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장
김정일은 핵을 포기할 의사가 없다

1. ‘이상한 전제’에 대해

북핵문제에 접근할 때 아주 빈번하게 발생하는 착오가 하나 존재한다. 북한은 어떤 조건만 충족되면 핵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전제이다. 이런 맥락에서 미국 등이 북한이 핵을 포기해도 될 만한 대가나 조건을 제시하고 만드는 것이야말로 북핵 해법의 대부분을 차지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들은 북핵문제를 핵을 포기할 준비가 항상적으로 되어 있는 북한과 이를 유도해 나갈 몇 개의 나라들 또는 국제사회간의 결과가 뻔한 비교적 쉬운 게임으로 간주한다.

여기서 근본적인 하나의 의문이 제기된다. 도대체 북한이 핵보유나 개발을 포기할 것이라는 전제는 어떤 근거로 나오게 되었는가 하는 의문이다. 그러나 이런 전제하에 나온 무수히 많은 주장들을 뒤져보아도 이 의문은 쉽게 풀리지 않게 된다. 뚜렷한 근거가 인정될 만한 주장들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들은 대체로 북한이 어느 정도의 대가를 받고 핵을 포기하는 것이 그들에게 이롭기 때문에 당연히 그렇게 할 것이라고 추측을 할 뿐이다. 여기에는 북한정권이 합리적 선택을 할 것이라는 상당한 '주관적 기대'도 담겨 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넘겨짚기'나 '일방통행'의 오류를 범할 가능성에 항상 노출된다. 많은 사람들은 지난 90년대의 제네바 합의를 북핵포기의 가능성을 높게 보는 경험적 사례로 보고 있다. 그러나 제네바 합의에서 북한은 결코 핵을 포기한 적이 없다. 다 알다시피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핵폐기나 포기가 아닌 '핵동결'과 '경수로 지원'이라는 대가의 교환이었다. 이때 제네바 합의 이전에 북한이 가동한 원자로에서 발생한 '사용 후 핵연료'를 재처리하여 플루토늄을 얼마나 추출했으며, 또한 얼마나 사라졌는지(핵무기 제조에 쓰였는지)에 대해 규명하는 과제는 '경수로의 핵심부품이 들어오기 전'에 특별사찰을 한다는 식으로 사실상 덮고 넘어간 것이다. 당시 북핵폐기의 가장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판도라의 상자(과거 핵활동)'를 덮고 넘어간 것이야말로 북한에게는 핵포기 없는 협상타결이라는 큰 선물이었다.

2. 북한 핵포기 징후 없어

2003년내에 열릴 것으로 기대되었던 2차 6자회담은 해를 넘길 것이 거의 분명해지고 있다. 최근 일종의 예비논의에서 북한과 미국의 입장이 평행선을 긋고 있기 때문이다. 언론보도에 의하면 북한이 핵 동결을 전제로 2차 6자회담에서 미국의 에너지 지원과 제재 중단에 대한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등의 입장을 밝힌 데 대해 미국이 이를 거부한 것이다. 북한은 12월 9일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미국이 일괄타결안을 한꺼번에 받아들일 수 없다면 최소한 차기 6자회담에서 '말 대(對) 말'의 공약과 함께 첫 단계 행동조치라도 합의되어야 한다"면서 "그런 (첫단계)조치로 우리가 핵 활동을 동결하는 대신 미국에 의한 '테러지원국 명단'해제, 정치·경제·군사적 제재와 봉쇄 철회, 미국과 주변국에 의한 중유·전력 등 에너지 지원과 같은 대응조치가 취해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부시대통령은 백악관에서 원자바오 중국 총리와 회담을 한 뒤 "미국의 목표는 북핵 프로그램의 동결이 아니라 '입증할 수 있고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폐기하는 것"이라며 "그것이 우리가 북한에 보내는 분명한 메시지"라고 말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대목은 북한의 제안내용이다.

핵포기의 선언(말)만으로 대북안전보장을 해주고 우선 핵동결만 하면 상당한 대가를 달라는 것이다. 이 제안을 액면 그대로 보면 과연 핵을 포기할 것인지 여부에 대해서는 뚜렷한 담보가 없다. 핵포기의 핵심은 말이 아니라 사찰과 검증에 따른 핵시설과 무기의 폐기이다. 북한이 하나의 상식에 해당하는 이런 내용을 모르고 위의 제안을 할 리가 없다는 점에서 북한의 의도는 대가만 받고 핵포기는 적당히 뭉개려한다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6자회담 참가국들은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대북안전보장을 해줄 것을 합의하였고, 또한 부시대통령은 '대담한 접근'이라고 칭한 프로그램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대북지원을 약속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미국이 결코 받을 리가 없는 핵포기라는 알맹이가 빠진 일방적 제안만을 하고 있는 것을 단순히 더 많은 대가를 얻기 위한 협상전술로만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오히려 어떻게든 핵보유국으로 인정(일종의 방치)받거나 아니면 핵동결 수준에서 대가만을 챙기는 매우 큰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 순리적이다.

3. 황장엽 前비서의 결정적 증언

이른바 2차 북핵사태가 벌어진 계기는 널리 알려졌듯이 지난해 10월 켈리 미국무부 차관보가 방북했을 때 북한의 농축우라늄(HEU) 핵개발 추진의 시인이었다. 켈리 차관보의 추궁에 대해 북한이 처음에 부인하다가 갑자기 시인으로 선회한 배경에 대해서는 그 동안 여러 가지 추측이 있어왔다. 김정일 위원장의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판단 착오라는 분석도 있었고, 부시행정부의 대북 강경책에 대한 대응이라는 상황론적 해석도 나왔으며, 일각에서는 미국의 모략극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에 방미 과정에서 황장엽 前노동당 비서가 이와 관련한 결정적 증언을 하였다. 노동당 국제비서의 자격으로 외교부장, 대남비서와 함께 핵개발의 대외담당을 했던 황전비서는 지난 '10월사건'은 이미 오래전에 준비된 시나리오에 따른 것이라는 증언을 한 것이다. 월간조선 2003년 12월호에 따르면 황전비서는 미국무부 관계자들과의 대화에서 북한의 핵전략을 파악할 수 있는 몇 가지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고 한다. 황전비서에 따르면 시나리오의 발단은 1994년 제네바 합의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황전비서 등이 참여한 회의에서 당시 전병호 당군수공업비서는 '제네바 협상에 따르면 5~6년후에는 사찰을 받아야 하는데 대책이 없다'고 하자 김정일은 '5년후에 (핵무기 보유사실을 )선포하고 (미국과)대결할 수 밖에 없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또한 김정일은 'NPT(핵확산방지조약)에 괜히 들어갔다. 사찰을 공연히 하겠다고 했다'고 후회했다고 한다. 어차피 사찰을 통해 핵개발 사실이 밝혀질 거라면 미리 공개하고 치고 나가자는 선택을 이미 5년전에 해둔 것이다.

사실 우라늄농축 핵개발이 쟁점이 되기 이전에 특별사찰을 둘러싼 논란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대해 북한은 그 시기를 몇 년뒤로 미루자는 등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사실상 거부하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이 미국측에 들키게 되자 김정일정권은 계획된 대로 '울려고 하는데 빰 때려준다'는 속담처럼 다시 '벼량끝 전술'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나리오대로 하자면 북한은 결코 핵포기 의사가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핵보유국으로 인정(방치)받거나 아니면 핵을 포기하는 척해서 대가만 챙기고 나중에 다시 뒤집는 두가지 중의 하나를 현실적 목표로 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북한의 이런 전략은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다. 이미 지난 90년대의 북미제네바 협상에서 후자의 전략을 이미 써먹었다고 할 수 있다. 지금 달라진 것이 있다면 당시와는 달리 핵보유를 공개했다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북한에게 안전보장이나 경제지원 등의 대가를 주면 핵을 포기할 것이며, 심지어 북한의 핵카드는 대가를 얻기 위한 일종의 핵개발 '시늉'에 불과하다는 식의 주장은 전면적으로 재검토해야만 한다.

4. 향후 전망

김정일은 미국이 이라크에 집중하고 있고 또한 대선정국에 접어들어 있는 만큼 북한의 핵개발에 대해 당장 어떤 제재를 가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기존의 핵보유전략을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핵보유전략은 김정일이 매우 오랫동안 가장 강력한 생존수단으로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미국 등의 웬만한 압력으로 이를 철회시킬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단순한 발상이다. 한편 미국이 선(先)핵포기(이때의 핵포기란 단순한 선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사찰 및 폐기의 대상과 계획 등이 구체화되는 것을 말한다.)정책을 수정할 의사가 없기 때문에, 북한은 선택의 폭이 그렇게 넓지가 않다. 즉 지금처럼 핵포기 선언만으로 대가를 달라고 하는 일종의 사기전술을 쓰거나, 아니면 핵을 포기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협상을 깨고 핵실험 등 강공을 하는 외에 다른 선택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6자회담은 상당기간 표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때 미국과 북한 양자를 설득하여 6자회담이라는 틀을 만들어 낸 중국의 행보가 주목된다. 협상의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면 중국은 상당히 난감한 처지에 빠지게 된다. 중국측의 대북 영향력도 제한적이기 때문에 중국도 결국 두손을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선 예상가능한 시나리오는 북핵문제를 UN안보리로 가져가는 것이다. UN안보리에서는 경고나 결의안 채택 등이 가능할텐데 여하튼 이런 단계를 밟아 나가는데도 꽤 시간을 끌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핵실험이나 미사일발사와 같은 추가적인 강공을 취하지 않는다면, 미국 또한 북핵문제를 급하게 다룰 생각이 없기 때문에 내년 한해는 UN안보리에서 현안주제로 다루어지는 정도가 예상된다. 결국 미국대선 이후에야 북핵문제는 본격적으로 취급될 것으로 관측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