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 이야기
돈만 있으면 입당도 한다

중병에 걸려 죽음에 이르자 강을 건넌 자매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만나러 갔다. 25살, 22살의 이 자매는 각각 결핵과 신장계통의 병을 앓고 있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강을 건너자마자 탈북자들을 돕는 NGO 관계자를 만난 이들은, NGO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심한 결핵을 앓고 있던 언니는 이제 상태가 많이 나아졌고, 출산을 앞둔 임산부처럼 배가 나와있었던 동생은 수술을 통해 완치되었지만, 아직도 얼굴에 병색이 어려있었다. 언니의 이름은 진옥, 동생은 진희다.

고향은 어디세요?
진옥 : 『우리 고향은 평안남도 △△△군입니다. 함경북도 온성군으로 이사와 살았습니다.』

온성군에는 언제부터 사셨습니까?
진옥 : 『1985년도에 아버지가 제대되면서부터 입니다.』

아버지가 군사복무를 오래하셨네요.
진옥: 『네. ○○○군단 ×××부장을 했습니다.』

그러면 제대될 때 군사칭호(계급)은 어떻게 되셨나요?
진옥 : 『×××였습니다. (상당히 고위직 군인이었다.)』

언제 중국에 오셨어요?
진희 : 『올해 (2003년) 9월 4일에 들어왔습니다.』

국경을 넘어야 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나요?
진옥 : 『그저…… 살기 힘들어서입니다.』

자매를 만나기 전에 사연을 알고 있었지만 이들은 ‘그저 살기 힘들어서’라고 답변했다. 병력(病歷)을 숨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자매는 지금 NGO의 피난처에서 몸을 회복하는 중이었다.

여기서는 지낼 만 하세요?
진옥 : 『아직 말(중국어)도 모르지……. 기실(사실)은 살기 힘듭니다. 이제 말도 배워야하고…….』

형제는 단 둘인가요?
진옥 : 『오빠와 언니가 있었는데, 언니는 결핵으로 올해 5월에 죽었습니다. 오빠는 군관으로 있습니다.』

요즘 북한에서 사람들 사는 형편은 어떻습니까?
진옥 : 『(예전보다) 더 살기 힘듭니다.』

북한에서 어떤 직장을 다녔습니까?
진옥 : 『농장일을 하다가 몸이 아파서 집에서 누워있었습니다.』

동생은?
진희 : 『4·25 담배농장에서 일했습니다. 거기서 생산한 담배는 다 군대에 보냅니다.』

북한에서 4·25 명칭을 가진 기관, 기업소, 협동농장, 체육 및 예술단체 등은 인민군 직속 및 산하 기관이다. 4월 25일은 북한의 건군절(建軍節)이다. 원래 북한의 인민군 창건기념일은 2월 8일(1948년 2월8일)이었는데 김일성이 중국 길림성 안도현에서 반일유격대를 최초로 결성한 날이라는 4월 25일(1932년 4월 25일)로 변경시켰다.

요새 농사는 잘 됩니까?
진희 : 『해마다 점점 안됩니다. 그러니까 일하러 나오는 농장원들도 없고, 해마다 강냉이 농사도 안되고, 조금 농사가 되면 작업반에 바치고, 분장에도 바치고, 여기 저기 바치다 보니 농장원들 한테 실지 돌아가는 분배량이 없단 말입니다.』

농장원들은 몇 명이나 일하러 나오나요?
진희 : 『그저……, 가을이 되면서부터는 거의 나오다시피 하다가, 봄에는 한 절반 정도……, 그 아랩니다.』

안 나오는 사람들은 뭘 하는 겁니까?
진희 : 『식량이 바쁘다고(없다고) 장사도하고…….』
진옥 : 『산을 뒤져서 개인농사를 짓습니다.』

살던 곳은 시골이지요?
진희 : 『예.』

그러면 도시가 살기 바쁩니까, 아니면 시골이 더 살기 바쁩니까?
진희 : 『지금은 시골 쪽이 더 힘듭니다. 땔나무라도 흔해야 하겠는데 지금은 산을 모두 벗겨 밭을 일궈서 땔나무가 없지, 그렇다고 시내처럼 돈을 벌기도 어렵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히려 시내 쪽이 낫단 말입니다.』

1996, 1997년 경에는 도시사람들이 더 살기 힘들었다고 하던데요?
진희 : 『그 때는 시내 사람들이 농촌에 와서 산에 집(움막)을 짓고 막 살았습니다. 지금은 농촌 사람들이 시내로 나가려고 합니다.』

한해 담배농사를 어떻게 하는지 이야기해 주십시오.
진희 : 『일 시작하는 것은 3월 5일경부터 담배 씨를 뿌린단 말입니다. 온실을 만들어 놓고 말입니다.』
진옥 : 『2월부터 온실을 만듭니다. 그리고 3월 8일경에 온실에 씨를 뿌려서 모를 키웁니다. 온실 모를 단련시키려고(적응시키려고) 밖에 내다 모판을 만들고 비닐박막을 씌워서 키우다가, 5월 초에 밭에 내다 옮깁니다. 그리고 7월 달부터 담배 잎을 따 건조시킵니다. 그렇게 말려서 담배공장에 보냅니다.』

그러면 8월경이나 농사가 끝나겠네요?
진옥 : 『아닙니다. 담배 잎은 밑에서부터 크는 족족 뜯어말리기 때문에 10월 말경에나 끝납니다.』

겨울에는 뭘 하는데요?
진옥 : 『겨울에는 건조해 놓은 담배 잎을 포장해서 공장에 보내는 일을 합니다.』
진희 : 『공장은 회령에 따로 있습니다.』

북한에서는 1990년 초 함경북도 회령, 온성, 새별 지구의 일부 농장들을 담배농장으로 전환시키고 담배 잎을 생산하여 회령담배공장으로 보내도록 했다. 회령담배공장은 원래 ‘해당화’표 담배를 생산하는 정무원 산하 기업소였는데, 이시기 인민무력부 직속 4·25담배공장으로 전환시키면서 ‘백승’표 담배를 생산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담배농장은 회령 창평리 담배농장이다. 이곳은 원래 정치범 수용소였다. 그런데 1992년에 정치범수용소를 다른 곳으로 이동시겼다. 여기에 제대군인들을 대거 집단 배치하여 담배농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정치범수용소가 있던 당시 주변의 주민들은 창평리를 회령시 창평리라고 부르는 주민들도 있고 온성군 창평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수용소가 있으므로 관할 구역이 불투명했던 것이다.)

담배를 수출도 하나요?
진옥 : 『질이 너무 낮아서 수출할 형편은 못됩니다.』

전체 농장원들은 몇 명이나 됐습니까?
진옥 : 『거기에 6개 분장이 있습니다. 한 개 분장에 7~ 8천명됩니다.』

한 개 분장에 농장원이 그렇게 많아요?
진옥 : 『제대군인들을 모두 넣었단 말입니다. 거기는 1992년에 새로 생겼습니다. 원래는 거기가 관리소(정치범 수용소)였답니다.』

거기가 관리소(정치범 수용소)였단 말이에요?
진옥 : 『예, 창평리라고…….』

여기서 회령정치범수용소(22호 관리소)에 수감되었던 정치범들의 숫자를 대략적으로 추산해 낼 수 있다. 이곳에서 노역을 당하던 정치범들을 다른 곳으로 이동시키고 그 노동력과 면적의 비율 대로 주민들을 배치시켰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한 개 분장에 농장원이 7~ 8천명이고 6개 분장이 있다니, 예전에 이곳에 있던 정치범들은 4만 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산된다.

농장일은 몇 년 정도 하셨어요?
진옥 : 『2년 정도하고 아파서 집에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군인이셨으면 이사를 많이 했을 텐데요?
진옥 : 『원래 평안남도 △△△에 살다가 ××로 이사했습니다. 거기서 중학교 5학년까지 다니고 온성에 와서 6학년 졸업했습니다. 아버지가 옮기면서 우리 가정도 따라 옮겼습니다.』

북한에서 1995년, 1996년도가 제일 어려웠다고 하는데 그 때는 어떻게 사셨어요?
진옥: 『우리는 1993년도 8월에 온성에 왔는데 그때부터 조금씩 배급을 안 줍디다. 그러다 1995년도부터 아예 안 줍디다. 배급이라는 걸 본적이 오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셨어요?
진옥 : 『그저 풀 뜯어먹고 살았습니다. 농장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농사일을 했습니다.』

집에서 어떤 농사일을 하셨는데요?
진옥 : 『그저 소토지를 하고, 산에다 땅을 일궈 가지고 농사를 했습니다.』

주로 어떤 것들을 심었습니까?
진옥 : 강냉이, 콩 여러 가지 작물을 다 심었습니다.』

소토지 크기는 몇 평정도 이었어요?
진옥 : 『2천 5백 평이었습니다. (북한에서 1평은 대략 1.8m×1.8m이다.) 얼마만한 면적이냐면, 3천 평이 1정보인데 그것에 좀 모자랍니다.』

소토지도 일구고 했으면 살만했겠네요?
진옥 : 『우린 1993년도에 이사 와서 처음에는 농사라는 것도 모르고 하니 가산(家産)을 다 팔아먹으면서 한해 지나면 일없겠지(배급을 주겠지), 또 다음해 지나면 일없겠지 하고 미련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점점 갈수록 더 하더란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선 안되겠다 하고 1997년도부터 소토지를 시작했습니다. 산에 나무가 꽉 들어찬걸 베어내 태우고 검줄해서(걷어내서) 밭을 일궜습니다. 온 가족이 달라붙어서 일했습니다.』

원래 양강도와 함경북도 온성군 일대는 일제시기부터 화전농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래서인지 이 일대의 주민들은 1990년대 이전에도 화전을 일궈 소토지를 많이 했다. 물론 정부기관에서 통제를 심하게 하지만 워낙 깊은 시골이라 여기까지는 치밀한 통제가 미치지 못했다.

가산을 팔며 살았다고 했는데 뭘 팔았어요?
진옥 : 『색텔레비(컬러텔레비젼), 냉동기, 마손(재봉틀), 심지어 보온병까지 다 팔았습니다.』

소토지 수확기가 되면 누가 훔쳐가지 않나요?
진옥 : 『누가 도둑질해 갈까봐 산에 올라가서 움막을 짓고 경비를 서면서 살아야 된단 말입니다.』

온 식구가 산에 올라가서 지키나요?
진옥 : 『밤에는 아버지가 올라가 있고 낮에는 우리가 올라가 지킵니다.』

그래도 도둑들에게 당할 수 있지 않나요?
진옥 : 『그 주변에 다른 사람들의 소토지도 모두 그렇게 지키고 있으니까……. 그런데 작년 가을에 강냉이를 말리다가 한 달구지 정도 도둑 맞았습니다.』

살았던 마을에는 몇 가구나 있었어요?
진옥 : 『한 300세대쯤 됩니다.』

300세대가 다 소토지를 그렇게 가지고 있나요?
진옥 : 『다 그렇지는 않고, 장사로 사는 집도 있고……. 80∼90%는 그렇게 소토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물의 종자는 어디서 구입하나요?
진옥 : 『장마당에서 사옵니다. 삼봉이라는 데서 채종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삼봉’은 온성군 삼봉노동자구를 말한다. 북한에서는 각 시, 군마다 한 개 농장씩을 채종(採種)농장으로 선정하고 강냉이를 비롯한 무, 배추의 종자들을 생산하여 각 협동농장들에 나눠주고 있다. 이런 채종농장에서 생산된 종자들이 장마당에 흘러 들어가 판매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비료는 어떻게 구입하세요?
진옥 : 『비료도 사서 쓰는데, 농장에 들어오는 걸 관리일꾼(농장 간부)들이 빼내서 판단 말입니다. 그걸 사서 씁니다. 하지만 비료값이 너무 비싸서 사서 쓰지 못하고 대부분 인분을 씁니다.』

거기서 수확을 하면 식구들이 1년 동안 먹고 살수 있나요?
진옥 : 『반년 식량밖에 안 된단 말입니다.』

나머지 부족한 것은 어떻게 해결하나요?
진옥 : 『그저 있는 걸 가지고 조금씩 조절하며 먹어야 합니다. 우리 식구는 5명이었는데 살기 바쁩니다. 거기다가 가을에 빚을 물어야 한단 말입니다. 여름에 돼지고기도 좀 먹어야지……. 그 값은 가을에 강냉이로 물어야 한단 말입니다. 돼지고기 1kg 먹으면 가을에 10kg 강냉이를 물어야 한단 말입니다. 또 식량이 모자라면 잘사는 집에 가서 가을에 2배로 주기로 하고 꿔먹는단 말입니다. 그래서 가을에 다 물어주면 남는 게 별로 없습니다.』

잘 사는 집은 식량이 남을 정도로 가지고 있나요?
진옥 : 『그런 것도 하지 못하게 하니까 딱 줄만한 집(신용이 있는 집)만 준단 말입니다.』

300가구 중에 그렇게 다른 집에 식량을 꿔 줄 수 있을 정도로 잘사는 집이 몇 집이나 됐습니까?
진옥 : 『그런 것도 다 가만가만(몰래)하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비사(비사회주의 그루빠)라는게 있어서 그런 것들을 거기서 취급한단 말입니다.』

소토지에서 농작물을 수확하면 어떻게 처리합니까?
진옥 : 『집에 가져다가 손으로 까서, 온돌에 말립니다. 저장했다가 먹을 것은 먹고, 어느 정도는 내다 팝니다.』

어디에 파는데요?
진옥 : 『청진이나 도시에서 공업품 장사꾼들이 온단 말입니다. 그러면 곡식하고 바꿉니다.』

공업품 장사꾼들은 주로 어떤 것을 가지고 다니나요?
진옥 : 『필요한 것을 이야기하면 다음에 올 때 가져오는 식입니다.』

1990년대 중반에 사람들이 많이 굶어 죽을 때 그 동네에서도 굶어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까?
진옥 : 『예. 우리 동네에서는 세 집이 온 식구가 굶어 죽었습니다. 우리 동네는 보위부에서 제대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어서 상황이 나은 편이었는데, 우리 윗동네에는 절반 정도의 집이 비여 있었습니다.』

이번에 국경을 넘을 때는 어떻게 해서 넘었습니까?
진옥 : 『경비대하고 짜고(약속하고) 돈 주고 넘었습니다.』

얼마 정도 주었어요?
진옥 : 『한 사람당 200원(중국 인민폐)씩 주기로 하고 건넜습니다.』

올해 8월에 선거를 했는데 선거를 하고 오셨어요?
진옥 : 『예. 선거는 하나 마나 한 것인데, 조사를 하기 때문에 합니다.』

중국에 오니까 어떤 느낌이 드세요?
진희 : 『크게(많이) 돌아 다녀보지는 못해서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만나는 사람들이 참 인정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거기(북한)서는 남을 돌본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내가 여름에 농사를 짓다가 겨울에는 바람도 쏘일 겸 회령에 있는 고모 집에 갔었단 말입니다. 역전에 가면 맨 꽃제비들이고 또 저녁이면 꽃제비들이 역전에 와서 자는데 안내원(열차 안내원)들이 꽃제비들을 쫓아낸단 말입니다. 그걸 보게 되면 인정이라는 건 찾아 볼 수도 없는데 여기 와서 보니까 거기(북한)에 비해서 인정이 많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최근에 기차는 몇 번이나 타보았습니까?
진희 : 『회령까지 타 보았습니다. 너무도 복잡해서……. 역전마다 2∼3분 정도 서는데 그 어간에 열차에 오르지 못한단 말입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빼곡한지 기차에 오를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이 너무 많으니까 돈을 주고 육로로 다니는 차를 타려고 합니다. 나도 작년부터는 돈을 주고 자동차를 타고 다녔습니다.』

최근에는 기차사정이 많이 나아졌다고 하던데요?
진희 : 『야……!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좌석번호제가 나오면서 일반사람이 타려고 해도 못 탄단 말입니다. 기차라는 게 그게(통행증, 기차표, 좌석번호) 다 있어야 탑니다. 그래서 기차를 타는 사람들은 몇 명 안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승무 안전원들은 (뇌물을) 먹어야 기차를 타지 못타겠다고 한단 말입니다. 단속자들이 있어야 먹을 게 있겠는데 단속자들이 없으니까 먹지를 못한다는 겁니다. 벌금도 받을 데가 없으니 승무 안전원들이 기차를 못 타겠다(근무를 못하겠다)고 한단 말입니다.』

온성에는 하루에 기차가 몇 번 다녀요?
진희 : 『평양-온성 하나 다니는데, 3일에 한번씩 다닐 때도 있고, 어떤 때는 일주일에 한번 들어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유리를 깨고 기차를 올라타는 바람에 기차에 유리가 온통 없었는데 그것은 다 끼워 넣었습니까?
진희 : 『사람들이 기차에 오를 때 승강대로 오르지 못하고 유리가 없는 창문으로 오른단 말입니다. 또 유리가 있어도 창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창문유리를 다 깨버린단 말입니다. 그래서 창문마다 비닐 박막을 댔단 말입니다.』

기차를 타지 못하니까 자동차를 탄다고 했는데, 온성에서 회령까지 가는데 얼마 정도의 돈을 내야 하나요?
진희 : 『2시간 정도 가는데 300원씩 내야 합니다.』

기차로 가면 얼만데요?
진희 : 『우리 같은 사람들은 통행증이 없어서 기차표를 사지도 못한단 말입니다. 통행증 없이 기차에 올랐다가는 단속되는데, 단속되면 200원 정도 벌금을 낸단 말입니다. 안전원들한테 단속돼서 끌려 다니다 보면 시끄럽단 말입니다. 속 편하게 가자면 돈을 좀 더 주고서라도 자동차를 타는 편이 더 낮단 말입니다.』

차를 타면 검사 같은 건 하지 않나요?
진희 : 『초소가 있습니다. 종성에 하나 있고 회령 쪽에 하나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온성군에 갈 때는 공민증만 있으면 되는데 다른 군이나 시를 갈 때는 통행증이 있어야 한단 말입니다. 사실은 그게 꼭 필요는 없는데 거기(초소)에서 건덕지(건수)를 잡아서 뭘 좀 먹자니까 그렇게 한단 말입니다.』

그러면 초소를 통과 할 때마다 뭘 좀 줘야 하나요?
진희 : 『초소를 통과 할 때는 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은 몽땅 내려서 한 사람씩 공민증, 통행증 검사하고 통과시킵니다. 단속된 사람들은 뭘 주고 통과합니다.』

담배를 뇌물로 준다고 하면, 요즘에는 어떤 담배를 주죠?
진희 : 『우리는 라진에서 생산했다는 ‘타도’ 같은 것을 줬습니다. 중국 담배는 엄청 비싸서 살 수가 없습니다.』

최근에 장마당에 나가서 물건을 사보았습니까?
진희: 『물건값이 너무 엄청나게 뛰어 올라서 못살겠다고들 합니다. 우리가 (중국에) 오기 전에 장마당에 나가서 신발이나 옷, 이런 사소한 것들을 샀습니다. 지금 중국에서 넘어 온 신발은 500원, 700원씩, 맛내기(조미료)는 하나에 150원하던 게 600원 800원씩으로 올랐습니다. 쌀은 우리가 오기 전에 180원, 200원 씩 했습니다. 강냉이는 한 킬로에 100원 이었습니다. 계란은 한 알에 30원씩 합니다. 돼지고기는 한 킬로에 400원∼500원입니다.』

최근에 살기가 더 바빠졌다고 하는데 왜 그런 거죠?
진희 : 『농사가 안되니까 그렇지요. 시내에서는 농촌 소토지에서 수확한 것들을 사다 먹고 살았는데 올해에는 미내(완전히) 농사가 망했단 말입니다.』

농사가 안 된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진희 : 『기후 조건도 그렇고…… 올해 많이 가물었단 말입니다.』

노임(임금)이 많이 올랐다고 하는데 아버지는 노임을 타셨어요?
진옥: 『노임을 타본 지가 오랬습니다. 작년(2002년) 7월 1일에 노임제도가 바뀌었는데, 그것이 명색뿐이지 7월, 8월 달에만 타보았습니다.』

얼마나 탔어요?
진옥 : 『아버지는 2천 300원인데, 거기서 제하는 게 많으니까…….』

얼마나 제하는데요?
진옥 : 『인체보험, 그리고 매 명절 때마다 추첨을 하는데(복권 형태의 추점) 그것도 무조건 다 제해야 한단 말입니다. 어떤 땐 1천 500원 정도 제하고, 또 직장에서 별도로 내는 게 있습니다.』

올해 북한 당국에서는 공채를 발행했는데 그건 샀습니까?
진희 : 『매 세대 당 무조건 천원씩 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못 냈습니다.』

공채를 못 내면 어떻게 되나요?
진옥 : 『우리 집은 우리 오빠네하고 같이 있으니까, 오빠네가 냈습니다.』

공채를 내는데 대하여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어요?
진옥 : 『그저 살기 힘드니까 불평을 부리는 집도 있고, 못 내는 집도 있고…….』

수도세와 전기세를 낸다고 하던데 그건 냈습니까?
진옥 : 『우리가 살던 데는 수도가 없고, 자연수도(펌프)를 놓았기 때문에 수도세는 안냈습니다. 전기세는 전기등 한 개에 10원씩입니다. 전기는 겨울에는 잘 오지 않는데 여름에는 조금 낫습니다.』

집에 가전제품은 어떤 것들이 있었습니까?
진옥 : 『텔레비전 한 대 있었습니다.』

텔레비전은 자주 봤습니까?
진옥 : 『재미가 없으니까 연변방송을 본단 말입니다.』

연변방송은 몰래 보겠네요?
진옥 : 『예. 몰래 봅니다. 밤에 문 걸어놓고 가만히 봅니다.』

연변방송을 보는 건 사람들은 뻔히 알겠네요?
진옥 : 『다 보면서도 아닌 체 합니다. 서로가 내심에 있는 말을 못한단 말입니다.』

연변방송을 본 것 중에 기억나는 게 있으세요?
진옥 : 『경찰특공대 라든지…….』

연변방송을 보면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를 대충 알 수 있나요?
진옥 : 『어쨌든 말을 못하니까 알아도 자기만 알고 있지 다른 사람에게는 말을 못합니다.』

탈북자 가운데 상당수가 회령, 온성, 무산 출신인 이유는 강을 넘기 쉬운 탓도 있지만 중국 방송을 통해 외부의 정보를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취재과정에서 평양출신의 한 아주머니를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탈북을 위해 온성에 왔다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친척집 몇 군데를 돌아다니면서 묵었는데 가는 집마다 밤에는 연변 텔레비전 방송을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나는 탈북자들에게 도대체 몇 집이나 연변 방송을 보느냐고 물으면 “안보는 집이 없을 정도”라도 답한다. “보위부원도 집에서 몰래 보고 있을 것”이라고 말한 탈북자도 있었다. 연변방송에서 한국 드라마를 방영하기도 하는데 그래서 한국의 생활상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탈북자는 특정 드라마의 이름을 이야기하며 “결말이 어떻게 됐는지 못보고 탈북했는데 마지막에 어떻게 끝나는가” 하고 묻기도 했다. 단속이 심하지만 요새는 하도 많은 집에서 연변방송을 보다 보니 단속을 포기한 것 같다고 말한 탈북자도 있었고, 연변 텔레비전을 못 보게 하려고 밤에 전기를 안주는 것 같다고 말한 탈북자도 있었다. 아무튼 회령, 온성, 무산 등지는 북한에서도 사람들의 의식이 가장 깨어있는 별천지라 할 수 있다.

집에 짐승을 기르지는 않았습니까?
진옥 : 『돼지 키우고, 개도 키웠습니다.』

그걸 길러서 어떻게 합니까?
진옥 : 『잡아서 고기를 팝니다. 또 강냉이하고 교환하기도 합니다.』

개도 고기로 파나요?
진옥 : 『개는 통째로 팝니다.』

개 한 마리에 얼마쯤 합니까?
진옥 : 『3천 5백 원부터 만원 이상 합니다. 그런데 지금 개를 못 기릅니다. 쥐가 많아서 집집마다 쥐약을 놓았는데, 개가 그 쥐약을 먹고 죽어 버리기 때문에 우리 마을에서도 이젠 개를 보기 힘듭니다.』

염소 키우는 집은 있습니까?
진옥 : 『우리도 5마리 키웠습니다. 그런데 염소를 기르기가 너무 힘들단 말입니다. 산은 모두 밭이 되어서 어디에 맬 데가 없단 말입니다. 산에는 염소를 매놓을 나무도 없고 풀도 없습니다.』

북한에서 공개 총살하는 걸 본적 있어요?
진옥 : 『예. 1996년도에. 여자였는데 무슨 문건을 가지고 중국에 가서 팔았답디다. 자세한 건 잘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기 어려워지면 그 무엇을 탓하는 경우가 있는데 거기(북한)에서는 무엇을 탓하나요?
진희 : 『공식적으로는 미국놈들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쨌든 영화(북한 당국에서 제작한 선전 영화)랑 나오고 하면 다 거짓말만 한다고 합니다.』

요즘에도 강연을 비롯한 학습을 많이 시킵니까?
진희 : 『요즘에는 그 전보다 그렇게 많이는 안 합니다. 우리는 사로청에서 학습을 합니다.』

300세대 중에 당원 비율은 어느 정도 되나요?
진희 : 『우리 동네는 제대군인이 많아서 거의 절반 이상이 당원입니다.』

요즘에 입당은 어떻게 하나요?
진희 : 『돈만 내면 한답디다.』

어느 정도 돈을 내야 하는데요?
진희 : 『군대에서 입당하자면 집에서 텔레비전도 가져가야 되지, 돈도 가져 가야 된다고 합디다.』

누구한테 가져가야 하나요?
진희 : 『정치지도원이랑 간부들한테 가져가야 한다고 합디다.』

요즘 군사복무 연한이 줄어들었지요?
진희 : 『5년이라고 합디다. 하지만 군대에 서로 안 가려고 합니다. 거기 가면 허약(영양실조)에 걸리겠는데 가겠습니까.』

군대는 그래도 좀 먹지 않나요?
진희 : 『사회랑 같습니다. 군대도 도둑질해먹고 그래야 삽니다.』

예전에 군인들이 민간인들에게 도둑질도 하고 뺏어먹고 그랬는데 지금도 그렇습니까?
진희 : 『지금도 그렇습니다. 군대만 가면 ‘범의 가죽을 썼다’고 한단 말입니다.』

병에 걸려서 치료를 받았다고 알고 있는데, 지금 치료는 병원에 가서 하나요?
진옥: 『집에서 합니다. 의사가 와서 주사를 놓고 약도 줍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는 질문에 자매는 “병이 다 나으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면서 함께 동행했던 NGO 관계자와 대북의료지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앞서 이야기를 나눈 자매 중 언니 진옥씨는 결핵에 걸려있었다. 이 결핵에 대처하기가 애매하다고 NGO 관계자는 말했다. 결핵약을 북한에 보내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안 보내줄 수도 없다는 말이다. 왜 그런가 하고 물어보니, 결핵은 꾸준한 치료가 필요한데 약을 대강 주면 오히려 보균자만 확산시킨다는 것이다. 결핵의 치료법은 우선 환자를 격리시키는 것인데 이러한 의료시설이 북한에 턱없이 부족하고, 또 현재 북한에 결핵환자가 어느 정도 되는지 집중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시급한데 북한 당국이 접근을 허락치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현재로서는, 잔인한 이야기이지만, 북한에 결핵약을 전혀 주지 않아 병세가 심한 환자들이 다 죽어야 차라리 그것이 전염을 막는 길이 될 것이라고 말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인민의 목숨을 구하는 것 보다 북한의 실상이 외부에 알려지는 것을 막는 것에 급급한 북한 정권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튼 대화를 나눈 자매는 죽기 직전에 NGO 관계자를 만나 목숨을 건졌다. 목숨을 하나 새로 얻은 것이다. 우리에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현재 중국에는 조용히 이러한 인도지원 활동을 하는 NGO가 몇 개 있다. 이들의 도움으로 치료를 받고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거나 중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이 꽤나 많다. 먼 훗날 북한의 문이 열렸을 때, 그들의 선행을 세상에 널리 알리리라 생각하며 펜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