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편지
북한이 심상찮다

1

이번 호 ‘편집자의 편지’는 당초 ‘2003 북한자유법안’에 대한 이야기로 기획되었습니다. 그러다 한국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어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자 ‘세계 각국의 지도자 가운데 김정일은 탄핵 1순위’라는 조금은 식상한(?) 내용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 다시, ‘북한이 심상찮다’는 내용으로 급히 바뀌었습니다. 원래 <Keys>는 원고를 다 작성한 후 제목을 붙이지만, 이 글은 제목부터 정하고 써내려 가는 중입니다. 그만큼 들려오는 소식들이 심상치 않습니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는 여러 통로를 통해 북한과 북-중 국경지대의 최근 소식을 입수하고 있습니다. 여러 소식 가운데 신빙성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정보로서의 가치, 그러한 상황이 발생하는 배경 등을 따져 종합적으로 정세를 분석합니다. 사실 이러한 정보를 오래 접하다 보면, 욕조에 몸을 담근 사람이 수온의 상승을 쉽게 감지하지 못하듯 변화에 무뎌지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역으로, 그러한 정보를 처음 접해보는 사람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사실인데도 주관적으로 과민하게 반응하며 호들갑을 떨기도 합니다. 정보취합자가 경계해야 할 두 가지 편향일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2-3달 사이 들어오는 소식이 심상치 않습니다. 북한에 무언가 변화의 조짐이 보입니다. 그것이 일시적인 것인지 장기적인 것인지, 부분적인 것인지 전체적인 것인지, 사실 그대로 인지 과장된 것인지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분석해 보아야겠지만, 북한문제에 관심을 갖고 <Keys>를 애독하시는 독자 여러분께는 보다 빠른 정보를 전달해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최근 북한 및 북-중 국경지대에 대한 정보 몇 가지를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2.

첫째, 북한 주민들의 합법적 중국 방문이 확대되고 있습니다. 언론보도를 통해 익히 들으셨겠지만, 올해 초부터 북한 당국은 중국에 친척이 있는, 일정 연령 이상 주민들의 중국방문을 보다 간소화했습니다. (50세 이상이라고도 하고, 35세 이상 62세 미만이라는 정보도 있습니다.) 통행증 행태의 간단한 증명서만으로 방문을 할 수 있다는 증언이 있고, 그게 아니라 여권 발급이 쉬워졌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든 하여간 합법적 중국 여행을 확대하여 탈북-체포-재탈북의 악순환을 막아보려는 의도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둘째, 그러면서 북-중 국경의 북한측 국경에 대한 경계가 더 삼엄해졌습니다. 김정일의 생일을 맞아 국경경비를 4중으로 강화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중국측은 이미 지난해에 인민해방군을 국경지역 마을마다 주둔시켜 경비태세를 강화한 바 있습니다. 합법적 영역은 확대하고 비합법적 영역은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의미입니다.

셋째, 중국정부의 탈북자 단속의 방향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지난 <Keys> 1월 특집호 ‘북-중 국경지역을 가다’ 에서 전하 바 있듯 최근 중국 공안당국은 탈북자보다는 탈북자를 지원하는 단체 및 개인을 단속하는 데 비중을 더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가지치기를 하는 것 보다 뿌리를 뽑아내는 것이 근원적인 치유책이라는 생각이겠죠. 또한 정책적인 것인지 개인적 동정심에 의한 것인지는 몰라도, 중국에 오래 거주한 탈북자, 특히 중국인 남자와 결혼해 살고 있는 북한 여성의 체류를 용인해주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과거에도 그런 사례가 있었지만 최근에는 더욱 빈번하게 이러한 사례가 청취되고 있습니다.

넷째, 북한 내부의 상황이 상당히 어려워지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과거에도 이맘때쯤에는 춘궁기(春窮期)를 맞아 식량사정이 어려웠지만 올해는 그것이 좀 더 빨리 찾아오고 그 강도 또한 세진 것 같습니다. 한 두 달 사이에 급격히 상황이 나빠졌습니다. 특히 평안북도와 자강도 쪽 상황이 좋지 않은데, 몇 년간 들을 수 없었던 ‘굶어 죽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종종 들려오고 있습니다. 북한 정부가 다급해졌는지, 중국에서 북한으로 수출하는 쌀의 양이 갑자기 늘어났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전력사정도 악화되었습니다. 물론 원래 안 좋긴 했지만 하루에 1-2시간이라도 전기가 들어오던 것과 달리 요새는 보름이상 단전이 되기도 하고, 기차도 1990년대 중후반처럼 가다 서다를 반복하고 있다 합니다.(북한의 기차는 거의 전기로 작동합니다.)


3.

변화의 흐름을 감지한 언론에서는 최근 상황을 발 빠르게 보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15일 조선일보와 국민일보는 서울대에서 개최한 ‘한-독(韓-獨) 통일포럼’에서 연볜(延邊) 과학기술대학 김진경 총장이 발언한 내용을 인용하여 최근 북한 소식을 전했습니다. “북한은 주민들이 중국에 건너가 개인적으로 식량 등을 구해올 수 있도록 중국에 친척이 있고 보증인을 내세운 55세 이상 주민들에 한해 중국 통행증을 즉각 발급하는 조치를 계획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 협동농장의 토지를 개인에게 분할 임대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문화일보는 3월 15일과 17일 중국 특파원이 취재한 내용을 특집으로 내보내면서 “북-중 접경지대 공식 개방”이라는 제목을 달았습니다.

이러한 북한 내부와 북-중 국경지대의 변화를 놓고 여러 가지 해석이 분분합니다. 우선, 북한 당국이 북-중간의 국경을 완전히 개방하는 초기 단계로서 취하는 조치가 아니겠냐는 것입니다. 주관적 바람이 담겨있는 전망이긴 하지만 아주 신빙성이 떨어지는 관측이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최근 급격히 어려워지고 있는 북한 내부 실정을 놓고 볼 때 북한 정권으로서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전통적(?)인 해석으로 ‘그래 봤자 위기를 모면하려는 일시적 방책’이라면서 크게 의미를 두지 않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북한의 중국에 대한 개방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점쳐 봐야 할 시점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 최근 북한은 어느 때보다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 확실합니다.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개방밖에 대안이 없음은 북한 당국도 익히 알고 있을 테지만 수령독재체제의 붕괴가 두려워 지금껏 이를 거부해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중국을 향해서 만이라도 개방을 하는 것이 북한 정권이 취할 수 있는 최소이자 최대, 최후의 선택일 것입니다. 그럼 개방의 폭은 어느 정도가 될 것이며, 그것은 과연 어떠한 영향을 미칠까? 흥미롭게 연구해볼 대목입니다.

4.

북한문제 해결의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김정일 정권도 살고 인민도 사는 것입니다. ‘바람직’이라는 표현이 적절치 않지만 김정일이 하루 아침에 개과천선하여 인민 앞에 지난 죄를 뉘우치고, 인민들 역시 그런 반성을 인정하여 정권을 용인하면서 새로운 체제로 돌입한다면 그만큼 좋은 시나리오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꿈 속에나 가능한 일이어서, 김정일이 그렇게 변화하기를 기대한다는 것은 개구리 등짝에 날개가 돋기를 기다리는 것만큼 대책 없는 일이고, 김정일이 스스로 독재체제를 해체했을 때 인민들이 그의 지난 죄를 용서해줄 가능성 역시 제로에 가깝습니다. 불가능한 일에 미련을 두는 것만큼 어리석은 경우도 없습니다.

김정일 정권은 대외개방과 그 운명을 같이 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개방을 하는 순간 김정일 정권이 곧장 무너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제한적이나마 - 특히 중국을 대상으로 하여 - 김정일 정권이 개방을 추진할 가능성이 있다고 우리는 분석해왔으며, 그러한 개방을 김정일에게 권유(?)해왔습니다. 김정일은 이런 권유를 주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에 이르러서야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최근 정세가 중국 쪽을 향한 개방의 초기단계가 맞다면 지금이 바로 그 시점 ? 김정일 정권이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시점입니다.

비록 제한적 개방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것을 환영합니다. 우리가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우선 개방으로 인해 북한 인민들의 생활수준이 나아질 것이니 두 손 들어 환영합니다. 나아가 개방은 보다 많은 대외정보와 비교안목을 북한 인민들에게 전해줄 것이니 환영합니다. 한번 시위를 벗어난 화살이 되돌아 올 수 없는 것처럼, 한번 바깥 바람을 쐰 사람들이 다시 밀실생활을 적응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제한적이든 전면적이든 일반 개방을 시작하면 더욱 확대하면 확대했지 축소하기 어렵다는 점에 김정일 정권의 딜레마가 있습니다. 이것이 지난 몇 년간 김정일을 괴롭힌 고차방정식이었을 것입니다.

저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북한민주화운동은 김정일을 돕는 운동”이라고 한 적이 있습니다. 결코 풀리지 않을 그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 끙끙대고 있는 김정일씨의 고민을 해결해주는 운동이라고 말입니다. 자신이 권좌에서 물러나기만 하면 될 텐데 왜 고생을 자처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저 역시 최근 북한과 북-중 국경의 변화조짐을 ‘대(對)중국 개방 신호탄’이라 해석하고 싶습니다. 제발 김정일이 그 돌이킬 수 없는 길에 한 발을 내딛기를 바랍니다. 올해 북녘 땅에 개방의 봄바람이 불 수 있을까요? 독자 여러분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PS. 이 글을 마감하고 나니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하고 있다”는 소식이 속보로 들어오는군요. 정말 김정일이 다급하긴 다급한가 봅니다. 이 글이 독자 여러분의 손에 들어갈 즈음엔 김정일의 중국 방문을 마무리하고 북한에 있을 것 같습니다. 제발 이번에 북한에 돌아가서는 쓸데없이 중국의 외형만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자신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 깊이 반성하면서 과감한 개혁 개방 노선을 선포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