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이야기
4·18 도문변방구류소 폭동 사건의 전말

보위부에서 심하게 고문을 당한 탓에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아주머니와 그 남편을 만났다. 그들은 중국과의 밀수를 생활수단으로 하는 사람들이라 원래 그에 대해 많이 물으려 했으나, 아주머니와 이야기를 하는 도중 자신이 도문변방구류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폭동사건이 있었다는 증언을 했다. 무심코 듣다 다시 확인해보니 2000년 4월 도문변방구류소에서 일어난 유명한 폭동사건이었다. 폭동(暴動)이라고 해 어감이 좋지 않긴 하지만, 항쟁(抗爭)이라고 하기도 애매하니 그냥 편하게 ‘폭동’으로 표현하겠다.

당시 Keys는 이 폭동사건을 긴급하게 보도했다. 다소 길지만 당시 Keys의 보도내용(2000년 5월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RENK발 중국 길림성 탈북난민 폭동 소식
“중국 정부, 결국 폭동 난민 북한으로 전원 송환한 것으로 알려져”

지난 4월 20일 일본의 RENK로부터 긴급(URGENT)이라고 표시된 한 장의 팩스가 NKNET으로 보내져 왔다. [북한난민 폭동! 중국 길림성 투먼시 구치소에서] 라는 제목에 “북한으로의 강제 송환을 저지하기 위해 10여명의 국경경비대와 난투를 벌여 중국 당국이 증원부대를 보내 진압중”이라는 놀랄 만한 소식이 담겨 있었다.

이 사건은 4월 18일 일어난 것으로 이 소식을 최초로 전한 사람은 중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RENK요원이었다. 국경지역에서 지인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던 이 요원은 휴대하고 있던 이동전화를 통해 폭동이 일어났으니 돌아오라는 연락을 받고 사건을 파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본지는 4월 26일 사무국장 이영화(李英和) 전화 통화를 통해 이 상황을 다시 확인했다.
사건의 간단한 전말은 이렇다. 북한으로 송환될 탈북자를 임시 수용하는 도문의 구치소에서 두 명의 남성이 석방을 요구한 데 사건의 발단이 있다. 이들은 북한의 조선인민군 출신으로 만일 북한으로 돌아가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즉시 처형될 운명에 처해져 있었다. 이에 이들은 인질을 잡고 강력하게 저항했으며 이를 저지하려는 중국당국과 몸싸움이 벌어져 곧 폭동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무기 등 다른 저항수단을 갖추지 못한 이들은 곧 중국 당국에 의해 진압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영화 사무국장에 따르면 이들은 전원 북한으로 송환된 것으로 알려졌다고 한다. 김정일의 5월 방중설이 떠돌고, 6월 남북정상회담을 앞둔 시점에서 이 문제가 국제적 이슈가 되기 전에 발 빠르게 수습한 것으로 보인다. 최근 제네바 소재 유엔난민고등판무관(UNHCR)은 이 사건을 확인 진상조사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당시 북한민주화네트워크는 이와 관련한 논평을 내고 탈북자들의 강제송환을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위 기사에는 도문구류소의 폭동 이유를, 북한의 조선인민군 출신으로 만일 북한으로 돌아가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즉시 처형될 운명에 처해져 있던 남성 두 명이 석방을 요구하면서 시작됐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취재과정에서 만난 최순임(가명)씨가 말하는 사건의 발단은 이와 달랐다. 2000년 4월 당시, 사건의 배경이 외부에 과장되게 전달되었을 수 있고, 최순임씨가 사건의 전말을 다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여하튼 2000년 4월 도문변방구류소 폭동 사건의 전개과정을 아는 데 최씨의 증언이 도움이 될 것이라 판단하여, 그녀의 증언을 수기 형식을 빌어 싣는다.

탈북자 최순임씨의 증언
2000년 4월 10일 나는 중국 공안에 체포되어 다른 몇 명의 탈북자들과 함께 도문감옥으로 옮겨졌다. 나는 중국에서 한국인의 보호 아래 있었는데, 북한으로 돌아가 이러한 사실이 밝혀지면 크게 처벌될 사항이었다. 따라서 어떻게든 북한으로 송환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당시 도문 감옥에는 총 97명이 있었는데 내가 있던 칸에는 여자들만 열명 정도 있었다. 그런데 우리 방에 수감된 여자들이 서로 뜻이 통해 탈출을 모의했다. 다들 북한으로 돌아가면 안될 사연들을 안고 있었다. 그래서 힘을 합쳐서 이곳을 빠져나가자는 생각으로, 처음에는 벽을 뚫기 시작했다. 나에게 큰 머리핀 두 개가 있었다. 그걸로 벽돌과 벽돌 사이의 미장된 틈을 뚫었다. 지금은 도문 감옥을 새롭게 잘 만들어놨지만 당시에는 오래된 건물이었다. 벽돌을 하나만 빼면 전부다 빠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발각되면, 탈출모의에 참여한 사람만 처벌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우리 방안의 모든 여자들이 돌아가면서 벽돌을 긁도록 했다. 그러면 고발 당할 위험이 줄어들지 않겠는가. 하지만 방마다 감시카메라가 있어 밤에만 벽돌을 긁어야 하고, 머리핀의 수도 제한되어 있어 뚫는데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파봤자 벽돌은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래서 며칠 만에 그 작업은 포기했다.

우리는 근무하는 간수를 묶어두고 탈출하는 방향으로 방법을 바꿨다. 그러자면 감옥문을 통과해서 나가야 하는데, 여자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남자들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감옥 방마다 구석에 변기통을 하나씩 놓아두는데, 아침에 그걸 버리기 위해 감방문을 잠깐 여는 시간이 있다. 그때 남자 칸에 대고 우리의 계획을 구체적으로 말했다. 남자들은, 여자방에서 먼저 시작하면 자기들도 돕겠다고 했다.

예상했던 그 간수가 아니다!
우리의 계획은 이랬다. 저녁에는 간수가 한 명만 근무를 선다. 감방 안의 여자가 아프다고 소리쳐 간수가 방안으로 들어오면 그를 묶고, 다른 방의 자물쇠도 푼 다음, 다 같이 감옥을 밀고 나가는 것이다. 이런 계획아래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그때 우리 칸에 군대용 이불이 두 개 있었다. 그걸로 끈을 만들기로 했다. 그리고 각자 역할을 분담했다. 너는 앓아 뒹구는 흉내를 내라. 너희 둘은 소리를 쳐서 간수를 끌어들여라. 너희 둘은 손을 묶어라. 너희 둘은 발을 묵어라. 다 이렇게 치밀하게 계획을 짰다.

그런데 문제는 감방 안에 들어온 간수를 누가 용기 있게 가장 먼저 붙잡을까 하는 것이었다.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그때 회령 출신의 한 여자가 자기가 하겠다고 나섰다. 그는 중국에 와서 못사는 집에 시집을 가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임신한 채로 붙들려 온 여자였다. 그 여자가 ‘언니 내가 붙들겠다’고 했다. 마음이 착하고 대찬 여자였다.

우리는 간수들의 근무교대 주기를 알고 있었다. 감옥 간수 중에 조선족이 한 명 있었는데, 키가 크고 허약해 보였다. 또 조선족 간수여야 그럴 듯하게 말하면서 감방 안으로 유인하기도 쉬울 것이라 판단했다. 그가 저녁근무를 서는 시간을 거사(擧事) 시간으로 택했다. 그래서 그날 아침에 변기통을 버릴 때 남자 칸에다 대고 “오늘 저녁에 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남자들이 “하되, 밤 9시 이후에 하라”고 했다. 우리는 “알았다”고 짧게 대답하고 그날 밤을 기다렸다.

밤 9시가 지나가자 일이 시작됐다. 계획대로, 먼저 한 명이 앓는 흉내를 냈다. 진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죽는 시늉을 했다. 우리가 보기에도 그럴 듯하게 정말로 잘했다. 간수를 부리기로 한 조가 “간수! 간수!”하면서 부르니 이윽고 간수 한 명이 복도로 들어왔다. 그런데 이게 왠 일인가! 우리가 예상했던 키 큰 조선족 간수가 아니었다. 조선말도 모르는 한족(漢族)이었다. 어쨌든 그를 꼬드겨 감방 안으로 들어오게 만들어야 했다. 우리 방에서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여자들이 “애가 아픈데 좀 들어와서 살펴보라”고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는 감시창으로 들여다 보기만 할 뿐 들어올 생각을 안 했다.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여자들은 계속해서 “사람이 이렇게 앓는데 그냥 내버려 두려는가”하면서 거칠게 항의했다. 그때서야 문을 열고 한발짝 한발짝 조심스럽게 들어왔는데, 들어와서는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 그저 선채로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허리를 구부려야 한꺼번에 달려들어 쓰러뜨릴 텐데 말이다.

간수에게 제일 먼저 덤벼들기로 한 회령 여자도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는 당황한 눈빛으로 바쁘게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오늘은 때가 아니라고 조용히 고개를 흔들었다.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간수는 잠깐 서있다가 복도로 나가 다시 감시창으로 들여다보며 서있었다.

이젠 아파 뒹굴고 있는 여자에게 눈치를 줘 멈추게 해야 했는데, 이 여자가 알아먹지 못하고 계속 바닥을 뒹굴었다. 그러니 간수가 다시 방안으로 들어왔다. 사건은 찰나에 일어났다. 간수가 뒤돌아 방을 나가려는 순간, 회령 여자가 갑자기 간수의 목덜미를 붙잡았다. 그런데 여자가 힘이 없는데다, 간수가 입고 있는 옷이 탄력이 좋아서 길게 늘어지기만 할 뿐 넘어지지 않았다. 간수는 뒤로 돌아서 회령 여자를 때렸다. 원래 허약했던 회령 여자는 한 대 맞고 기절을 했다. 간수는 쓰러진 회령 여자를 죽이겠다고 다가가 마구 발길질을 했다. 그러니 모두 나서서 간수를 막아 섰다. 죽일 듯이 계속 때리고, 여자들은 그것을 말리고, 그렇게 감방 안이 아수라장이 됐다.

비명소리가 감옥 안에 크게 울리자 부소장이 우리 방으로 들어왔다. 그는 조선족이었다. “무슨 일이냐”는 부소장의 물음에 우리는 “이 애(회령 여자)가 정신이 좀 이상한 애인데, 환자가 있는데 간수가 보지 않고 나가니까 화가 나서 간수를 뒤에서 잡았다”고 둘러댔다. 부소장은 간수에게 그만하라고 하면서 쓰러진 회령 여자에게 약을 주고 갔다. 그런데 그 다음날 그 간수가 또 우리 방에 들어와서는 회령 여자를 다시 때리기 시작했다. 회령 여자는 정신을 잃었고, 다시 부소장이 들어와서 그 새끼(간수)를 끌어냈다.

이런 일이 있고 나서 간수들은 감방 안으로 들어오지를 않았다. 변기통을 내갈 때가 됐는데도 내가지 않았다. 냄새가 방안에 진동했다. 모든 방이 마찬가지 였다. 감옥 안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는데, 여자 방이 부족하다 보니 늙은 여자들은 남자 방으로 집어넣었다. 그래서 남자 여자가 같이 일을 봤다. 통에 오물이 넘쳐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닷새가 지난 어느 날. 간수 한 명이 자기도 냄새를 참지 못하겠는지 남자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날이 4월 18일 이었다.

우리는 그저 배고파서 온 것뿐
그 때 문을 연 간수가, 우리가 목표로 삼았던 키가 큰 조선족 간수였다. 식사시간이었는데, 앞 방에서 ‘꽥’하는 비명 소리가 났다. 나는 무슨 일인가 하여 감방문 밑으로 바깥 상황을 살펴보았다. 앞 방 남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간수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이게 무슨 일인가 하고 보고 있으려니, 앞 방의 북한 남자 한 명이 방에서 나와 다른 방의 문을 다 열어 젖히고 있었다. 도끼를 들고 차례대로 감방 문을 까는데, 우리 방이 제일 마지막이었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문을 두드리며 “우리 방도 까라”고 소리쳤다. 드디어 우리 방 문도 열렸다.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나왔다.

나와보니 남자간수가 꽁꽁 묶여 남자 칸에 갇혀있었다. 여자들이 먼저 하니까 남자들이 담력이 생겨서 자기들도 같은 방식으로 일을 실행한 것이다. 나중에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랬다. 간수가 변기통을 가져 갈려고 문을 열 때 확 잡아 챘다고 한다. 그렇게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려 하니까 간수가 소리를 지르는 통에 다른 간수들이 달려왔다. 그 때 남자 둘이 가서 문을 막았다. 좋게 말할 때 잡혀간 간수를 내놓으라고 다른 간수들은 소리를 지르고, 실랑이를 하다가 안되니 도끼를 들고 왔다. 간수들이 도끼로 문을 찍고 들어오기는 했는데, 그 방안에 있는 북한 남자들이 이번에는 도끼를 뺐어 들었다. 그러자 간수들은 뜨거운 물을 들고 와 방안에 끼얹었고, 남자들은 몸에 화상을 입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 다음에는 완전히 감방에서 나와 문을 몽땅 까고 난리가 났다. 간수들은 놀라서 도망을 갔다. 그렇게 그대로 밀고 나갔어야 했는데, 우리의 큰 실수가 시작됐다.

붙잡힌 간수가 머리를 썼다. 그가 말하길 “너희들은 한 시간만 견지해라(그대로 버텨라). 그러면 너희들은 무죄석방이 된다”고 했다. 어리석은 우리들은 그 말을 믿고 남자들의 지휘 아래 한 시간 동안 내복바람에 노래를 부르면서 자리를 지켰다.

잠시 후에 증원부대가 가뜩 몰려왔다. 변소에 김치독이 하나 있었다. 증원부대는 그걸 깨서 돌로 만들고 수도 밸브를 몽땅 꺼내놓았다. 증원부대는 물을 뿌려대면서 우리쪽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물을 퍼서 변소 쪽으로 퍼내면서 문을 고수했다. 내가 발을 딛고 보니 증원부대가 세 겹으로 쌓여 있었다. 변방부대들이 살벌하게 저마다 족쇄를 쥐고 세 겹으로 감옥을 에워싸고 있었다.

우리 북한 사람들 가운데 중국말을 잘 하는 사람을 목마 태워서 문에 대고 말했다.
“우리는 죄인인 아니다. 그저 배고파서 왔는데 무슨 죄인이냐.”

그러자 밖에서는 그만두라는 말만 반복했다. 그리고 자기네 사람(간수)를 내놓으라고 했다. 우리는 기자를 만나게 해달라, 기자회견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의 또 하나의 실수가 벌어졌다. 잡아두고 있던 간수 - 키가 크고 허약한 - 를 계속 데리고 있어봤자 뭐하겠느냐는 생각에, 들어와서 그를 데리고 나가라고 한 것이다. 출동한 증원부대는 간수가 잡혀있는 방의 바깥창문을 용접으로 따가지고 간수를 꺼내갔다.

허무한 결말
밖에서 이제 그만두라고 계속 종용 우리는 버텼다. 한 시간만 견지하라던 간수의 말을 듣고 버텼는데, 어느덧 두 시간이 흘렀다. 목이 말라도, 저 새끼들이 약을 탔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안 먹고 투쟁했다. 그렇게 시간이 두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이번에는 이것들이 총을 쏜다고 했다. 우리는 “쏠라면 쏘라”고 하면서 가슴을 내밀었는데, 정말 쏘았다. 앞에 서있던 사람 한 명이 총을 맞고 쓰러졌다. 겁만 주는 줄 알았는데 정말 총을 쏘고, 또 바로 앞에 있던 사람이 쓰러지자 우리 대열은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그 때부터 증원부대는 방패를 들고 문을 까고 들어왔다. 우리도 그대로 당할 수는 없었다. 김치독 깬 것을 내다 뿌리면서 버텼다. 그렇게 저항해도 방패로 막고 있으니 끄떡도 하지 않았다. “물러나라” 하면서 연신 총을 빵빵 쏘며 들어와 사람들을 수그리게 하고 돼지 묶듯 손과 발을 묶어서 한 명씩 데리고 나갔다. 우리의 투쟁은 그렇게 끝났다.

감옥 앞에 나가보니 도문시의 모든 차들은 몽땅 와서 대기하고 있는 듯했다. 모두 승용차였다. 한꺼번에 태우고 않고 나눠서 데려가려고 도문시내에 있는 모든 순찰차를 모아온 것이다. 여자들은 마음이 약해서 전부 울었다. 우린 이제 죽으러 가는구나, 총살 당하러 가는구나 하고 벌벌 떨었다. 나와 다른 여자들을 태운 승용차가 그렇게 출발했다. 나도 무서워서 한참 동안 넋이 나간 듯 했다. 고개를 숙이라는 말에 창 밖을 내다보지도 못했다. 그렇게 차가 달리다가 가만히 창 밖을 내다보니 산으로 가는 길은 아니었다. 우리는 다른 감옥으로 이감되는 중이었다.

다른 감옥으로 옮긴 다음에 남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다. 특히 우리 방의 건너편에 있던, 처음 일을 촉발됐던 방의 남자들은 큰 고초를 당했다. 매일 저녁에 한 명씩 나가서 매를 맞았는데 저녁에 나가면 새벽 여섯 시가 되어서야 들어왔다. 들어올 때는 질질 끌려서 왔다. 출감할 때 보니 그들은 모두 반쪽이 되고 이빨이 제대로 붙어있지 않았다. 그렇게 다친 사람들이 많으니까 군대 트럭에 모두 실어서 조선으로 보냈다. 우리를 보내면서 그 간수들은 마치 우리 생각해주는 것처럼 “중국에서 폭동을 했다고 말하지 말라” 당부했다. 사실 자신들의 입장에서도 이런 사실이 널리 알려지는 것이 좋을 리 없었다.

북한에 들어와 보니 보위부에서 이미 폭동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끝까지 다른 방향으로 잡아뗐다. “그 새끼들이 우리 돈을 뺏으려고 그러니까 우리가 조선으로 넘어가겠다고 했다. 우리를 조선으로 안보내줘서 그렇게 했다”고 말이다. 하지만 보위부는 진상을 거의 알고 있었다. 보위부원들이 우리더러 “머저리 같은 것들이 왜 그 간수놈을 죽이지 살려줬냐”고 오히려 책망했다. 중국과 북한간의 외교관계도 있고, 그때 참여한 사람이 백 명 가까이 되니 우리는 그 문제로 인해 큰 처벌을 받지는 않았다. 그렇게 해서 도문감옥 폭동사건은 막을 내렸다.

싸리나무 한 그루는 꺾기 쉽지만
여기까지가 최순임씨가 이야기한 4·8 도문변방구류소 폭동사건의 전말이다. 중국 감옥의 간수들과 대치하고 있던 때에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사람들이 자주 부르는 ‘싸리나무가(‘싸리나무 한 그루는 꺾기 쉽지만 아름드리 나무는 꺾지 못하리’로 시작하는, 단결과 여성해방에 대한 북한 노래)’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부르면서 버텼다고 한다. 그리고 ‘김일성 장군의 노래’도 불렀다 한다. 그 상황에서 왜 하필 ‘김일성 장군의 노래’를 불렀냐고 물으니 “모두가 아는 노래가 그것밖에 없었다”면서 웃었다. 필자의 머리 속에는 1980년 5월 남한의 광주에서 항쟁이 있던 날에 시민들이 ‘애국가’를 투쟁가요로 부르던 기억이 스쳐갔다. 또 1987년 6월 항쟁의 거리에서 ‘늙은 군인의 노래’를 개사한 ‘투사의 노래’가 불려졌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4·8 투쟁에는 특별한 지휘자도 없었다 한다. 그저 중국 말을 조금 할 줄 아는 사람이 앞장서서 요구사항을 말하고, 그 요구사항도 탈북자들 사이에 특별한 협의 없이 즉흥적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총을 맞고 쓰러진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 투쟁에 참여했던 백 여명이 투쟁의 과정에서 과연 무엇을 느꼈고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지 자못 궁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