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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범 수용소(2)

세상에 완벽한 사회란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방법이 옳건 그르건 간에 현재의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국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민주주의국가에선 지난 한 세기의 시행착오와 실험을 거쳐서 새로운 변화를 위한 생각과 시도들이 공개적인 영역에서 토론과 검증을 거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그렇지 못한 나라들도 적지 않게 존재하고 있고 이런 사회일수록 정치범들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국제사회는 정치범의 존재와 그에 대한 처우에 따라 그 사회의 인권을 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현재 전세계의 나라들 중에 가장 많은 정치범이 존재하고 있는 곳은 북한이다. 그러나 북한 당국이 인정하는 정치범은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스스로의 사회를 ‘지상낙원’이라고 말하기 때문이고 정치범은 그들이 주장하는 ‘지상낙원’에선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낙원’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렇지만 북한에서 관리소라 부르는 정치범수용소에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지만 항상 20여만 명의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그들은 ‘지상낙원’이라는 북한에서 무슨 죄를 지었단 말인가? 그들은 과연 정치범들인가?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 사람들의 사연은 각기 다르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출신성분 불량자(적대계층)와 그 가족

적대계층은 8·15이후 전락노동자, 부농, 지주, 친일·친미주의자, 반농관료배, 천도교 청우당원, 입북자, 기독교신자, 출당자, 철직자, 적기관 복무자, 체포·투옥자 가족, 간첩관계자, 반당·반혁명 종파분자, 처단자 가족, 출소자, 정치범, 민주당원, 자본가 등 21개 부류의 사람들을 말한다. 특히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주민재등록 사업과 3계층 51개부류 구분사업으로 6,000명이 처형되었고 15,000세대 70,000여 명의 사람들이 대거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고, 이 시기에 정치범수용소가 대규모로 증설되었다. 그리고 1980년 노동당 6차대회 이후 주민증검열사업으로 그때 운이 좋았던 사람들이 상당수 검거되어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 외에도 14호 완전통제구역에 수감되었다가 최초로 탈출에 성공한 김용씨의 경우처럼 상시적으로 주민증 재등록, 대조사업을 벌여서 철저하게 출신성분을 가려내고 있다.

이들이 정치범수용소에 갇힌 이유는 단지 하나이다. 출신성분이 나쁘다는 것. 그러나 그나마 세월이 흘러 지금은 그 당사자들은 거의 죽었고 그 자손들이 아무 영문도 모르고 죄도 없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이들을 과연 정치범이라고 할 수 있을까?

반혁명분자와 그 가족

북한은 1958년 12월부터 정치범을 반혁명분자로 몰아 투옥·처형하거나 산간오지로 추방해오다가 특히 1973년부터 김정일의 세습체제 구축을 위한 3대혁명소조활동과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정일이 후계자로 공식 등장함과 때를 같이하여 비판자와 정적들을 숙청, 그 가족들과 함께 수용소에 수감하여 왔다. 사실 해방전후와 한국전쟁 전후를 제외하곤 북한에서의 반혁명분자란 김일성의 권력장악과 유일사상체계의 확립, 김정일의 권력장악 과정에서의 정적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이들과 그 가족들은 수용소에서도 완전통제구역에 수감되어 일생을 그곳에서 마감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반혁명분자 즉 반국가범죄란 북한 형법 제44조에서 제55조까지를 말하는 ‘국가주권을 반대하는 범죄’, ‘민족해방투쟁을 반대하는 범죄’, ‘반국가범죄에 대한 은닉 및 불신고 죄’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개념이 너무나 모호해서 사실상 김일성과 김정일의 말 한마디에 따라 그 동안 아무리 높은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아무 죄도 없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굳이 정적이 아니어도 단지 김정일이 당 고위간부의 ‘태도가 좀 불량해’라고 생각하여 수표(서명)하면 그 즉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게 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북한의 고위 인사인 김창봉, 김봉학, 김도만, 박금철(전 부수상 및 정치국원), 허봉학(전 대남공작기관 책임자), 김광협(전 당서기국 서기) 등도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었다. 이들이 과연 북한 형법에서 규정하는 반국가범죄를 지었을지는 의문이다.

그리고 사실상 북한형법보다 더 무서운 것은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일반주민들은 형법과 같은 법에 대해서 잘 모른다. 가르쳐 주지 않기 때문에 무엇이 죄가 되고 무엇이 죄가 안 되는지 알 수가 없다. 중국에 호기심으로 구경을 갔다와 그것이 죄가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르고 단지 께름직하다는 생각으로 자수를 하였다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안혁씨의 경우와 같이 무엇이 죄가 되고 안 되는지 구태여 알 필요도 없고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 하기 위하여 몸바쳐 투쟁하여야 한다”로 시작되는 이 10대 원칙은 북한에서 사는 사람이면 그 누구도 몰라서는 안되며 그대로 지키지 않아서는 더구나 안 되는 가장 무서운 법이다.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하면서 수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이 당 사업의 기본으로 선포되었다. 즉, 북한 헌법이나 형법 등의 법보다 우선하면서 사실상 형법의 반국가범죄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수령의 사상에 어긋난다고 판단되면 가장 큰 범죄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유일사상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수령의 사상 하나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고, 수령의 사상이 아닌 사상은 철저히 배격한다는 것이다. 즉, 수령을 신격화하고 수령의 사상을 신념화하며, 수령의 사상의 정당성을 절대화하고, 수령에 대한 충성을 무조건화 한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유일적 영도체계를 세운다는 것은 수령의 명령지시에 따라 전당과 전군, 전국, 전민이 한치의 빈틈도 없이 마치 한사람이 움직이는 것처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한다는 미명하에 수많은 주민들이 억울하게 반혁명분자로 몰려서 정치범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김일성·김정일을 욕하거나 비판을 하는 경우는 물론이거니와 신년사를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사람,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나 뺏지를 훼손한 사람, 신문에 나온 김일성·김정일이라는 글자를 훼손한 사람, 수령의 동상 앞에서 떠들거나 불손한 자세를 취했다는 죄로 끌려간 사람 등등 말도 안 되는 이유가 대부분이다.

아무리 권력이 막강한 보위부 간부나 당 관리라 할지라도 일반 범죄와 관련해선 막강한 권한을 행사할 수 있지만 일단 유일사상체계 10원칙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그 어떤 예외가 있을 수 없으며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게 된다. 물론 이들을 정치범이라 할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북송 재일동포와 그 가족

가진 전 재산을 김일성에게 헌납하고 조국에 봉사하고자 북송선을 탔던 수많은 재일동포들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특히 투철한 사명감을 안고 가족들까지 전부 북한으로 데리고 온 1세대들은 자신들의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이 자신들 때문에 정치범수용소에서 고통속에 살아가야 하는 죄책감에 원한을 품으며 눈을 감고 있다.

별다른 죄가 없음에도 북송 재일동포들을 정치범수용소에 가두는 첫째 이유로는 민주주의사회에서 살다 온 이들이 잠재적으로 유일사상체제에 대한 불만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는 것이고, 둘째로 이들이 이질적인 북한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식량난으로 인해 통제가 약화되어 정보가 어느 정도 유통되지만 90년대 초반만 해도 북한이 세계에서 가장 앞서가는 선진국가라고 주민들에게 선전해왔던 것에 비추어 보면 이러한 허위를 잘 알고 있는 재일동포들이야말로 내부 독재선전체계에 위협적인 요소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대외 승용차 택시사업소 봉사지도원이었던 김보국이라는 사람은 재일동포를 창광산 호텔까지 데려다 주면서 일본이 발전했다는 말 한 마디 했다는 이유로 정치범수용소에 끌려왔다. 하물며 오랫동안 일본에서 살다 온 북송교포들에 대한 의심은 오죽하였을까?

요덕수용소에는 북송교포가 1974년 초 1백여 세대 6백여 명이 처음으로 수용된 이래 79년까지 1백∼2백 세대씩 수용되어 왔다. 86년 당시 요덕수용소의 북송교포는 일가족 수용자 8백여 세대의 5천여 명과 범죄자로 낙인찍힌 장본인 3백여 명으로 도합 총 5천 3백여 명이 수용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80년대 이후는 북송교포 수용자가 줄어들어 새로 수용되는 자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들 중 일본인 처들은 수용소에 적응하기가 힘들어 대부분 몇 년을 넘기기 힘든 경우가 많은데 1977년부터 1979년 2년 동안 14명의 일본인 처가 수용되었지만 대부분 2∼3년 안에 죽고 2명만이 출소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 일본과의 수교 움직임에 따라 이들에 대해 따로 관리하고 처우도 조금 개선되었다고 한다. 또 강철환씨의 경우처럼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친척들의 송금액에 따라 석방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북송교포들이 정치범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하고 있다.

북한식 ‘자유주의’자와 그 가족

북한은 그들의 폐쇄적 독재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외국인과의 접촉을 금하고 이른바 ‘자유주의’ 바람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통제한다고 해서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외국에 나가 일하는 사람들이나 유학생들, 북한 내에서 외국인을 접대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은 특별히 교육과 심사를 거친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호기심 반, 실수 반으로 간첩으로 몰려 수용소에 끌려가고 있다.

1968년 월드컵에서 북한의 축구대표팀이 이탈리아를 꺾으며 Korea 붐을 일으켰던 박승진의 경우도 단순한 호기심때문에 영웅으로 불리며 평생을 편히 살 수 있는 길을 벗어나 정치범수용소에서 일생을 썩게 된 경우이다. 이때 북한의 축구대표팀 선수들은 영국과의 결전을 앞두고 몰래 숙소를 빠져 나와 영국 여자들과 어울려 한바탕 신나게 놀았던 것이다. 이유는 물론 자유주의 국가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궁금해서이다. 그러나 이후 검열에서 사실이 들통난 선수들은 여지없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오고 말았다. 박승진의 경우는 그나마 운이 좋아 요덕 혁명화구역에 왔고, 다른 선수들은 더 심한 완전통제구역으로 끌려갔다고 한다.

그 외에 외교관들의 경우에도 이유없이 외국인들과 접촉한 것이 발각될 경우 예외없이 간첩혐의를 받아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가족들과 함께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간다. 특히, 89년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가 무너진 이후, 소련 유학생들의 탈출 등의 사건 이후 외국에 나가 있는 외교관들에 대한 대대적인 소환과 검열로 상당수의 유학생들과 외교관들이 정치범수용소에 끌려왔다. 역시 아무리 권력있는 집안이라 하더라도 빠져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외국에 나가 있는 경우가 아니라 하더라도 국내에서 외국인을 접대하는 북한 주민들의 경우에도 지나가는 외국인에게 이유없이 말을 걸거나 외국인의 숙소에 찾아가면 역시 정치범수용소행이다. 고려호텔 안내원 김명준은 4.15 축제 때 외국인의 방에 찾아간 것이 죄가 되어 요덕수용소로 끌려갔다. 역시 호기심 때문이다.

이 외에도 북한에서의 반 ‘자유주의’는 남조선 노래를 부르거나 듣거나, 디스코 춤을 추거나, 허가없이 여행을 하는(지금은 사실상 무너진 상태) 등 웃을 수밖에 없는 내용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심지어 현 북한 최고의 실세 중 한 명인 김정일의 매제(동생 김경희의 남편)인 장성택조차 자유주의로 인해 고생을 해야만 했다. 장성택은 김정일의 파티를 본떠서 자신도 기쁨조를 조직하고 파티를 열었다가 김정일의 귀에 들어가 탄광으로 쫓겨나 오랫동안 고생을 한 후에 겨우 복직이 되었다.

그리고 최근에는 식량난 이후 중국으로의 탈북이 급증하면서 탈북자 처리문제에 있어서 기준이 외국인이나 한국인과의 접촉여부라고 한다. 이들 중 가혹한 고문에 못이기거나 ‘사실대로 말하면 그냥 돌려보낸다’는 거짓말에 현혹되어 그런 사실을 시인한 사람들은 여지없이 총살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고 만다.

납북자 및 의거입북자

북한에 납치되었다가 돌아오지 못한 남한주민들은 현재 480여 명에 이르고 있다. 이들 대부분은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나포된 경우이고 중국이나 독일 등 외국에서 납치된 경우도 있다. 주로 북한체제 선전과 남파공작원 교육에 써먹다가 역시 효용가치가 떨어지면 정치범수용소로 보내버린다. 남북대화에서 납북자 문제가 현안으로 대두된 지금 북한에서 쉽사리 납북자를 돌려보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이들에게 몹쓸 짓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의 거짓 선전에 속아서거나 혹은 남한에서의 잘못 때문에 의거입북한 남한출신 사람들도 상당수가 정치범수용소에 끌려가 있다. 이들 역시 북송교포들처럼 믿을 수 없거나 북한사회에 적응을 잘 못하기 때문에 끌려가는 경우가 많고 효용가치가 없어져서 끌려가는 경우도 있다. 때로는 의거입북 기자회견 직후 끌려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들은 동독으로 돈벌러 갔던 간호원이나 독일 유학생, 일본으로의 밀항자 중 북송선을 탄 사람, 군인, 사업가 등 다양하지만 대부분이 아무런 잘못도 없이 끌려가서 남한을 그리워하다 더욱 적응도 못하고 고통스럽게 삶을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납북자와 의거입북자는 그 수가 많지는 않지만 북한주민들과는 행동과 말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쉽게 구별이 간다고 한다.

남한 망명자, 귀순자의 가족

식량난 이전에는 간헐적으로 북한의 관료나 외교관 등 소수의 사람이 남한에 귀순을 해왔지만 식량난 이후 러시아와 중국을 통해서 상당수의 사람들이 남한으로 들어왔다. 현재 이들의 숫자는 올해가 넘으면 4,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그런데 이미 이름이 알려진 사람을 제외하곤 대다수의 주민들이 탈북과 귀순사실을 숨긴다. 이유는 만약 자신이 남한으로 온 것이 알려지면 북에 있는 가족들과 친척들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기 때문이다.

특히 황장엽 전 노동당비서의 경우는 그 정도가 심해 평소에 한 번이라도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안면조차 없는 먼 친척들을 포함해 만 단위의 사람들이 산간 오지나 탄광,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거나 총살당했다. 그리고 남파공작원 중 남한에 귀순한 사람들의 가족도 여지없이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다. 그 시기에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안혁씨의 증언에 의하면 KAL기 폭파사건의 김현희씨 가족 또한 용평완전통제구역으로 이송되었다고 한다.

점점 많아져 가는 진짜 정치범

북한에서의 반국가, 반김정일운동은 자신과 가족, 일가의 목숨을 걸지 않고서는 할 수가 없다. 때문에 남한이나 여타의 민주주의 국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볼 수 있는 데모는 물론이고 조금의 비판이나 토론조차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사람답게 살기 위한 자유를 향한 투쟁이 있을 수밖에 없다. 몇 차례의 사건들이 풍문으로만 전해질 뿐 확인된 사실은 거의 없지만, 그러한 투쟁을 조직하기 위한 조직을 만들기 위한 준비단계는 있다고 한다. 재일동포로는 최초로 북한에 자비 유학한 이영화 일본 간사이대 교수의 증언에 의해서도 그러한 사실은 확인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자신들의 역량과 주변 여건이 성숙되기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조차 북한의 잘 짜여진 독재체제에 사전에 발각되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은 총살되고 그 가족들은 수용소로 끌려가고 만다. 일반 범죄와 억울한 반혁명범죄는 본때를 보여준다며 공개총살을 실시하지만 진짜 반국가범죄와 관련된 사건에서는 공개총살을 실시하지 않고 비밀리에 총살하기 때문에 정확한 사실확인이 어렵다. 다만 어느 정도의 정보유통이 가능해진 요즘 입에서 입으로 소문만이 무성할 따름이다.

사실 그 동안에는 북한 당국의 주장대로 북한에서는 정치범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범수용소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과 고통받고 있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이 정치범이 아니라 김일성·김정일의 권력장악과 유지를 위한 독재에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협력했고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실수나 인간으로서 있을 수 있는 아주 조그만 호기심 때문에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면 북송교포들의 경우 독재통치를 조금 편하게 하자고, 심지어는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데 헌신한 사람들조차 김일성·김정일의 권위를 손상하지 않을까 혹은 체제를 반대하지 않을까 하는 의심 때문에, 단지 자신들의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부자였거나, 종교인이라거나, 남한 군인이라거나 하는 등등의 이유로 자신과는 무관하게 정치범수용소에서 영문도 모르고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살아왔던 것이다. 이들은 정치범이 아니라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일 뿐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무능과 실정, 독재통치로 인해 무너진 오늘에 와서는 그들의 허위와 기만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통치자의 무능력으로 인해 북한 주민들이 가지고 있는 김정일에 대한 불만도 대단히 높아져 왔다. 식량난으로 벌어진 독재체제의 빈틈으로 조금이나마 정보의 유통이 되고 있고, 그 조그마한 정보로 인해 청옹성같던 수령절대주의체제가 무너져 가고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정치범수용소는 쉽사리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수령절대주의체제를 거부하고 북한주민들의 생존과 자유를 갈망하는 진짜 정치범들로 인해 점점 정치범수용소가 증대되거나 전사회의 정치범수용소화가 진행되고 있다.

북한 당국은 정치범수용소 수인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

“우리 인민의 계급적인 원쑤들에게 프롤레타리아 맛을 톡톡히 보여주어야 합니다.” - 김일성
“도주한 놈을 무조건 잡아 죽여야 합니다. 그놈들이 도주하면 수령님의 대외적 권위가 심히 훼손됨으로 동무들은 초소를 철벽으로 지킴으로서 한 놈의 도주자도 나타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 김정일

계급투쟁의 현장
정치범수용소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중에는 그곳도 사람들이 사는 곳인데 설마 그렇게까지야 하겠느냐며 의문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보위원들이나 경비대원들도 같은 사람들인데 설마 그렇게까지 정치범들을 다루겠느냐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정치범수용소의 경비대원으로 있다 탈출한 안명철씨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것이 가능하고 지금 우리 사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자행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명철씨는 신병으로 처음 정치범수용소에 배치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우리 13호 관리소는 당을 배반하고 수령을 배반한 악질적인 종파분자들과 그 자녀들이 있는 것만큼 실랄한 계급투쟁의 현장입니다. - 중략 - 이놈들은 악질들이기 때문에 동무들이 그들을 동정하거나 불쌍히 생각하면 그놈들은 앞에서 웃음 짓고 뒤에서는 칼을 빼드는 놈들이기 때문에 그들을 인간으로 생각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중략 - 동무들에게는 오직 그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할 의무와 도망치지 못하게 경계선을 철벽같이 지키며 한 놈이라도 반항하거나 도주하면 무자비하게 사살할 의무밖에 없습니다.”

경비대의 신병들이 처음에는 이 말의 의미를 잘 모르지만 곧 익숙해지고 만다. 수인들이 수용소에 끌려와서 처음에는 엄청난 상황에 충격을 받지만 곧 살기 위해 수용소에 적응하는 것처럼…….

전의 글에서 밝힌 것처럼 정치범수용소가 오늘날의 형태를 완전히 갖춘 것은 유일사상체계의 등장과 김정일의 집권전후(1960년대 말 - 1974년 전후)의 시기이다. 그 이전에는 숫자도 적고 수인들에 대한 처우도 지금처럼은 아니었으며 수용소의 주목적도 사회와의 격리가 가장 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수용소로 대거 사람들이 수용되고 몇 차례의 폭동과정을 거치며 김일성과 김정일의 교시로 수인들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고 그 성격도 단순격리에서 사회의 긴장감 조성을 위한 계급투쟁의 현장으로 바뀌게 된다. 그리고 수용소의 관리방법도 확립된다.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
북한 당국이 수인들을 통제하는 방법은 우선, 죽지 않을 정도의 극소량의 식량을 제공하는 것이다. 어느 수용소에 있었는지에 따라 증언이 차이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하루에 500g의 옥수수를 지급한다. 14호(평남 개천교화소)에 수감되었던 김용씨의 경우는 한끼 옥수수알 25알 정도를 지급했다고 한다. 그리고 하루종일 탄광에서 고된 노동을 하는 것이다.

남한의 사람들은 사실 잘 인식을 할 수 없다. 그렇게 굶주리며 고된 노동을 해본 적이 없으니 애써 이해하려고 해도 잘 상상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루에 옥수수 7, 80알을 먹고산다는 것은 말 그대로 겨우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용소에 어릴 때 수용되었던 사람들은 대부분 키가 150cm가 넘지 않는다. 그리고 몸에 가죽만이 남겨진 상태로 살아간다. 때문에 처음 수용소에 수감되는 사람들은 그곳 사람들을 처음 보았을 때 엄청난 충격에 공포를 느낀다고 한다. 형편없는 몰골과 기워 입은 옷, 그리고 무엇보다도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걷지 못해 ‘쉐쉐’하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몸을 앞뒤로 흔들면서 그 힘을 이용해서 움직이는 모습에……. 김용씨는 이를 일컬어 ‘사람 설계도만 남은 사람들’이라며 개탄하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들이 일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가혹한 매질과 무엇보다도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거나 게으름을 핀다고 판단되는 경우 식량이 3분의 1로 줄어들기 때문이다. 수인들은 매질보다도 식량이 줄어드는 것을 더욱 무서워하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힘을 다해가며 일을 할 수밖에 없다.

일부에서는 북한의 일반적인 식량난 때문에 그럴 수도 있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지만 정치범수용소에서는 식량난 이전부터 최소한의 생명유지 식량만을 주었고 무엇보다도 제공하는 식량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먹지 못하게 한다. 텃밭을 경작하는 것은 고사하고 길에서의 풀이라든지 쥐, 야생동물, 산열매 등을 주워먹는 것도 엄격하게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수인들은 항상 극도의 영양실조에 시달리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먹을 것은 닥치는 대로 먹게된다. 만약 발각될 시에는 가혹한 매질과 구류장 행임에도 불구하고 몰래 풀이라도 한 움큼 입안에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이다.

북한 당국이 이러한 비인간적인 방침을 취하는 것은 극도의 굶주림으로 허약해지는 것이 관리에 쉽기 때문이다. 수용소에서는 워낙 가혹하게 수인들을 대하기 때문에 항상 수인들은 적개심을 품고 산다. 그러나 보위원이나 경비대에 대들려고 해도 워낙 허약하기 때문에 대들지도 못한다. 그리고 탈출을 하려고 해도 경비는 둘째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는 몸으로는 겹겹이 둘러싸인 산을 넘지 못한다.

그리고 식량을 통해 수인들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수인들은 무엇보다 그나마의 식량이 줄어드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 이러한 생명의 본능을 이용하여 수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어 말을 잘 듣게 하는 것이다.

죽음의 수용소 내 죽음의 구류장
수인들이 줄어드는 식량 못지 않게 무서워하는 것이 구류장 행이다. 보위원에게 대들거나 식량을 훔치거나 욕을 하는 등 규율을 어긴 사람에게는 3개월의 구류장 행이 기다린다. 혁명화 구역의 구류장에서는 그나마 살아오는 사람이 있지만(물론 대부분 6개월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완전통제구역의 구류장에서 살아남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우선 증언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어 보이는데 혁명화 구역의 구류장은 매질은 기본이고 하루 4시간의 수면시간과 식사시간을 제외하곤 하루종일 0.5평의 좁은 곳에서 무릎을 끊고 앉아 있는 것이다. 단순한 벌 같이 보이지만 3개월 동안 있고 나면 다리가 썩어서 폐인이 되고 만다. 구류장은 햇볕이 들지 않고 습기가 많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온몸의 이가 스멀거려 움직이지 않을 수 없으나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매질이 가해지기 때문에 움직일 수도 없다.

그리고 더욱 심한 수용소의 경우에는 아예 매질과 고문으로 일관한다. 김용씨와 안명철씨처럼 완전통제구역을 경험한 사람들은 구류장에서 살아 돌아온 예가 거의 없다고 한다. 죽을 때까지 매질과 폭력이 가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안명철씨는 구류장 옆의 탄약창 경비를 서는 것이 제일 고통스러웠다고 증언한다. 밤새 계속되는 매질과 비명소리를 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구류장은 수용소 내에서도 공포의 대상이다. 당연히 수인들은 구류장에 가지 않기 위해 극도로 몸조심을 하게 된다. 구류장 역시 극도의 공포감을 조성하여 통제를 쉽게 하려는 의도에서이다.

공개처형과 비밀처형
수용소 내에서는 공개처형과 비밀처형이 이루어진다. 사안에 따라 처형방법이 나누어지는데 일반적인 규율 위반의 경우와 탈출하다 붙잡힌 경우에는 공개처형이 이루어지고 수인들에게 악영향을 줄 것 같은 경우에는 비밀처형이 이루어진다. 공개처형의 경우에도 총살형과 교수형이 나뉘어져 있는데 예를 들어 탈출을 기도하여 관할 구역 내에서 잡히면 총살형에 처하고 관할 구역 밖에서 잡히면 교수형에 처하는 식이다. 그러나 워낙 죽음이 일상화되어 있기 때문에 공개처형은 주민들에게 별다른 공포감을 주지는 못한다고 한다.

김용씨가 있던 14호 수용소에서는 공개처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14호 개천수용소는 90년에 공개처형에 분노한 수인들이 보위원 8명을 살해한 사건이 발생한 이후 공개처형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때 14호의 수인들 가운데 1,500여 명이 사살되었다고 한다.

비밀처형은 수용소 내의 비밀처형장에서 이루어지는 데, 한 밤중에 대상자의 집 앞에 트럭을 대고 조용히 실려 가는 형태이다. 때문에 간밤에 누구누구가 없어졌더라 하면 비밀처형장으로 끌려갔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일상적인 구타와 죽음
수용소에서는 비단 굶주림으로 인한 죽음, 구류장이나 공개처형을 당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일상적인 죽음의 공포는 항상 드리워져 있다. 특히 보위원이나 경비대원들의 폭력에 희생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러한 일이 가능한 가장 큰 이유는 보위원이나 경비대원에게는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수인들을 죽여도 아무런 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안명철씨의 경비대에서는 기르던 개가 어린 소녀들을 잡아먹어도 크게 문제삼지 않고 오히려 개를 사납게 잘 키웠다고 칭찬을 받았다는 믿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그날 보위원의 기분이 어떤가에 따라서 단순한 매질로 끝나기도 하고 운이 나쁘면 죽기도 한다. 꼭 총으로 죽이진 않더라도 수인들의 몸이 워낙 허약하다보니 단순한 매질에도 죽는 경우가 많다.

보위원이나 경비대는 수인들을 벌레보다도 못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물론 그들도 밖으로 나가면 보통의 주민들이다) 자신들의 스트레스 해소 차원으로 매질을 하거나 죽이곤 한다. 안명철씨가 신병일 때 선배 경비대원들은 단순히 무술 연습차 수인들 10명을 세워놓고 무차별 가격을 했다고도 한다. 때문에 수인들은 항상 보위원들과 경비대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노력하고 가능하면 부딪치지 않으려고 한다.

내부 밀고 시스템
북한 사회 전체가 이중 삼중의 감시 시스템이 존재하지만 역시 정치범수용소의 그것보다는 못하다고 할 수 있다. 70년대의 폭동 이후, 그리고 김정일의 집권과정에서 대거 정적들이 수용된 이후 수용소의 내부 감시 시스템은 더욱 정교해졌다. 여러 증언자들의 증언은 대체적으로 3명 중의 1명은 보위원의 첩자라고 한다. 이들은 주로 수인들이 불만사항이 있는지를 염탐을 한다. 그래서 사소한 불평불만을 이야기하더라도 보위원에게 신고한다. 수용소 내에서 사실 특수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조직적인 행동이 일어나기가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은 사소한 불평을 혼잣말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만약 이 말이 보위원의 귀에 들어가면 그 사람은 구류장으로 끌려가고 만다. 이 때문에 김용씨는 14호 수용소에서 3년 간 있으면서도 10여 명의 사람 외에는 이름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그만큼 서로가 말하기를 두려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 밀고자들에게 좋은 혜택을 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탄광이나 건설공사장에서 토끼 사육장 같은 곳으로 보내주는 등 아주 조금 편한 일을 시켜주는 것이다. 물론 그나마도 오래 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그들에게는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내부 첩보 시스템은 담당보위원들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관리되고 조직적으로 운영이 된다. 그리고 이들 첩자들 중에는 보위원들의 신임을 얻고자 보위원들보다 더 악독하게 다른 수인들을 다루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내부 첩보 시스템은 비단 수인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보위원들 내에서도 존재하기 때문에 보위원들은 수인들에게 조금의 동정심을 표할 수가 없다. 만약 수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등의 동정을 표하다 발각되면 자신이 탄광으로 쫓겨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더 악랄한 보위원이 내려온다. 강철환씨가 수용소 내의 학교를 다닐 때 아이들에게 자상한 담임교원이 얼마 지나지 않아 교체되고 그 자리에는 용평 완전통제구역에서도 소문난 악질교원이 내려왔다고 한다. 김용씨의 경우도 새로 온 마음씨 좋은 보위원이 3일만에 교체되었다고 한다.

보위원 내에서의 첩보는 비단 수인들을 다루는 데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수인들 내에는 이전 사회에서 고위층에 있었던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이들이 사람들을 통하여 보위원들에게 공작을 하거나 봉기를 꾸미는 경우가 몇 건 있었다. 이러한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일반사회보다 더더욱 수용소 내에는 이중 삼중의 대비를 한다고 할 수 있다.

북한 당국이 정치범수용소를 만들고 유지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는 그냥 죽이기에는 아까우니 죽을 때까지 일이라도 시켜 이들의 노동력을 착취하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범수용소를 통해 계급투쟁의 현장을 존속시킴으로써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일반적인 의미의 정치범수용소와는 큰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정치범수용소의 목적은 사회와의 격리이다. 그러나 북한에서의 수용소는 사회와의 격리와 함께 노동력 착취와 사회의 긴장감 조성이라는 목적이 함께 있다. 즉, 모든 북한 주민들이 아무리 말을 잘 듣고 수령의 사상에 충실해도 공포통치를 위하여 정치범수용소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치범수용소의 상황을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인 극단적 상황으로 만든 근본적인 이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