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편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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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惡)에 접근하다.” (Access to Evil)
지난 2월 1일 저녁 9시(현지 시간), 영국의 BBC 방송은 이러한 제목의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서 수인(囚人)들을 대상으로 화학무기 생체실험을 자행하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BBC는 그 증거로 수인을 생체실험대상으로 이관(移管)하는 내용의 문서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공개했습니다. 그 ‘이관서’는 북한에서 화학공장 기술자로 일하면서 생체실험 현장을 목격한 강병섭씨가 북한을 탈출하면서 몰래 갖고 나왔고, 북한인권운동가 김상헌 선생과 <피랍탈북인권연대>에서 입수하여 BBC측에 제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BBC의 보도 이후 며칠간 제 휴대폰은 기자들의 전화로 쉼 없이 울려댔습니다. 이관서의 진위 여부를 묻는 내용이 주를 이뤘습니다. 인터뷰하듯 정식으로 물어 오는 기자가 있었고, 평소 친분이 있는 기자 가운데는 이제 북한관련 부서를 떠났음에도 “그거 진짜야?”하면서 개인적인 의문을 표시한 분도 계셨습니다. 그 원본을 보기 전에는 섣불리 말할 수 없다고, 저는 대부분 “노코멘트”라는 답변 아닌 답변을 했습니다.

며칠 후, <피랍탈북인권연대> 도희윤 사무총장이 이관서의 원본을 들고 저희 사무실을 찾아왔습니다. 이제 원본을 봤으니 제가 확실한 답변을 해야 할 차례이군요. 제 답변이 무슨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요. 섭섭하시겠지만 여전히 제 답변은 ‘노코멘트’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김정일 정권은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정권이다. 김정일은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인간이다.”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제 명예를 걸고 분명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2

이관서에 몇 가지 의심쩍은 부분이 있긴 합니다. 제 나름대로 그 동안 북한 당국에서 발행한 각종 문서와 자료의 원본을 꽤나 많이 보아왔는데 그런 형식의 문서는 처음 접했습니다. 뭔가 엉성한 점도 있었지만 전반적으로는 꽤나 완벽하고 깔끔해서 오히려 그게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다른 기관에서 발행하는 문서와 다른 점도 몇 가지 눈에 띕니다.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에서 발행한 문서는 저도 처음 보는 것이라서 다른 기관의 것과 비교하여 ‘이것은 가짜다(혹은 진짜)’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웬만한 ‘북한전문가’라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가장 의문을 갖는 부분은 이관서의 도장이나 글씨체, 표현, 종이의 재질 같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저는 ‘한낱 나무토막 취급도 못 받는 수용소의 수인을 이관하면서 거창하게 문서를 작성하고 그럴까’ 하고 의심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수용소의 수인을 한 트럭 싣고 나가 화학무기 실험을 한들 인체해부 실험을 한들 거기에 무슨 문서가 필요하겠습니까. 어차피 공민으로 등록되어 있지도 않은 ‘존재하지 않는 존재들’일 텐데요.

저는 물론 김상헌 선생과 <피랍탈북인권연대>을 신뢰하고 그 활동내용을 존경하며, 특히 이번 생체실험 문서공개와 관련해 목숨을 건 비밀활동을 전개하였을 분들을 생각하면 숙연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집니다. 그러나 제 개인적 존경과 신뢰의 마음을 떠나, 북한정권이 수인들을 생체실험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힘들여 문서를 만들어 ‘증거를 남기는’ 그런 행위를 과연 했을까 하는 의문이 남습니다. 이것은 김상헌 선생이나 <피랍탈북인권연대>를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김정일 정권을 털끝만치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의문입니다.

3

영화 ‘밴드 오브 브라더스(Band Of Brothers)’를 아십니까? 이미 많은 분들이 보셨겠지만, 영화전문 유선방송인 HBO에서 제작한 이 영화는 전쟁영화의 백미로 손꼽힙니다.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한 이 영화는 노르망디 상륙 작전과 유럽 전선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친 ‘이지(Easy)중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총 10시간 25분 러닝타임의 대작으로, 10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나의 에피소드가 1시간 분량이어서, DVD 타이틀을 소장하고 있다 시간여유가 있을 때마다 TV 드라마 보듯 한 편씩 꺼내 보는 재미가 참 좋습니다. 저는 영화를 많이 보는 편은 아니지만 좋은 영화라고 생각되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보는 취향이 있습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도 그런 영화 중 하나로, 에피소드에 따라 지금껏 2~5번 정도를 보았습니다. 별다른 설명을 할 필요 없이 꼭 한번 보시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10개의 에피소드마다 제목이 있습니다. 제가 제일 즐겨보는 편은 전쟁의 참혹함을 잘 묘사한 제6편 ‘Bastogne’(바스통 - 벨기에의 지명)이고, 가장 감명 깊게 본 편은 제9편 ‘Why We Fight’(우리가 싸우는 이유)입니다. 제9편을 처음 봤을 때, 영화를 더 이상 보지 못하고 ‘일시정지’ 버튼을 누른 채 무릎에 얼굴을 묻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의 다른 에피소드들이 참전용사의 인터뷰를 앞장 세우면서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시작하는데 반해, 제9편은 “1945년 4월 11일 독일 탈렘”이라는 자막으로 시작합니다. 1945년 4월이면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때로, 주요한 전투는 다 끝나고 전쟁을 수습하는 단계에 있던 시기입니다. 따라서 제9편에서는 전편들과 같은 전투씬은 없고 민가에서 음식을 뺏어먹거나, 매춘부와 어울리거나, 술을 마시면서 고민을 달래는 장교, 신병과 갈등을 빚는 고참병의 모습 등을 조금은 지루하게 보여줍니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를 잊어버린 군인들의 모습이죠. 그러다 후반에 들어, 도시 외곽을 순찰하는 도중 ‘정체 불명의 어떤 곳’을 발견하게 되면서 내용은 반전됩니다. 그곳은 바로 나치가 인종학살을 자행하던 수용소였습니다.

수용소의 문이 열리자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들이 비틀비틀 걸어 나오고, 시체가 산더미 같이 쌓여있으며, 시체를 소각하다 급하게 도주한 듯 곳곳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 오르고 있습니다. 마스크를 두르고 이 수용소에 들어서자 마치 좀비(zombie)들이 모여들 듯 수인들은 군인을 에워싸고 “빵”과 “물”을 외칩니다. 한 청년은 아버지인 듯한, 축 늘어진 노인을 안고 다가와 뭐라고 애원하고, 어느 건물의 문을 열자 깜깜한 실내에서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 침상 위에 줄지어 누워 흐느적거리고 있습니다. 화물열차를 열어보니 시체들이 쌓여있고 곳곳에서 잔혹한 학살의 흔적이 보입니다. 정말 눈뜨고는 바라볼 수 없는 광경들입니다. 이때서야 관객들은 왜 제9편의 제목이 ‘우리가 싸우는 이유’인지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하게 됩니다.

마을로 달려간 군인들은 급하게 빵과 물을 가져오지만 군의관은 오랫동안 굶다가 급하게 많이 먹으면 위험하다며 수인들에 대한 음식지급을 중지시킵니다. 또한 전염병 확산을 우려하여 수인들을 당분간 수용소에 가둬 놓을 것을 지시합니다. 군인들은 손을 내밀며 달려드는 사람들을 눈물 흘리며 저지하고, 모처럼 자유를 찾아 밖으로 뛰어나가려던 사람들을 다시 데리고 들어옵니다. 이런 한 장면 한 장면에서 제가 가슴이 울컥 했던 것은, 바로 이것이 북한이 민주화되는 날 수용소의 풍경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걸어 나오는 모습……. 우리는 그것을 함경남도 요덕(제15호 관리소), 함경남도 개천(제14호)과 북창(제18호), 함경북도 회령(제22호), 평안남도 개천(제1교화소), 평안북도 신의주(제3교화소), 평안남도 강동(제4교화소), 함경북도 단천(제77교화소), 함경남도 오로(제22교화소) 등 북녘 땅 곳곳에서 찢어지는 가슴으로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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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
영화 ‘매트릭스2’의 광고문구입니다. 김정일 정권이 붕괴되고 북한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되는 날, 저는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 세계에 유례가 없는 끔찍한 학살과 학대, 인권유린의 현장들을 세계인은 한 날 한 시에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수많은 증언과 사연이 그야말로 폭풍우 치듯 쏟아질 것입니다. 지금 탈북자들이 내어놓는 증언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사실 - 지금 우리가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들이 속속들이 밝혀져 세상에 그 정체를 드러낼 것입니다. ‘독재의 종합 전시장’이라고 할만한 그 현실 앞에 어떤 이는 놀라 눈을 크게 뜨고, 어떤 이는 한참 동안 넋을 놓고 화면만을 응시할 것이며, 어떤 이는 부끄러워 얼굴을 붉히고, 또 어떤 이는 골방에 숨어 벌벌 떨며 ‘내가 지금껏 무슨 짓을 저질렀던 것인가’ 후회하며 ‘이것이 제발 꿈이길’ 하고 바랄 것입니다.

진실은 그렇게 마른 땅에 봄비가 내리듯 우리 앞에 청명하게 다가올 것입니다. 지금은 그 진위여부를 놓고 옥신각신하는 생체실험 이관서 문제도 그때가 되면 분명하게 가려질 것입니다. 모든 것이 분명해질 것입니다. 과연 누가 정의의 편이었고, 누가 악의 편을 거들며 정의로 위장하여 큰소리를 쳐왔는지 확연히 드러날 것입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신 독자 여러분은, 우리가 ‘김정일’이라는 극명한 악의 실체와 맞서 싸웠던 이유를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밴드 오브 브라더스’ 제9편에서는, 나치의 인종학살 수용소를 발견하였을 때 그 수용소가 위치하였던 도시의 주민들조차 수용소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용소 안에서 벌어진 학살의 현장을 전해주자 “(연합군이) 과장하고 있다”고 주민들이 의심한다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이 과장된 말인지 아닌지, 주민들은 다음날 똑똑히 알게 됩니다. 자신들이 수용소에 동원되어 시체 치우는 일을 맡게 되니까요. 지금 남한에서도 정치범수용소를 비롯해 북한의 실정에 대해 이야기하면 ‘거짓말을 한다’, ‘과장한다’고 대꾸하는 자칭 시민운동가, 인권운동가들이 있습니다. 토론회에서 맞부딪히면 ‘증거를 대라’고 이야기하며 고소(苦笑)를 머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중에 그들에게도 수용소를 정리하는 일을 맡겨주면 되겠습니다. 지금 자신들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눈물 흘리며 참회할 날이 있을 것입니다. 시간은 그 날을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습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