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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 수용소

정치범수용소란 무엇인가?
북한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치 않고 있는 정치범수용소는 그러나 일반주민들 사이에선 완전독재대상구역이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 당국에선 14호 관리소, 15호 관리소 등00호 관리소라 부르며 국가보위부에서 담당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수용소라 하면 감옥을 생각하기 쉽지만 완전독재대상구역이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적인 감옥과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통상 정치범수용소는 깊은 산 속에 있는 마을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런 마을들을 포함한 광활한 지역을 완전독재대상구역으로 설정해 놓고 그 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삼엄한 경비를 서는 것이 보통이다. 그래서 겉에서만 본다면 그곳이 수용소인지 알 수가 없다. 강철환, 안혁씨가 있었던 15호 관리소는 함경남도 요덕군 전체 면적의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요덕수용소라고 불리기도 한다. 정치범수용소의 마을들은 각각 나뉘어져 있다. 북한에서는 연좌제를 실시하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당사자만 끌려가는 경우도 있지만 상당수는 그 일가족까지 수용된다. 그래서 한 마을에서도 독신자구역과 가족세대는 나뉘어져 있다. 또 재일동포들을 모아 한 마을을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정치범수용소는 북한 전역에 퍼져 있는데 현재 위치가 확인된 곳만도 평안남도에 개천(14호, 18호), 동신, 평양승호구역(26호, 90년 1월 이동)이 있고, 함경남도에 요덕(15호), 평안북도에 천마(27호, 90년 11월 이동), 함경북도에 온성(12호, 87년 5월 이동), 종성(13호, 90년 12월 이동), 회령(22호), 청진(22호), 경성(11호, 89년 10월 이동), 화성(16호)구역이 있다. 북한 당국은 정치범수용소의 위치가 외부에 알려지면 그곳을 폐쇄하고 위치를 이동하기 때문에 이들 중 상당수가 위치를 이동했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알려진 것만 12개 수용소에 20여만 명 이상이 수감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일반 범죄와 다르게 일단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면 언제 나올지 알 수가 없다. 일반 범죄도 억울한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몇 년형 선고라도 받아 언젠가는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데 정치범수용소에서는 수용기간이 없기 때문에 노예처럼 죽도록 일만 하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감해야 한다.
정치범수용소는 크게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나뉘어져 있다.

혁명화구역은 비교적 가벼운 죄를 지은(대부분 말도 안 되는 것인데) 사람들과 그 가족들이 수용되는 곳으로 이 중의 일부는 다시 사회로 나오기도 한다. 요덕수용소의 경우 재일동포가 상당수 있는데 재일동포의 경우 북한 사회에 적응을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 필요성이 떨어지면 별다른 죄도 없이 끌려오는 경우가 많다. 이들 중에는 일본의 친척들의 송금액에 따라 사회에 나오기도 하고 혹은 권력중심부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도 김정일의 필요에 따라 정치범수용소에 보냈다가 어느 정도 교육이 되었다고 생각되면 사회로 내보내기도 한다. 강철환씨와 안혁씨의 경우가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었다가 다시 사회로 나온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경우도 그 전체 숫자와 비교하면 아주 적은 경우이고 대부분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혁명화구역에서도 완전통제구역으로 다시 끌려가기도 하는데, 대부분은 보위부원들에게 반항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끌려간다. 강철환씨의 증언에 의하면 기독교를 몰래 믿다가 혁명화구역에 끌려온 교인이 이곳에서도 몰래 기도를 하다가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간 경우도 있다고 한다.

완전통제구역은 말 그대로 한번 끌려가면 다시는 사회로 돌아올 수 없는 구역을 말한다. 이곳에 끌려간 이들의 대부분은 처음에는 북한 건국과정에서 분류된 지주, 친일파, 종교인들과, 한국전쟁 당시 치안대에 가담한 사람들이었으나 지금은 김일성의 권력장악 과정과 김정일의 권력세습 과정에서 숙청된 사람, 북한체제나 김일성, 김정일을 비판하거나 혹은 몰래 외국 사람과 접촉한 유학생이나 직원들, 그리고 최근에는 식량난 이후 중국으로 탈북한 사람들 중 남한사람과 접촉했을 것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완전통제구역은 평안남도 동신, 개천 그리고 요덕군 평전리와 용평리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시는 사회로 돌아올 수 없다는 점과 억압강도가 혁명화구역보다도 훨씬 심해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조차 완전통제구역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 정도라고 하는데 혁명화구역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 중에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가게 되면 도중에 자살을 택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한다. 이러한 차이는 수감자들의 보위원에 대한 행동에서도 잘 드러나 있다. 혁명화구역에서는 보위원이 지나가면 90도로 인사를 하지만 완전통제구역에서는 무릎을 끊어야 하고 1999년 탈북한 김용씨가 수감되었던 14호 관리소의 경우는 뒤로 돌아서서 무릎을 끊어야 한다. 물론 노동강도는 훨씬 강한 반면 식사량은 훨씬 적어 더욱 생존하기 힘들다. 그리고 같은 완전통제구역에서도 그 차이가 있다. 김용씨는 14호 관리소에 있다가 국가보위부 고위직의 배려로 18호 수용소로 이송되었는데 14호에 비하면 18호는 천국이라고 하였다. 14호에서는 탄광에서 작업을 하였는데 자신이 일하는 무진2갱 이외의 사람들은 볼 수도 없고 새벽 6시부터 밤늦게까지 자신의 굴에서 작업만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용씨는 그래도 지상에 나와서 잠을 잤지만 김책공대 지질학과의 한 교원의 증언에 의하면 자강도 발원금광에서는 수감자들이 발에 족쇄가 채워진 채로 잠도 지하 300m에 있는 굴속에서 잔다고 한다.(김정연 著 좬평양여자좭 1995년, 고려서적 발간) 그곳의 수감자들은 죽기 전에는 햇볕을 볼 수 없는 것이다.

수감자들의 대부분은 탈출을 꿈꾸기도 하지만 정치범수용소에서의 탈출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대부분 금방 포기하고 만다. 대부분이 깊은 산 속에 위치하고 있고 이중 삼중의 철책과 함정이 있기 때문에 탈출하는 사람들은 결국은 죽고 만다. 또, 수인들의 대부분은 제대로 걷기도 힘들기 때문에 성공하기도 힘들다. 비록 강철환씨의 증언처럼 특수부대 출신의 젊은 독신자가 탈출에 성공하여 중국에서 체포된 경우도 있고 1999년에 완전통제구역에서 탈출한 김용씨의 경우도 있지만 정말 극히 예외이고, 정치범수용소의 실상이 해외에 알려질 것이 두려운 북한 당국의 강력한 통제로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도저히 못 견디는 사람들은 자살을 선택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쉽지 않다. 만약 수인이 자살을 하면 그 가족의 수용 기간이 연장되거나 더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자살건수는 줄어들지 않는다고 한다.

정치범수용소의 관리는 국가보위부 소속 보위원들이 담당하고 정치범수용소의 경비는 국가보위부 소속 경비대가 감당하고 있다. 안명철씨가 국가보위부 7국 경비대 소속이다. 보위부원 중에는 간혹 인간적인 사람도 있으나 얼마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만약 수인들을 도와주는 것이 발각될 경우에는 탄광으로 쫓겨나고 만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범들을 가혹하게 다룰 수밖에 없고 점점 비인간화된다. 오가와 하루히사 일본 동경대 교수는 이를 두고 수인과 보위원이 다 야만인이 된다며 개탄했다.

정치범수용소는 어떻게 만들어졌나.
정치범수용소는 애초에 지주와 친일파, 종교인 등을 수용하는 시설로 만들어 졌다가 몇 차례의 변화 과정을 겪게 된다.

우선, 한국전쟁이 끝나고 난 후 김일성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남로당파, 소련파와 연안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한국전쟁 과정의 월남자 가족, 치안대 가담자 등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확대된다.

다음으로 19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 말까지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중앙당 집중지도사업과 주민재등록사업이 실시되면서 전 주민을 핵심계층, 적대계층, 중간계층으로 분류하고 다시 51개 성분분류가 이루어지면서 이 중 적대계층을 강제수용소에 구금하게 된다. 그리고 60년대 후반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반대자들 또한 강제수용소로 보내게 된다.

그리고 1972년 정치범수용소의 관리가 사회안정성에서 국가보위부로 이관되면서 전국적으로 정치범수용소가 증설되고 통제 또한 강화된다. 이 시기에 정치범수용소와 수인들이 대거 늘어나면서 폭동과 탈출이 몇 차례 일어난다. 안명철씨의 수기 좬그들이 울고있다좭에 당시의 폭동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1970년대 초에 12호 관리소인 온성에 있는 탄광에서 정치범들이 폭동을 일으킨다. 이들은 삽과 곡괭이, 도끼 등으로 보위원과 경비대 군관들이 출근한 뒤에 가족마을을 덮쳐 보위원들의 아낙네들과 아이들을 죽이지만 결국 경비대의 기관총과 자동소총에 정치범 5,000명이 몰살당한다. 이러한 몇 차례의 폭동 이후 경비대와 보위부는 정치범들을 더 악랄하게 다루고 통제를 강화하게 된다. 국가보위부에서 담당하면서 정치범수용소의 형태와 관리방법의 틀이 이 시기에 잡혀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1980년 김정일의 권력세습과정에서 이에 반대한 사람들과 그 가족 15,000여명이 대규모로 수감되고 80년대 후반 사회주의 몰락과 더불어 사회적 통제가 강화되면서 유학생들과 외교관들이 대거 수용된다. 그 외에도 북송 재일동포들과 그 가족들도 70년대 후반부터 상당수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

종합해 보면 정치범수용소는 북한 건국과정에서의 성분불량자를 시초로 하여 만들어 졌으나 김일성의 권력장악 과정에서 대규모로 증설되고 유일사상체계의 확립과 김정일의 세습과정, 사회주의 몰락과 식량난 이후 체제유지 과정을 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세상에 완벽한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방법이 옳건 그르건 간에 현재의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국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민주주의국가에선 지난 한 세기의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한 생각과 시도들이 공개적인 영역에서 토론과 검증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렇지 못한 나라들도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고 이런 사회일수록 정치범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국제사회는 정치범의 존재와 그에 대한 처우에 따라 그 사회의 인권을 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전세계의 나라들 중에 가장 많은 정치범이 존재하고 있는 곳은 북한이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인정하는 정치범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의 사회를 ‘지상낙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정치범은 그들이 주장하는 ‘지상낙원’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낙원’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북한에서 관리소라 부르는 정치범수용소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항상 20여만 명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들은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에서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그들은 과연 정치범들인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의 사연은 각기 다르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출신성분 불량자(적대계층)와 그 가족
적대계층은 8·15이후 전락노동자, 부농, 지주, 친일·친미주의자, 반농관료배, 천도교 청우당원, 입북자, 기독교신자, 출당자, 철직자, 적기관 복무자, 체포·투옥자 가족, 간첩관계자, 반당·반혁명 종파분자, 처단자 가족, 출소자, 정치범, 민주당원, 자본가 등 21개 부류의 사람들을 말한다. 특히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주민재등록 사업과 3계층 51개부류 구분사업으로 6,000명이 처형되었고 15,000세대 70,000여 명의 사람들이 대거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이 시기에 정치범수용소가 대규모로 증설되었다. 그리고 1980년 노동당 6차대회 이후 주민증검열사업으로 그때 운이 좋았던 사람들이 상당수 검거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 외에도 14호 완전통제구역에 수감되었다가 최초로 탈출에 성공한 김용씨의 경우처럼 상시적으로 주민증 재등록, 대조사업을 벌여서 철저하게 출신성분을 가려내고 있다.

이들이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이유는 단지 하나이다. 출신성분이 나쁘다는 것. 그러나 그나마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당사자들은 거의 죽었고 그 자손들이 아무 영문도 모르고 죄도 없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들을 과연 정치범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혁명분자와 그 가족
북한은 1958년 12월부터 정치범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투옥·처형하거나 산간오지로 추방해오다가 특히 1973년부터 김정일의 세습체제 구축을 위한 3대혁명소조활동과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함과 때를 같이하여 비판자와 정적들을 숙청, 그 가족들과 함께 수용소에 수감하여 왔다. 사실 해방전후와 한국전쟁 전후를 제외하곤 북한에서의 반혁명분자란 김일성의 권력장악과 유일사상체계의 확립, 김정일의 권력장악 과정에서의 정적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이들과 그 가족들은 수용소에서도 완전통제구역에 수감되어 일생을 그곳에서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혁명분자 즉 반국가범죄란 북한 형법 제44조에서 제55조까지를 말하는 ‘국가주권을 반대하는 범죄', ‘민족해방투쟁을 반대하는 범죄', ‘반국가범죄에 대한 은닉 및 불신고 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개념이 너무나 모호해서 사실상 김일성과 김정일의 말 한마디에 따라 그 동안 아무리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 죄도 없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굳이 정적이 아니어도 단지 김정일이 당 고위간부의 ‘태도가 좀 불량해’라고 생각하여 수표(서명)하면 그 즉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게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북한의 고위 인사인 김창봉, 김봉학, 김도만, 박금철(전 부수상 및 정치국원), 허봉학(전 대남공작기관 책임자), 김광협(전 당서기국 서기) 등도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들이 과연 북한 형법에서 규정하는 반국가범죄를 지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북한형법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일반주민들은 형법과 같은 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죄가 되고 무엇이 죄가 안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중국에 호기심으로 구경을 갔다와 그것이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르고 단지 께름직하다는 생각으로 자수를 하였다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안혁씨의 경우와 같이 무엇이 죄가 되고 안 되는지 구태여 알 필요도 없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 하기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야 한다”로 시작되는 이 10대 원칙은 북한에서 사는 사람이면 그 누구도 몰라서는 안되며 그대로 지키지 않아서는 더구나 안 되는 가장 무서운 법이다.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수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이 당 사업의 기본으로 선포되었다. 즉, 북한 헌법이나 형법 등의 법보다 우선하면서 사실상 형법의 반국가범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수령의 사상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면 가장 큰 범죄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유일사상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수령의 사상 하나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고, 수령의 사상이 아닌 사상은 철저히 배격한다는 것이다. 즉, 수령을 신격화하고 수령의 사상을 신념화하며, 수령의 사상의 정당성을 절대화하고, 수령에 대한 충성을 무조건화 한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수령의 명령지시에 따라 전당과 전군, 전국, 전민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마치 한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주민들이 억울하게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김일성·김정일을 욕하거나 비판을 하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신년사를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사람,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나 뺏지를 훼손한 사람, 신문에 나온 김일성·김정일이라는 글자를 훼손한 사람, 수령의 동상 앞에서 떠들거나 불손한 자세를 취했다는 죄로 끌려간 사람 등등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권력이 막강한 보위부 간부나 당 관리라 할지라도 일반 범죄와 관련해선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지만 일단 유일사상체계 10원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그 어떤 예외가 있을 수 없으며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게 된다. 물론 이들을 정치범이라 할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북송 재일동포와 그 가족
가진 전 재산을 김일성에게 헌납하고 조국에 봉사하고자 북송선을 탔던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특히 투철한 사명감을 안고 가족들까지 전부 북한으로 데리고 온 1세대들은 자신들의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이 자신들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서 고통속에 살아가야 하는 죄책감에 원한을 품으며 눈을 감고 있다.

별다른 죄가 없음에도 북송 재일동포들을 정치범수용소에 가두는 첫째 이유로는 민주주의사회에서 살다 온 이들이 잠재적으로 유일사상체제에 대한 불만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둘째로 이들이 이질적인 북한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식량난으로 인해 통제가 약화되어 정보가 어느 정도 유통되지만 90년대 초반만 해도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선진국가라고 주민들에게 선전해왔던 것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허위를 잘 알고 있는 재일동포들이야말로 내부 독재선전체계에 위협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대외 승용차 택시사업소 봉사지도원이었던 김보국이라는 사람은 재일동포를 창광산 호텔까지 데려다 주면서 일본이 발전했다는 말 한 마디 했다는 이유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왔다. 하물며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다 온 북송교포들에 대한 의심은 오죽하였을까?

요덕수용소에는 북송교포가 1974년 초 1백여 세대 6백여 명이 처음으로 수용된 이래 79년까지 1백∼2백 세대씩 수용되어 왔다. 86년 당시 요덕수용소의 북송교포는 일가족 수용자 8백여 세대의 5천여 명과 범죄자로 낙인찍힌 장본인 3백여 명으로 도합 총 5천 3백여 명이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년대 이후는 북송교포 수용자가 줄어들어 새로 수용되는 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본인 처들은 수용소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대부분 몇 년을 넘기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1977년부터 1979년 2년 동안 14명의 일본인 처가 수용되었지만 대부분 2∼3년 안에 죽고 2명만이 출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일본과의 수교 움직임에 따라 이들에 대해 따로 관리하고 처우도 조금 개선되었다고 한다. 또 강철환씨의 경우처럼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친척들의 송금액에 따라 석방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북송교포들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다.

북한식 ‘자유주의’자와 그 가족
북한은 그들의 폐쇄적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외국인과의 접촉을 금하고 이른바 ‘자유주의' 바람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통제한다고 해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에 나가 일하는 사람들이나 유학생들, 북한 내에서 외국인을 접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교육과 심사를 거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반, 실수 반으로 간첩으로 몰려 수용소에 끌려가고 있다.

1968년 월드컵에서 북한의 축구대표팀이 이탈리아를 꺾으며 Korea 붐을 일으켰던 박승진의 경우도 단순한 호기심때문에 영웅으로 불리며 평생을 편히 살 수 있는 길을 벗어나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생을 썩게 된 경우이다. 이때 북한의 축구대표팀 선수들은 영국과의 결전을 앞두고 몰래 숙소를 빠져 나와 영국 여자들과 어울려 한바탕 신나게 놀았던 것이다. 이유는 물론 자유주의 국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궁금해서이다. 그러나 이후 검열에서 사실이 들통난 선수들은 여지없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오고 말았다. 박승진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아 요덕 혁명화구역에 왔고, 다른 선수들은 더 심한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 외에 외교관들의 경우에도 이유없이 외국인들과 접촉한 것이 발각될 경우 예외없이 간첩혐의를 받아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가족들과 함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다. 특히, 89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진 이후, 소련 유학생들의 탈출 등의 사건 이후 외국에 나가 있는 외교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환과 검열로 상당수의 유학생들과 외교관들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왔다. 역시 아무리 권력있는 집안이라 하더라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외국에 나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국내에서 외국인을 접대하는 북한 주민들의 경우에도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이유없이 말을 걸거나 외국인의 숙소에 찾아가면 역시 정치범수용소행이다. 고려호텔 안내원 김명준은 4.15 축제 때 외국인의 방에 찾아간 것이 죄가 되어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다. 역시 호기심 때문이다.

이 외에도 북한에서의 반 ‘자유주의’는 남조선 노래를 부르거나 듣거나, 디스코 춤을 추거나, 허가없이 여행을 하는(지금은 사실상 무너진 상태) 등 웃을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심지어 현 북한 최고의 실세 중 한 명인 김정일의 매제(동생 김경희의 남편)인 장성택조차 자유주의로 인해 고생을 해야만 했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파티를 본떠서 자신도 기쁨조를 조직하고 파티를 열었다가 김정일의 귀에 들어가 탄광으로 쫓겨나 오랫동안 고생을 한 후에 겨우 복직이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식량난 이후 중국으로의 탈북이 급증하면서 탈북자 처리문제에 있어서 기준이 외국인이나 한국인과의 접촉여부라고 한다. 이들 중 가혹한 고문에 못이기거나 사실대로 말하면 그냥 돌려보낸다는 거짓에 현혹되어 그런 사실을 시인한 사람들은 여지없이 총살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고 만다.

납북자 및 의거입북자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한 남한주민들은 현재 48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나포된 경우이고 중국이나 독일 등 외국에서 납치된 경우도 있다. 주로 북한체제 선전과 남파공작원 교육에 써먹다가 역시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정치범수용소로 보내버린다. 남북대화에서 납북자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된 지금 북한에서 쉽사리 납북자를 돌려보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이들에게 몹쓸 짓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의 거짓 선전에 속아서거나 혹은 남한에서의 잘못 때문에 의거입북한 남한출신 사람들도 상당수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있다. 이들 역시 북송교포들처럼 믿을 수 없거나 북한사회에 적응을 잘 못하기 때문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고 효용가치가 없어져서 끌려가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의거입북 기자회견 직후 끌려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동독으로 돈벌러 갔던 간호원이나 독일 유학생, 일본으로의 밀항자 중 북송선을 탄 사람, 군인, 사업가 등 다양하지만 대부분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끌려가서 남한을 그리워하다 더욱 적응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납북자와 의거입북자는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북한주민들과는 행동과 말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쉽게 구별이 간다고 한다.

남한 망명자, 귀순자의 가족
식량난 이전에는 간헐적으로 북한의 관료나 외교관 등 소수의 사람이 남한에 귀순을 해왔지만 식량난 이후 러시아와 중국을 통해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남한으로 들어왔다. 현재 이들의 숫자는 올해가 넘으면 1,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을 제외하곤 대다수의 주민들이 탈북과 귀순사실을 숨긴다. 이유는 만약 자신이 남한으로 온 것이 알려지면 북에 있는 가족들과 친척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기 때문이다.

특히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해 평소에 한 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안면조차 없는 먼 친척들을 포함해 만 단위의 사람들이 산간 오지나 탄광,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총살당했다. 그리고 남파공작원 중 남한에 귀순한 사람들의 가족도 여지없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그 시기에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안혁씨의 증언에 의하면 KAL기 폭파사건의 김현희씨 가족 또한 용평완전통제구역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