. 앉아도 있고, 이불 깔고 누워도 있습니다. 들리는 말로는 미국에서 지워준 북조선 사람들의 수용소라고 합디다.』

정확한 사실을 파악해봐야겠지만 탈북자들은 대부분 도문 변방구류소를 미국에서 중국에 지어준 것으로 알고 있었다. 도문 변방구류소는 길림성 인근의 탈북자들이 체포되었을 때 북한으로 송환되기 전 감금되는 곳인데, 최근 새로 지어졌다.

김 : 『그 개새끼들(변방대 간수들) 밥을 주는데, 아…… 얼마나 악착스럽게 다루는지. 우리 감방 안에서 시위투쟁까지 했습니다. 채소를 주는데 씻지도 않고 그 안에 벌레 가득 찬걸 준 단말입니다. 그래서 안 먹었는데, 야……(너무도 처참하던 그 당시의 광경을 그리며) 매를 썩어지도록 얻어맞았습니다.』

시위는 어떤 식으로 하셨어요?
김 : 『배식(配食) 구멍이 요만한데(배식구 크기를 손가락으로 그리며), 거기로 밥이 들어오면 밥을 안 먹고 밥그릇을 한 사람씩 엎어 놓는단 말입니다.』

며칠 동안 그런 시위를 하셨어요?
김 : 『며칠도 아니고…… (웃으며) 한 2시간?』

하하하……, 그래서 밥의 질이 개선 됐나요?
김 : 『좋아지긴요. 그 투쟁을 한 다음부터 밥이 더 형편없어졌습니다. 예전에는 중국에서 잡히면 단동(丹東)을 통해서 내보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도문구류소를 새로 지운 다음부터는 중국 땅에서 잡히는 북조선 사람들은 몽땅 도문에 가둡니다. 그런데 결론은 중국 땅의 조선족들이 더 괘씸하단 말입니다. 진짜 이 새끼들은 서림이나 한가집니다.』

김영길씨는 구류소에서 타 민족 출신의 간수보다 조선족 출신의 간수가 탈북자들을 더 모질게 대하는 것에 대해 오래도록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조선족 간수들에게 단단히 당한 모양이었다. 옆이 있던 이종익씨도 김씨의 이야기를 거들면서 조선족을 욕했다. 조선족과 탈북자들의 애증의 관계는 인터뷰를 하다보면 늘 나오는 이야기다.

국경을 넘은 지 얼마 되지 않은 탈북자의 경우에는 중국어를 전혀 모르니 우선 말이 통하는 조선족을 찾아갈 수 밖에 없다. 일단 탈북자들이 조선족을 가장 많이 찾아가기도 할 뿐더러, 조선족들의 입장에서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한 민족이라는 생각에 중국 내 타 민족보다 탈북자들을 잘 도와준다. 그저 집에 남아도는 헌 옷이나 밥 한 그릇을 건네주는 것만으로도 다급한 탈북자들에게는 큰 도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너무 많은 탈북자들이 몰려 들었고, 그러다보니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고, 탈북자들을 도와주다 발각되면 벌금을 크게 물어야 하므로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다.

또 조선족들의 탈북자 접촉횟수가 많다 보니 그중에 신고를 하는 사람도 그만큼 생기게 마련이다. 조선족들만 유독 탈북자들을 공안에 많이 신고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렇게 보이도록 되어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탈북자의 입장에서는 조선족을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있다.

조금 전 김영길씨의 답변 가운데 “(조선족들은) 서림이나 한가지”라는 표현이 등장하는데, 서림은 북한영화 ‘임꺽정’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서림은 임꺽정을 돕는 척하면서 그를 관군에 고발하여 임꺽정이 체포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죽음의 임박하였을 때 임꺽정은 서림의 꾀임에 속은 것을 너무도 분통해하며 최후를 마친다.

이 : 『산에는 숯구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족(漢族)들이 있단 말입니다. 그리고 소 방목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마음이 좋은 한족들을 만나면 자기들이 먹던 빵도 좀 주고, 입던 옷도 주고 한단 말입니다.』
김 : 『지금 변방지구는 (탈북자들에게) 밥도 안줍니다. 밥 한번 주면 500원(인민폐) 벌금을 내야 하고, 조선사람 한 명 신고하면 장려금을 200원(인민폐) 줍니다. 그러니까 농촌에서 일하기 싫어하는 조선족 애들이 쌍불 켜고(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키고 있는 겁니다. 돈을 받아먹겠다고…….』

이형은 그 동안 세 번이나 잡혔다 도망쳤는데, 그때마다 송환된 탈북자에 대한 취급은 어떻게 달라졌습니까?
이 : 『처음에 잡혔을 때는 배가 고파서 중국에 갔다고 말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냥 풀려났는데 두 번째는 취급이 달랐습니다. 집결소로 보내더란 말입니다. “너는 안되겠다. 도 집결소에 가라” 그래서 3달 동안 강제 노동단련대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보니 아이들은 굶고 있지, 앉아서 죽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처(妻) 보고 중국에 가서 살자 해서 모두 중국에 왔단 말입니다. 그런데 또 중국 ○○에서 잡혀나갔단 말입니다.

이전에 두 번 강타기(도강)한 경험이 있다 보니까 ‘비사회주의 구르빠’(사회주의에 반하는 행위를 단속하는 임무를 갖고 있는 북한의 공안조직) 놈들의 문건에 기록이 남아있단 말입니다. 이제는 안되겠다, 이제는 죽고 말겠다 생각했는데 회령 집결소에서 사람이 많으니까 안받겠다고 해서 도 집결소로 넘겨졌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도집결소 간부 중 친척이 있어서 △△로 옮겨져 일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큰 처벌을 받게 되어있는데 특별히 관대하게 처리된 것입니다. 거기서 도망쳐서 그대로 도강했단 말입니다.』

다시 강을 넘어 어디로 갔습니까?
이 : 『그 날이 12월 19일 인데 강이 채 얼지 않아서 신발이고 옷이고 다 젖었단 말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택시를 타고 들어가는데 검문소에서 공안들이 검사하는 바람에 또 붙들렸단 말입니다. 이제 붙들려 나갔다가는 죽는다는 생각에 차에서 내리지 마자 냅다 뛰었습니다. 공안들이 쫓아왔지만 동복을 두껍게 입고 있기 때문에 뛰지를 못합디다. 나야 뭐 걸친 게 없으니 홀가분하게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에 있는 내가 살던 집에 들어가서 살아났단 말입니다. 그 때 여기 온 몸이 꽁꽁 얼어있었습니다. 다행히 살아났습니다.』

×××에서는 주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이 : 『 공장이란 공장은 다 다녀봤습니다. 공장 주인들이 제 얼굴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다니지 못합니다.』

국경지역에 중국군대가 배치됐는데 이전하고 달라진 것이 있습니까?
이 : 『우선, 도강해 오면 길로 가는 사람은 무조건 잡힙니다. 두 번 째는 마을에 못 들어간단 말입니다. 마을 입구마다 군대 초소가 있습니다. 그리고 도로도 군대가 지킨단 말입니다. ‘야- 섯, 손들어’하면 손 들어야 한단 말입니다.』

변방부대와 인민해방군의 복장은 다른가요?
김 : 『다릅니다.』
이 : 『둘 다 복장은 국방색인데, 군대는 팔에다 완장을 끼고 마을에서 벗어나는 큰 도로 주변에 차를 딱 세우고 서있는 단 말입니다.』

마을마다 다 있습니까?
이: 『마을에는 돌아다니지 않고 마을 입구마다 지켜서고 있습니다. 그리고 국경마을마다 다 배치돼 있습니다.』
김: 『그래서 저는 이번에 (중국에) 들어 올 때 마을에 들어가지 않고 산으로만 넘었단 말입니다.』

국경을 넘어서 중국에 들어서면 큰 길로 다니지 않고 산을 넘어 이동해야 한다는 말은 이번 취재에서 여러 탈북자를 통해 들었던 말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중국 군대를 산 속에까지 배치하였다는 소식도 들려왔다.

이 : 『그저 하루 밤 자고 일어나면 ‘살았구나!’ 하고 또 하루 밤 자면 ‘별일 없구나!’ 한단 말입니다.』
김 : 『밤에 잠을 자지 말아야 한단 말입니다.』

왜 밤에 잠을 자지 말아야 합니까?
김 : 『밤이 되면 들이친단(단속한다) 말입니다. 그러니 밤 12시까지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밤 12시가 지나면 걔들(변방부대)도 잠을 자기 때문에 그 후로는 조금 마음을 놓을 수 있습니다. 또 아침, 점심, 저녁 식사 시간마다 들이닥칩니다.』

어떤 식으로 들이닥치는 겁니까?
김 : 『그 집을 둘러쌉니다.』
이 : 『미리 집을 포위하고 친단 말입니다.』

대개 몇 명씩이나 됩니까?
이 : 『5∼6명 정도씩 됩니다. (예전처럼) 둘이라면 일 없는데(잡히지 않는데)……』

변방대는 총을 들고 다니나요?
이 : 『전기 곤봉을 들고 다닙니다.』
김 : 『의심스럽다 싶으면 문에 들어서자 마자 쇠줄부터 건단(대문을 채운다) 말입니다. 그리고 신분증 보자고 하고, 중국말을 하지 못하면 잡는단 말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이 : 『무작정 달라붙어 죽도록 때립니다.』

집안에 들어와서 때립니까?
이 : 『‘나오라!’ 해 가지고는 나오는 순간에 달라붙어 때립니다.』
김 : 『날 때릴 때는 6명이 달라붙어 칩디다. 곤봉으로 친단 말입니다.』

김씨와 이씨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씨는 “이제 살아남기 위해서는 무슨 수라도 써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들었듯 그는 벌써 3번이나 잡혔기 때문에 이제 다시 잡히면 “가망이 없다”고 했다.

이 : 『대사관이면 대사관, 막 들어가고 싶단 말입니다. 집이 있어, 뭐가 있어? 남은 건 아무 것도 없는데…….』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최근 상황은 어떤지 알고 있습니까?
이 : 『지금 월급을 몽땅 올려놨습니다. 월급만 올렸으면 일없는데 물가가 오르고, 여기에 ‘공채’라는 것이 따라 옵니다. 의무적으로 600원씩 공채를 사라는 겁니다. 한 달 동안 뼈빠지게 일했는데 공채 600원을 뚝 떼고 나니 쌀 사먹을 형편이 안 된단 말입니다.』

북한에서 지난해 ‘인민생활공채’라는 것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재정조달과 통화량 조절을 위한 조치로 해석되는 공채발행은 북한 주민들의 또 다른 고통이 되고 있다. 충성심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공채를 사들여야 하기 때문이다.

10년 만기로 발행된 이번 공채는 이자가 없고, 추첨식으로 상환해주니 복권이나 마찬가지다. 6개월에 한번씩 추첨을 해 1등은 액면가의 50배를 되돌려준다고 한다. 조선중앙통신은 2003년 5월 6일자 보도에서 “5월 2일 하루에만 수십억원 어치가 팔렸다”며 “전국 각지의 각계층 인민들은 인민생활공채의 발행이 노동당의 인민적인 정치방식의 표현이라는 것을 자각하고 공채 구입에 적극 떨쳐 나서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신문은 “(2003년) 5월 31일 현재 전국적으로 근 2천만 매의 인민생활공채가 판매됐으며 수백만 명이 공채구매사업에 참가하였다”고 진행경과를 밝혔으며, 2003년 7월 15일에는 “온 나라 전체 인민들이 공채구매사업에서 숭고한 애국심을 높이 발휘하는 속에 많은 여유화폐자금이 동원되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번 취재과정에서 만난, 최근 국경을 넘은 탈북자들은 “월급도 주지 않으면서 공채만 사라고 하니 이것이야 말로 착취가 아니냐”고 주먹을 부르쥐었다. 위에서 이종익씨는 의무적으로 600원씩 공채를 사라고 했다 하는데, 이번 공채의 발행가격은 500원, 1000원, 5000원 등 세 종류이다. 자신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니니 잘못 전해 들었던지, 아니면 회사에서 일괄 구입을 하면서 100원을 더 얹어서 걷는 것인지는 확인해보지 못했다.

이 : 『지금 조선 사회가 어떤 가 하면, 좀 빽이 있는 자들, 직위 있는 자들은 정말 잘 산단 말입니다. 만일 내가 △△△동 보안원이라고 하면, 담당구역내 주민들이 담배장사를 하는지, 술장사를 하는지, 식당을 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나는 외눈으로 쭉 살펴보기만 합니다. 어느 아주마이(아줌마) 하루 수입이 얼마고, 어느 아주마이는 어떻다 하는 등 담배장사꾼으로부터 쌀장사에 이르기까지 다 적어 놓는단 말입니다. 그리고는 식당에 가서는 “아주마이, 팔지 말라는 술은 왜 파는가?” 하면 식당 아주마이는 “보안원 동지 왔습니까? 여기 와 앉으시오, 앉으시오” 하면서 잘 차려 줍니다. 그러면 보안원은 배불리 먹으면서 “술을 팔려면 좀 살랑살랑(몰래) 파시오. 내 귀에 들어오지 않으면 좋겠습니다” 하면서 공짜로 먹고 넘어 간단 말입니다.

또 보안원은 매 인민반을 담당하고 있는데, 식당 아주마이한테 “너네 인민반에서 술 만드는 집 있니?” 하면 “예! 댓집 있습니다” 라고 일러바칩니다. 그러면 술 만드는 시간을 알아봐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시간에 그 집에 간단 말입니다. 그 집에 가서는 ‘아주마이 말이야, 술이랑 만들지 말라는데 말이야” 하면서 단속할 듯 하면 그 집 주인은 보안원의 입을 틀어막느라고 빚은 술 5리터 정도를 고인(바친)단 말입니다.

밥도 먹었겠다, 술도 해결됐겠다, 이제는 담배를 해결해야 되겠다 하면 또 장마당에 나갑니다. 그리고 담배 장사하는 아주마이에게 “아주마이 이리 와. 왜 자꾸 담배 팔아?”하면서 담배를 몽땅 압수하겠다고 하면 댓 막대기(보루) 정도 준단 말입니다.』

김 : 『완전히 간부들만 살기 좋은 세상입니다.』
이 : 『그리고 또 누구의 안까이(아내)가 곱다고 소문이 나면, 내 것입니다. 시집을 갔든 안 갔든 관계없습니다. 이렇게 몸바치면서 사는 여자들이 많단 말입니다. 저(북한) 사회가…… 수령님 있을 때는 그래도 좋았지. 통강냉이 밥이라도 굶지는 않았단 말입니다. 지금처럼 사회가 그러지는 않았단 말입니다.』

이형은 깡판(노동단련대)에도 가보셨다고 그랬는데, 최근 한국에서는 온성 노동단련대의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한 화면이 공개된 바 있습니다. 화면을 보니 단층 건물에, 담장에 철조망도 없고 경계도 느슨해 보이던데…….
이 : 『저도 온성 단련대에 가보았습니다. 19일 동안 들어가 있었습니다. 건물은 단층이고, 담벽은 2미터 정도의 콘크리트로 둘러 쳐있습니다. 그것을 넘을 수도 있겠지만, 감시가 너무 심합니다. 오줌 싸러 나갈 때 혼자 나가지 못하고, 혼자 나가는 경우에는 하나, 둘, 셋 하고 크게 소리를 쳐야 합니다. 구조는 여기 식당, 여자 호실, 남자호실, 여기는 식량창고, 여기는 담당 보안원실 이렇게 생겼단 말입니다. (종이 위에 온성 노동단련대의 구조를 그려보여줬다)』

노동하는 모습을 봐도 별로 감시를 하는 것 같지 않던데 왜 도망을 치지 않는 거죠?
이 : 『도망갈 틈을 주지 않는단 말입니다. 감시가 대단히 심합니다.』

무슨 일을 하셨어요?
이 : 『그저 공공건설 일을 합니다. 꽃바크(=깡판=노동단련대)라는 것은 지역에서 제일 어려운 일들을 골라서 합니다. 그리고 보안서 후방기지 강냉이 밭이나 남새밭에 나가서 일을 시킨단 말입니다. 어쨌든 보안서가 관리하기 때문에 자기네 일을 많이 시킵니다. 내가 (깡판에) 들어올 적에는 비사회주의를 없앤다면서 당, 행정, 보위부, 보안서 4개 기관이 합쳐서 운영했습니다.』

먹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 : 『먹을 것을 준다는 건 돼지죽보다 못합니다. 먹질 못하겠습디다.』
김 : 『변소는 똥이 차서 그 주변 허망(사면에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곳)에서 눕니다. 남자들이 먼저 가서 눈 다음 여자들이 가서 누고……, 사람생활이 아닙니다.

밑은 어떻게 닦는데요?
김 :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 『보위부 감방에서는 물로 닦고. 밥숟가락도 없단 말입니다. 밥은 옥수수가루를 주는데, 사람의 생활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깡판 규율이 형편없이 세단 말입니다. 또 암송하는 것도 많고.』

뭘 암송시키는데요?
이 : 『법규정을 암송시킵니다. 그리고 ‘포고문’도 암송시킵니다.』

어떤 내용인데요?
이 : 『비법월경(非法越境)하거나 귀국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유설하면 인민보안성 법령 몇 항 몇 조에 의하여 (교화소에) 간다는 게 있습니다. 그리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셨습니다” 하고 교시 말씀을 암송한단 말입니다. 또 회고록도 암송시킵니다. “내가 후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내가 70평생의 일생을 총화하면서 사람이 돈이나 물질에 유혹이 되면 자기 부모도 모르고 나아가서는 당과 수령도 모르는 인간추물이 된다는 것이 인생을 회고하면서 일군들에게 하고 싶은 말입니다. 김일성.” 그 다음에,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장군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에 살자.’ 이상입니다.” 이런 내용들을 매일 외워야 합니다.

깡판에 몇 명이나 있었나요?
이 : 『많습니다. 한 180명? 어쨌든 우리가 다 나가면 또 들어오고, 계속 사람들이 들어온단 말입니다.』
회령 사람들 10명 당 몇 명 정도나 중국에 왔다간 경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김 : 『온성이나 회령 사람들이라면, 한 70%는 중국에 왔다간 경험이 있습니다.』

전체 주민 가운데요?
김 : 『아이들까지 모두 포함해서 70%입니다.』

옆에 있는 이씨도 이러한 견해에 대체로 동의했다. 약간 과장된 감은 없지 않으나, 탈북자 가운데 그 수가 가장 많은 회령이나 온성 출신에게 “당신이 살던 고장에서 몇 명이나 탈북 경험이 있는가”라고 물으면 대체로 “절반 이상’이라고 대답한다. 이번 취재과정에서도 그랬지만 실제 재중 탈북자 중 상당수는 회령과 온성 출신이다. 강을 넘기가 쉽기 때문이다.

이 : 『이제 중국에 대해서는 다 알고 있습니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내가 온성 보위부에 들어갔을 때, 보위부에 내 동창 친구가 있었단 말입니다. 그 친구가 제게 “야, 이 등신 같은 새끼야 왜 붙들려 왔냐? 안 붙들린 사람들은 큰소리 탕탕 치면서 살고 있는데”라고 하더란 말입니다. 회령에 △△△라고 하는 망종(亡種, 아주 행실이 나쁜 사람을 이르는 말) 아새끼가 하나 있는데, 보위부 물을 먹은 (보위부의 프락치라는 뜻) 애였습니다. 그 놈이 중국에 갔다 왔는데, 들어와서는 보위부에 화선입당을 다 했습니다. (‘화선입당’이란 원래 전선에서 즉각 당에 입당시키는 것을 말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을 당원 심사 없이 입당시킨다는 뜻이다.) 그리고 노력훈장 1급을 탔단 말입니다. 완전히 망종 새끼인데……. 어떻게 해서 그리 됐는가 하면 중국에 와서 안기부 누구를 맸다지(납치해서 북한에 보냈다는 듯), 또 목사를 맸다지……. 이런 놈들이 회령에서 소리치며 산 단말입니다.』

보위부에서 일한다는, 이종익씨의 친구가 한 말 - “안 붙들린 사람들은 큰소리 탕탕 치며 살고 있다”는 말은 중국에서 돈을 벌어 조용히 다시 들어와 장사를 하면서 살았으면 큰 부자가 되어 북한에서 큰 소리 치면서 살 수 있을 텐데 왜 잡혀서 들어왔는가 하는 꾸지람이다. 즉 웬만한 사람들은 중국에 가서 돈을 벌어와 그 밑천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고, 보위부원들도 이를 알면서도 이제 그 정도는 눈 감아 준다는 이야기다.

김 : 『지금 국경 경비하는 애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갖고 있는 구호가 ‘10년 군사복무기간에 30만원(북한돈) 벌기’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현찰만 있으면 250원(중국 인민폐)을 주고 “내 언제 중국에 갔다가 며칠 날 오겠다” 말하면 무사통과입니다. 돈만 있으면 군대들도 다 건너가라고 합니다.』

그런 부정 비리가 심해 북한의 국경경비대를 다 교체했다고 알고 있는데요?
김 : 『교체됐다는 게, 무산군 경비대 애들이 회령에 가고 회령 경비대 애들이 무산에 오는 식입니다. 그래서 그 놈이 그 놈입니다.』

탈북자들의 도강 루트는, 전혀 돈이 없는 사람은 경비대의 근무교대 시간에 맞춰 야음(夜陰)을 틈타 건너지만, 경비대에 뇌물을 바치고 건너는 것이 일반화 되어있다. 그래서 2003년 5월호(통권 34호) Keys에는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조명록의 직접 지시로 국경경비대에 대한 감찰을 실시하고 경비대 전원을 교체했다고 보도한바 있다. 하지만 교체된 경비대원도 이전과 마찬가지라는 것이 김씨와 이씨의 증언이다. 다른 탈북자들의 증언을 들어보아도, 그것은 오히려 도강에 소요되는 비용을 더 올려놓았다. 1-2년 전만해도 중국 인민폐로 1인당 100원 정도를 바치면 됐지만 요새는 200-300원을 바쳐야 한다고 탈북자들은 증언한다.

두 분은 중국에서 탄광 일을 하셨다고 했는데 그때 이야기를 해주십시오
이 : 『9명에서 11명이 한 개 조를 이룹니다. 노동자들은 거의 다 한족들인데 그 속에 조선 사람들이 드문드문 끼어 있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조선사람들만 한 개 조로 묶어라’ 해서 같이 일하기도 했습니다. 밤일(야근)까지 하고 집에 오면 대충 씻고 자는데 새까맣단 말입니다. 그런 채로 다음날 다시 일을 나갑니다.』

몇 시간 일합니까?
김 :『8시간 일합니다. 하루에 일곱 차 여덟 차 등 조별로 과제가 있단 말입니다. 굴 속으로 들어가 탄을 캐서 마대를 메고 기어 올라와 모아놓으면 광차가 옵니다. 그러면 광차에 싣는데, 광차의 개수에 따라 일한 양을 평가한단 말입니다.』

한 달에 얼마를 줍니까?
김 : 『우리는 한 달에 600원, 중국 애들은 1000원 이상입니다.』
이 : 『우리는 한족들이 받는 돈의 딱 절반을 받습니다.』
김 : 『그리고 한 달에 300원씩 야진(押金, 한국식 독음법은 ‘압진’이지만 중국어로는 ‘야진’이라 발음한다. 일종의 ‘보증금’으로 맡겨놓는 돈을 말한다.)한단 말입니다.

야진은 왜 하는데요?
김 : 『탄광에서 도망칠까봐 그럽니다. 야진한 돈은 못 받는 돈입니다. (원래 야진한 돈은 되돌려 받아야 한다.)』
배초구 폭파 사건으로 인해 분위기가 많이 안 좋아졌겠는데 이제 어디서 일하실 겁니까?

이 : 『아……. 우리는 정말 갈 데가 없단 말입니다.』
김 : 『나도 그렇단 말입니다. 목재판 같은 데서 일하다가도 겨울이 되면 일할 게 없다고 쫓아낸단 말입니다. 그러면 그간에 번 돈을 가지고 먹고 살아야 하고 우선 갈 데 가없단 말입니다. 돈을 조금씩 주는 곳이라도 들어가 먹고 살아야 된단 말입니다. 그러다가 검사만 들어오면 다 쫓아낸단 말입니다.』

함경도 사람들은 말 끝에 ‘말입니다’라는 말을 꼭 갖다 붙인다. ‘말’과 ‘입’사이의 ‘ㄹ’이 약하게 발음되면서 ‘마입니다’라고 끝이 약간 올라가는 말을 계속 반복한다. 그래서 감정이 격앙된 부분에서는 이야기가 더욱 간절하게 들린다. 앞에서 김영길씨도 ‘말입니다’를 반복하며 목소리가 높아졌다. 애써 눈물을 참고 있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힙니까?
김 : 『한국에 가야 삽니다. 그거 이외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한국행이 안되면……, 한 10년이나 13년 감옥에서 살 만한 큰 죄를 짓고 중국감옥에서 살고 싶습니다. 일해주고 돈도 못 받고 중국 놈들한테 구박 받으며 여기저기 쫓겨다니면서 불안하게 사느니 중국감옥에 가는 편이 났습니다. 여기서 외국인이 10년 이상 형기를 받으면, 장춘에 있는 국제 감옥에 넣는다고 하더란 말입니다. 거기는 천국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죄를 짓고 감옥에 갈 것이냐고 물었더니 배초구 폭파 사건처럼 맘에 안드는 조선족 여러 명을 죽이고 감옥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정말 진지하게 이런 이야기들을 했다. 궁지에 몰린 자의 눈에 어리는 살기(殺氣)가 느껴지는 듯 했다. ‘조금만 참고 견디면 북한에 좋은 날이 올 것이니 허튼 마음 품지 말고 착실하게 살아라’고 계속하여 그를 진정시키면서도, ‘오죽했으면 이런 이야기까지 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북한이 이 상태에서 몇 년이나 갈 것 갔습니까?
김 : 『내가 생각하건 데, 김정일이 죽어야 됩니다. 사람들이 굶어 죽고 있는데 어디 군부대나 시찰하고…….
이종익씨도 옆에서 거들면서 “김정일이 죽어야 한다”는 말을 되풀이 했다. 이번 취재에서 느낀 하나의 변화는 이제 문제의 원인을 ‘김정일 정권’으로 인식하는 북한 주민들이 많이 늘어났다는 점이었다. 특히 중국 생활의 경험이 많고 한국 사람들을 자주 접촉한 탈북자의 경우 이러한 인식이 강했다. 하지만 김정일 정권의 수명이 점점 길어지면서 모두가 힘을 잃은 듯 했다.

중국에서 라디오를 계속 들어 국제사회의 동향을 제법 잘 알고 있는 어느 탈북자는 북한 핵문제를 둘러 싼 6자회담에 대해 나름의 전망을 내놓았다. 미국은 결국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게 될 것이라고 그는 이야기했다. 미국의 목적은 그저 자기나라만 공격하지 않으면 되기 때문에 북한이 핵무기를 폐기한다고 하면 압박정책을 중단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러면 김정일에게 다시 한번 숨통을 열어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그는 한숨을 내쉬며 걱정했다. 그리고 자신은 미국에게 기대를 크게 갖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필자는 이라크 민중이 생각났다. 미국이 이라크전쟁을 계획할 때, 일단 미영 연합군이 이라크 내부로 진입하면 후세인 독재 치하에서 고생했던 이라크 민중이 들고 일어나 봉기를 일으키고 연합군을 환영할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그러나 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 이라크인이 연합군을 환영하긴 했지만 기대만큼 그 인파가 크지는 않았다.

혹자는 그것을 ‘이라크인들이 후세인을 진정으로 지지했다는 증거’라고 주장하거나, 반미(反美)투쟁의 소재로 삼았다. 하지만 이라크인들은 1991년의 악몽을 갖고 있었다.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군을 물리치고 바그다드로 진격해 미국이 후세인을 제거할 것이라 믿었던 이라크인들은 곳곳에서 반(反)후세인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연합군은 국경에서 진군을 멈췄다. 당시 봉기를 일으켰던 주동자들은 모두 체포되었고, 이른바 ‘감옥청소’라는 이름으로 수 천명이 학살되었다. 그래서 이라크인들은 미국을 믿지 않았다. 미군은 자기 목적만 달성하면 돌아간다, 섣불리 행동하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은 것이다. 후세인이 완전히 제거되는 모습을 확인하는 날까지 그들은 쉽사리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지 않았다. 그리고 후세인의 아들 우다이와 쿠사이가 죽고, 마침내 후세인까지 체포되는 모습을 TV를 통해 확실하게 보게 되자, 마침내 거리로 뛰어나와 하늘에 축포를 쏘며 축제를 벌였다.
미국이 또다시 김정일의 속임수에 넘어간다면, 그래서 김정일 정권의 수명을 10년 더 연장시켜 준다면, 북한 인민들은 이라크인과 같은 절망감을 안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김영길씨는 인터뷰 도중 이런 이야기를 했다.

『나는 여기(중국) 들어 올 때 한 10년만 견디면 되겠다 생각했단 말입니다. 조선은 지금 곪을 대로 곪았기 때문에 10년 후면 망하게 되어 있단 말입니다. 내부는 썩을 대로 썩었고, 이제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는 인식을, 비록 내놓고 말은 못하지만 사람들이 모두 갖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