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북한의 여성문제

최진이
1959년 평양 출생
김형직사범대학 작가반 졸업
조선작가동맹 소속 시인
99년 11월 입국
대표작 ‘로병들이 돌아온다’

북쪽에서 시문학(詩文學)을 전공한 내가 남쪽에 와서 우연히 공부하게 된 ‘여성학’은 양성(兩性)의 긍정적 관계개선으로 인류의 새로운 평화적 장을 펼쳐가는 매우 고무적인 학문이었다. 이것은 다른 말로 여성학이 지금까지의 남북한 관계에 도전하는 최고 학문으로 자리매김 될 수 있으며 또 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런 측면에서 북한 여성이 안고 있는 문제를 살펴보는 것은 이 시대가 제기하는 어떤 과제에 부응하는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되었다.

북한 여성문제가 정치화(政治化) 되어온 과정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이 선포되자 소련군의 후광 속에 원산 상륙(9월 19일)을 단행한 김일성은 9월 21일 평양에 입성하여 10월 10일 조선공산당을 창건하였다. 나흘 후에 평양 모란봉공설운동장에서 개선 연설식을 가졌고 한 달 후인 1945년 11월 18일, 북조선 근로단체조직으로서는 최초로 여성동맹을 조직하였다.

북한(김일성)이 여성동맹 조직을 이처럼 서두른 이유를 보기로 하자. 당시 빨치산 출신을 위주로 한 공산당세력은 ‘조직의 순수성’을 운운하며 대중을 포섭하지 않은 결과 타 세력에 함몰될 정황에 처해있었다. 이 위기의 상황은 김일성으로 하여금 어느 정치 세력도 눈길 돌리지 않는 여성 - 당시로서는 미미한 존재로 취급되었던 - 일반을 주시하도록 하였고 그를 공산당 지지 확률을 가장 높게 낼 독립변수로 포착하도록 하였다. 하여 당 외곽단체로는 최초로 여성동맹이 북조선에 조직되었다. 뒤이어 직업총동맹, 민주청년동맹, 농민동맹이 결성되고 그 세력에 기반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창립 초기 이 모든 사회단체들은 명시적 성격만 띠었을 뿐 대중과의 유기적 연결이 안 되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김일성은 토지개혁 법령, 남녀평등권법령, 중요산업국유화법령을 발표하였다. 농민들에게는 땅을, 노동자들에게는 공장을, 여성들에게는 남자들과 꼭 같이 주권행사에 참여할 권리를 해당 사회단체를 통하여 부여하도록 함으로써 북한의 다수계급을 자기 영향 하에 확실히 들여세운 것이다.

김일성이 첫 민주선거를 이틀 앞두고 여맹 일꾼들을 만난 자리에서 여성들이 선거에 적극 참여하도록 강조한 사실은 김일성이 자기 세력의 지지자, 후원자로서 여성의 역할을 얼마나 중시해 왔는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북한은 국가 앞에 난제가 제기될 때마다 여성이라는 세력을 효율화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하여 전시에는 교환수 및 간호원 자격으로 여성들의 전선탄원(戰線歎願)을 적극 장려하였다. 이것은 남성 유일성으로 구성된 집단 특유의 거친 분위기를 유연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그들의 전투력을 일층 고조시키는 역할도 병행케 하였다. 물론 그에 앞서 가져온 보다 중요한 정치효과는 남녀평등의 구호 하에 ‘여성도 전선 참여를 할 수 있다’라는 ‘양성동등’ 이념 승리의 개가였다. 이는 김일성 개인의 창작품이 아니고 구(舊)소련 사례를 모방하는 과정에 얻어진 떡고물이었다.
전쟁이 끝난 전선에서 성한 몸으로 집에 돌아온 남자들은 많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 만연했던 전쟁히스테리환자들, 부상자들, 전사자들…. 이들로 인한 전후 인민경제건설의 인력 공백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북한의 도시와 농촌은 말 그대로 잿더미로 뒤 덮여 있었다. 어느 외신기자가 “백년이 걸려도 일어서기 힘들다”고 한 표현 그대로였다.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한껏 지쳐있었다. 북한이 다시 일어서자면 어떤 획기적인 응집력이 필요했다. 남성노력자의 인력만으로 전후복구 건설은 절대 불가능 하였다. 이러한 상황 하에서 김일성은 1958년 7월 19일 내각결정 84호 ‘인민경제 각 부문에 여성들을 인입 시킬 데 대하여’를 채택하였다. 여성들을 사회사업에 동원시켜 전후복구건설의 다급한 인력 공백을 메우라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1966. 10. 20∼10. 22까지 전국 보양원(保養員) 대회를 열어 그간 아동보육교양정책 수행과정을 총화하고 여성인력을 보다 효율화 할 수 있는 근본 대책을 토의하였다.(북한의 탁아 보육제도 역시 구소련의 경험을 모방한 것이었다.) 1966년 11월 1일부터 ‘모성노동자들의 노동시간제’를 전국적으로 실시하도록 하였다. 즉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모성노동자 중 만 13세까지의 자녀를 3명 이상 둔 여성은 하루 노동시간을 6시간으로 줄였다. 또한 연속생산공정과 개별적으로 작업에 늦게 착수하거나 먼저 끝낼 수 없는 부문에서 일하는 모성노동자는 주중 5일(하루 8시간씩) 근무하고 일요일을 포함하여 주 2일은 집에서 휴식하게 하였다. 이 규정에 해당되는 모성노동자들의 식량, 노동보호물자, 사회보험에 의한 연금 지불, 정기휴가는 종전과 꼭 같이 보장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들이 현실화되기에는 아직 거리가 있었다. 장거리마다 널려진 게딱지같은 술집들, 월급 타는 날이면 돈 봉투 차고 집에 가는 남자들을 악착하게 꼬셔 들여 주머니란 주머니마다 탈탈 털어 내던 그 숱한, 그 영악한 ‘길거리 여자’들……. 김일성은 ‘건국사상 대개조운동’이라는 또 하나의 발상으로 이런 ‘비(非)사회주의적’인 여성들까지 사회주의 대건설에 깡그리 끌어들였다.

여성들을 노동에 대거 인입시킴에 있어서 그래도 발목을 잡는 것은 역시 어린이보육문제였다. 단순한 보육차원을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하여 1971년 8월부터 탁아소, 유치원에 전문 의료일꾼을 배치하고 보육교양시설을 여성들의 일터에까지 대대적으로 구축(그전에는 인구 밀집 구역들에 탁아, 유치원이 있었음)하도록 하였으며 유치원 탁아 부식물공급체계를 새로 도입해 육아보육제도의 물질적 토대까지 조성시켜 놓았다.

1972년에는 남성과 동등한 여성의 임금권, 여성노동의 보호, 유해노동 금지, 산전산후 휴가, 가내작업반 및 가내협동조합 설치 등 여성을 위한 실질적 조치들을 사회주의 헌법으로 채택하게 하였다. 1990년대 초반부터 77일이던 산전산후휴가를 120일로 늘이도록 하였다. 두 달 된 신생아를 탁아소에 맡긴 결과 발병률이 높고 그로 인한 자모의 병결률(病缺率)이 증가한 탓이었다.

북한이 경제적 침체기에 들어서면서 여성문제를 또 한 번 정치화하는데, 1990년 새로 제정한 가정법에서 가정부양의무자를 가족으로 규정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가정부양의무자를 ‘국가’로 설정했던 종전 법으로부터 국가가 도피하여 그 짐을 ‘가족’의 이름 하에 여성 일반에게 일방적으로 넘겨씌울 수밖에 없었던 북한의 암울한 실태가 반영되어 있었다.

김일성 家와 이어져온 북한 여성문제의 맥락

김일성 가와 북의 여성문제는 예민하면서도 구체적인 연관관계에 있다. 북의 여성문제는 곧 김일성의 처의 문제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만큼 김일성의 처들은 북의 여성문제에 관여해왔고, 김정일의 부상(浮上)은 김일성 후처의 역할제한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기에 북한여성문제는 그만큼 위축되지 않을 수 없었던 특수한 관계가 있다.

우선 김일성의 전처 김정숙이 생존할 때에는 그녀가 김일성의 본처로 떳떳한 만큼 북의 여성문제도 북한 정치사에서 당당하게 쟁점화(여맹 창립, 남녀평등권 법령 발표 등)되어 왔다. 김정숙은 김일성을 내조하는 것과 함께 북한 여성문제 쪽은 자신이 더 살펴봐야 한다는 인식(김일성 처의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서도 그렇고)이 있은듯했다. 그녀는 해방 후 평양방직공장, 제사공장 등 여성노동자들이 집중되어 일하는 곳에 드문드문 나가 여성노동자들과 대화도 나누고 새 민주조선이 여성들에게 가져다 줄 선물에 대해 각인도 시켜 주었으며 김일성에게 여성들이 처해있는 현재실태를 알려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김일성의 정열적인 여성편력으로 김정숙의 개인적 고민이 발생하였다. 특히 북조선 주둔 쏘련군 노마니꼬부 사령부 타자수로 있던 15여년 연하인 김성애에 대한 김일성의 이성적 접근은 김일성 조강지처의 지위마저 위협할 정도였다.

김성애라는 여성 일개인의 매력도 매력이지만 노마니꼬브 사령부의 의중을 파악해야 한다는 절박한 정치적 이유가 김일성을 더욱 조바심 나게 한 듯 했다. 함경도 내기라면 손 사레 치던 평안도 출신인 김일성의 친가(만경대 일가) 쪽도 함경도 태생 김정숙보다는 평안도 출신 김성애 쪽을 더 반기어 손들어 주었다. 고독했던 김정숙은 난산임에도 불구하고 의사들을 일체 들이지 않고 방문을 안으로 닫아 건채 홀로 해산하던 중 숨을 거두었다(김정숙이 부부싸움 중 홧김에 쏜 김일성의 총알에 맞아죽었다는 설도 있음). 따라서 김일성의 후계자와 본처와의 정치적 알력, 나아가서 권력자 대 여성문제는 이때부터 범상치 않은 진통을 내재하고 있었다고 볼 수가 있다.

김성애의 김일성 정실부인으로서 지위는 김정숙 사후 15여 년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다. ‘조선중앙연감’에 실린 북한 여맹 대회기록을 보면 북조선민주여성동맹 1차, 2차 대회는 명시가 되어 있지 않다. 3차 대회부터 조금 언급이 있기 시작한 것이 4차 대회에 이르러서는 대회 보고문까지 실릴 정도로 여성문제가 뚜렷하게 부각이 된다.

또한 북한 노동당 대회 역사를 봐도 여성문제를 기본과업의 하나로까지 본격적으로 등장시킨 대회는 여맹 4차 대회가 있기 한해 전에 열렸던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뿐이다. 이 대회 보고문에는 도시 여성과 농촌여성의 가정 부담을 덜기 위한 문제들이 구체적으로 지적되고 있다. 도시 여성들을 위해 부식물가공품의 공업화를 실현하고 전기밥가마, 냉장고, 세탁기 등을 대대적으로 생산하여 가정들에 공급해주며, 농촌 여성들을 위해서는 농촌 리의 수도화(농촌 여성들의 머리에서 물동이를 내리우기 위해), 버스 화를 제시하고 있다.

그 1년 뒤에 열린 여맹 4차 대회는 조선노동당 제 5차 대회가 내 놓은 의제들을 반복할 뿐이어서 당 제5차 대회에서 명시한 여성문제가 누구의 고안물인가를 구분하는 것은 애매한 부분이 있다. 김일성의 창안품이 아닌가 생각될 수 있지만, 놓치고 넘어가서 안 될 점은 지금까지 열려온 당 대회들에서는 여성문제를 이렇듯 구체적으로 전면적으로 논의한 예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북한 내부 여성들 속에서는 당 제 5차 대회가 제시한 여성문제는 김성애 건의의 반영 물이라는 설이 압도적이다. 여맹 4차 대회에서 행한 연설 중에 김일성은 여성대표들에게 의미심장한 약속을 한다. 여맹을 산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 여맹 조직체계를 혁명적으로 개편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약속은 바로 여맹을 노동당 부서 직속으로 넣는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북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남성 인터뷰 대상자는 이런 말을 하였다.

“1973년도인가 74년도쯤에 여맹을 당중앙위원회 부서에 넣고 군 여맹도 당 안에 넣었어요. 그때 여성들의 지위가 아주 상승했어요. 여성들이 외화벌이도 하게 하자고 여맹 부서들에 자동차도 주고 지휘용 승용차도 주었어요, 그러니까 다른 부서들이 여맹 신세를 많이 지게 된 것 이예요.”

조선노동당 제5차 대회에 이어 열린 여맹 4차 대회는 북한의 획일적인 1인 지도체제의 분열을 가져왔고 그것은 1인 지도체제에 습관된 일부에게 혼란을 일으키는 결과도 초래하였다. 다음의 인터뷰 사례는 이를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아유, 그거 여맹을 당위에 올려 세우고, 지방 당에서 여맹에 절절 기게 만들고, 여맹은 여맹 인데 뭐 당위에 올려 세워? 사회주의 체제는 분명히 노동당 1당 체제인데 여맹이 당위에 올라앉은 그것은 정말 잘못 된 거야. 게다가 김성애가 시 당을 자기 측근으로 꾸렸단 말이야. 자기 동생 김성갑을 시 당 조직부장으로 만들고 그 밑의 동생 김성윤이는 호위국 2국장으로 만들고, 아, 호위국 2국장이면 정무원 부장급인데 제가 뭐라고 정무원총리와 딱딱 반말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문제를 대회의 기본과업으로까지 등장시켰던 당 제5차대회는 북한 당 대회 역사 중 가장 실질적이고 현실성 있는 문제를 다룬 대회로 북한 주민들 사이에 각인되어 있다. 하지만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확고히 자리 매김 되고, 자기 어머니의 연적이자 자신의 정적(김성애는 김정일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되는 것을 음으로 양으로 반대하였다)인 김성애와 그의 ‘일당’을 ‘곁가지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타진시켜버리자 북한 여성문제는 금방 기를 잃었다. 여성문제를 들고 나오면 김성애 동정자로 김정일에게 비추어지기가 십상인 탓이었다.
북한의 의식 있는 여성들은 북의 여성문제를 복귀시킬 수 있는 인물로 김정일의 누이동생 김경희를 지목하였으나 그는 끝까지 여성문제에 손을 대지 않아 실망을 자아냈다. 김경희의 입장에서 보면 계모가 명목상 쥐고 있는 여성문제에 자기가 촉수를 뻗치는 것이 어불성설로 여겨졌을 것이었다. 물론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가 여맹위원장으로 명목상 존재하는 이유도 있긴 하겠지만 설사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김정일의 부인들이 있는데 자신이 나서기가 껄끄러울 것이다. 물론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현재 사망)이나 지금 중앙당에서 막강한 권력을 시위하고 있는 고영희는 여성문제를 전면에 들고 나올 만한, 즉 김정일의 정실부인으로서 확실하게 나설 만한 지위가 되지만 그들의 생애가 떳떳하지 못하다. 전자는 유부녀이고 후자는 자본주의 사회 태생 여성인 까닭이다. 또 현재 김정일의 ‘부인’으로 명명되고 있는 김영숙은 김정일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여성이다.

김정일이 표면화하기 두려워하는 이러한 내적인 사정들은 단지 북한의 여성문제를 넘어서서 북한사회의 생사존망에 영향을 미칠 변수로 작동될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북한여성문제가 김일성 가에 장악됨으로써 북한여성문제가 권력의 시녀로 전락된 사실도 참고로 감안해 볼 수 있다.

사회 문화 및 가부장제적 통념이 빚어 낸 성적 차별

북한여성들은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직업 운’을 타고 나온다. 왜냐하면 중학교 졸업 후 6개월 이상 무직(無職)인 자는 법적 제제를 받도록 엄격한 제도적 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중학교 졸업 여성은 1차 적으로 성분, 권력, 실력(운)에 따라 당당히 또는 간신히 대학문턱을 넘어서는데 그들의 대학 진학 정도는 평양시에서 한 학급(평균 40명)당 20∼40%, 대도시학교에서 10∼25%, 산골 및 농촌 학교에서 1∼3%이다. 그 다음 본인의 희망이나 학교 측의 ‘선발’에 의한 인민군대 입대(평균 약 2∼8%)자를 제외하고 나면 모두가 사회직장에 진출해야 한다. 북한에서 노동직 이라고 해도 출판사나 연구소, 부 위원회, 예술기관 같은 곳에 입직하면 손끝에 기계기름 한 방울 안 묻히고 화이트칼라로 평생 귀족노동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소위 ‘빽’이 없는 경우 구역 노동과의 집단배치에 복종하는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다. 그곳에서 하는 배치의 가장 절망적인 점은 본인의 취미나 지향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이쁜 얼굴과 보드라운 손, 새로 받은 회색작업복을 먹물처럼 시꺼먼 기계기름에 썩을 듯이 절이며 온종일 기계소음에 청각이 다 망가질 듯한 악조건 속에 꽃 같은 청춘을 파묻어야 한다. 그래도 사무기관에 들어가면 어떻게 하다 대학추천 받아 다시 한 번 운명전환의 기회를 가질 수 있지만 공장단위에 한번 들어가면 상급학교에 가도 그 부분과 관련된 쪽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왜냐면 이곳은 선호도가 최저치이므로 국가적 조치에 의해 한번 청장년들을 배정받은 기업소 측은 절대로 자기 ‘먹이’를 놓아버리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화이트칼라 보다 이쪽의 노임이 높은 가? 그렇지도 않다. 화이트칼라 직은 노임이 안정되어 있지만 블루칼라 직은 소위 ‘계획’이란 것을 초과완수 하면 노임이 올라가도 그 계획완수가 제살 깎아먹기이기도 하려니와 80년대 중반부터는 자재부족으로 그마저도 쉽지 않다. 그래도 여성들은 ‘결혼’이라는 구실이 있어 공장을 빠져 나올 절호의 기회나마 가진다. 하지만 그렇게 나와 보았댔자 별 볼일 없다. 젊어서 배운 기술이란 게 쇠붙이 다룬 경험뿐이니 시집가서 직업을 바꾼다 해도 그 식이 또 장식이다. 울며 겨자 먹기로 그 직종을 대다수가 다시 택한다. 이러한 사회 문화적 요인 위에 전통적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가부장제적 통념의 이데올로기까지 겹쳐져 여성들은 눈에 띄는 분명한 차별대우를 받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북한은 1972년 사회주의 헌법에서 여성들에게 남성과 동등한 임금을 지불할 것에 대한 조항을 새롭게 제정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법적 조치도 북한사회에 유령처럼 배회하는 전통적 가부장제 통념의 벽을 넘지는 못한다. 실례로 북은 모든 업종에 급수제가 존재하는데 3년에 한 번씩 시험을 봐서 이에 통과되는 자의 임금만을 올려주는 장치가 있다. 가부장적 통념은 바로 이 틈새를 공략한다. 즉 통과자를 남성 위주로 하며 높은 급수에 올라갈수록 여성을 배제시킨다. 또한 간부선출의 기회도 남성에게 대부분 부여함으로써 간부에게 해당되는 고임금과 국가적 혜택이 그들 중심으로 차려지게 한다. 육체적 노동을 요하며 사회적으로 비천하게 인식된 분야들에는 사회적 약자인 여성을 위주로 배치함으로써 여성의 사회적 소외도를 높이고 있다.

주택도 결혼한 남성에게 군(구역) 주택 배정과에서 할당하도록 함으로써 여성이 인간의 원초적 안정을 추구하는 요람을 가질 권리를 상실케 하였다. 각 대학 입학 비율도 여성을 남성에 비해 평균 30% 이하로 한정시켜 여성들의 대학 진학을 제한시킨다. 사무직들에서 1∼2년 간격으로 진행되는 해고 비율을 여성 쪽에 높게 둠으로써 여성들이 불이익을 우선 당하게 한다. 이혼녀, 미혼녀에 대한 사회적 질시와 이혼에 대한 법적 통제는 여성의 피해율을 한층 증가시킨다(2001년 북한을 탈출한 지식인 출신 남성의 증언에 의하면 현재 북한은 이혼을 ‘폭력의 첫째 조건’으로 규정하고 자율화하는 중 이라고 함). 여성이 결혼하면 무조건 남성을 따라가야 한다는 가부장제적 통념과 법적 규제, 남성이 거주한 지역 하에서만 아내도 직업을 구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는 여성의 다양한 권리를 차단시킨다. 여성을 질시하는 가부장제적 문화는 탁아제도에서도 보이는데 여성들이 신생아보육기간 갖게 되는 2시간당 30분씩의 수유시간에 대해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몇 분만 늦어도 그 여성의 해임문제를 들먹이는가 하면 총회나 당 회의에 비판감으로 부각시켜 집단 소외시킨다.

가부장제 문화의 가장 대표적 실례로 김정일의 본거지인 중앙당본부는 여성일꾼을 거의 쓰지 않으며 중앙당 직원 출퇴근 전용 후문은 여성의 접근이 원천 금지되어 있다. 또한 강반석, 김정숙을 여성의 모델로 내세워 가정에서 여성의 역할을 강조함으로써 ‘나라의 한쪽 수레바퀴를 떠미는 여성’으로써의 국가적 의무에 더해 가사의 과제마저 여성들 어깨 위에 올려놓아 여성의 부담을 가중시킨다.

페미니즘 시각에서 본 북한 여성의 섹슈얼리티

북한 사람들의 성(性) 의식은 그렇게 보수적이지 않다. 북한 사회가 폐쇄적이고 지엽적인데 비해 성문화는 오히려 그 반대의 양상을 보인다. 원인은 이렇게 찾아 볼 수 있다. 북한이 식량난에 접어들면서 한 끼 밥을 위해 여성들이 자신의 성을 제공할 정도로 사회의 물질적 기반이 약해진데 있다고, 현재 중하류층의 적지 않은 여성들은 10여 년 넘게 지속되어 오는 만성적 생활난의 후과로 성에 대한 보수주의적 통념과는 인연이 먼 생활을 해오고 있다. 그러면 생활난 이전 북한 지식인 계층 속에 만연되어오던 개방적 성 의식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북한 독재 체제의 억압으로 인한 카타르시스의 출구로 짚어 볼 수 있다. 북한에 왜곡된 성문화가 일찍부터 존재해 온데는 북한 최고 지도자의 개방적인 성생활 관습 - 김일성으로부터 그 시발이 된 - 이 영향을 미친 부분도 있다. 최고 지도자를 거론하는 것이 예절에 어긋난다 할지라도 강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하나 있다.

북한 지도자가 지독한 난봉꾼이라는 사실은 북한에서 의식 있는 자이면 누구에게나 통하는 불문율이다. 아무리 사건 관계자들에게 서약서를 쓰게 하고 저택이며 중앙당 울타리를 높게 올려치지만 그의 행실에 대한 소식은 바람에 돛단 듯 기가 막히게 새어나온다. 그의 첫 번째 처는 누구의 처였고, 고영희는 어떤 여자이고, 예술영화촬영소 여배우 누구는 지도자와 어떤 드라마틱한 관계이고, 또 여가수 누구는 지도자의 성적 욕구에 순응하지 않아 ‘그 분’으로부터 어떤 압력을 받고 있고…. 지도자의 이런 행동은 단순히 그 한사람에 한한 소문으로 그치지 않는다. 북한 사회는 철저하게 최고 지도자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형성되고 결정되는 사회이다. 문화적 분위기나 가치관, 패션, 성 의식……. 최고 지도자의 절제 없는 행동은 당, 사로청 간부들 속에 걷잡을 수 없는 난봉 풍(風)을 전염시켰고 한창 젊은 남성일군들이 색을 즐기는 것을 남성의 미덕쯤으로 간주할 정도에 이르게 하였다. ‘호걸호색(豪傑好色)’이라는 용어를 북한 남성들은 즐겨 쓰는데 지도자처럼 술 잘 마시고 여자 좋아하는 것을 남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징표쯤으로 그들은 꺼림 없이 발화하고 행위화 한다.

성 문제가 나왔으니 한 가지 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성폭력, 성 희롱문제이다.
북한에서 성폭력이나 성희롱은 운명의 도약을 원하는 여성들 거의가 예외 없이 통과해야 하는 블랙홀이다. 여성과 남성에게 있어서 성폭력이나 성희롱은 서로의 이해관계 도모를 위한 무형의 특종교환 품이다. 즉 노동당 입당, 좋은 직업에로의 승격과 같은 조건들을 놓고 비권력 여성과 권력 남성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다.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일방적인 섹스를 강요당한 여성은 중앙당에 신소하는 방식을 취할 수 있다. 이런 제기를 당한 당 일꾼은 동격조동(같은 직급으로의 이동)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신소자 여성은 사회적 터부의 대상이 되므로 이제는 신소를 하지 않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북한에서 성희롱이나 성폭력은 언어화 되어있지 않고 이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지도도 대단히 취약한 편이다. 따라서 성에 대해 일정한 의식이 있는 여성들조차 성희롱이나 성폭력을 일종의 도약 발판으로 삼을 뿐 반항을 하거나 법적 소송을 걸지 못한다. 그 이유는 이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법이 부재한 것과 밀접한 연 관이 있다.

시대에 따라 변화되어온 북한 여성의 남아선호사상과 혼인 대상

북한에서도 한때 남아 선호 사상이 크게 작용하였다.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결혼한 여자는 첫 자식으로서 아들을 못 낳으면 발언권이 안 섰다. 아들도 첫 번에 낳아야지 두 번 째나 세 번째면 그 며느리의 위치가 금방 떨어졌다. 따라서 아들을 낳으려는 결혼 여성들의 노력은 필사적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기부터 특히 출가 여성들 속에서 절대적 남아 선호 사상에 대한 자연 발생적 저항 의식이 머리를 들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금값인 아들을 처음부터 낳아 주는 것보다는 조금은 구박을 받더라도 첫 번째나 두 번째까지 딸을 낳고 이른 바 시어머니의 ‘애’를 단단히 먹이며 몸값을 부쩍 올린 후 아들을 낳아 주는 것이 자기와 아들에게 이롭다는 것을 알았다. 한입 두입 입소문으로 퍼지기 시작한 이 ‘지론’은 하나의 시대적 조류로까지 확산되면서 대부분 기혼 여성들의 갈채를 받았다. 그들은 저마다 이런 대접받는 ‘자식 운’을 지니길 고대하였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결혼 여성들의 ‘자식 운’에 대한 사고가 또 한 번 탈바꿈하였다. 이제는 ‘대접’의 차원을 지나 아예 아들을 반대하는 것이었다. 동구권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북한 경제가 급격히 하락하면서 자식을 한 명만 요구하는 가정이 부쩍 늘었는데 그런 경우 첫 자식이 딸이어도 무방했다. 오히려 아들만 낳은 여성은 의지할 데 없는 ‘국제 고아’라고 비아냥 받았다. 아들은 성장해서도 큰 부담거리였다. 딸은 키워 시집만 달랑 보내 놓으면 그만이지만, 아들 낳은 부모는 그들이 성장하면 주택이라는 아뜩한 거주지 난관에 예외 없이 봉착해야 했다. 또 결정적인 식량난에 직면한 북한에 있어서 성장한 아들 부양 문제는 딸보다 몇 십 배 심각한 이슈로 떠올랐다. 남자는 여자에 비해 칼로리 섭취 양이 엄청난데다 대부분 아들들은 그 나이 또래 딸들보다 생존 방식에 미숙했다. 준엄한 현실에 직면한 북한 여성들은 어떤 위계질서나 전통보다도 인간의 평안이 삶의 근본 초석이라는 지혜를 생활현장을 통하여 배워 낸 것이었다.

아들 선호도가 줄어든 또 한 가지 이유는 북한에서 남성들을 거쳐 분배되는 부의 양태가 그렇게 심각하지 않은데 있다. 북한은 아들이든 딸이든 사회적으로 획득하는 부의 차이가 별반 없다(이것은 사회 전반적으로 배분되는 부의 양이 절대적으로 적은 데 원인이 있지 남녀평등의 원리에 의한 양성동등 분배차원은 아니다.). 그러니 아무리 남근 중심 사회라 해도 북한에서의 남아 선호 사상은 자연히 움츠러들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다.

다음으로, 북한 여성들에게 선호되는 혼인대상을 보면 1970년대까지는 조선노동당원이 전부였다고 볼 수 있다. 1980년대 초반부터 선호대상이 제대군인으로 변하였다. 군대에 나가 고생하며 “사람 되었다.”는 것이 기본 맹점이었다. 이 부분에서는 제대군인이 조선노동당원보다 조금은 더 현실성을 띤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당시 누가 결혼했을 때 “그 애 남편이 뭘 한 대?” “제대군인 이래.”하면 그 답은 끝이었다. 다른 것은 더 묻지 않아도 될 만큼의 안정적 징표가 그 답 속에 들어 있었다.

80년대 중반기에 들어서면서 처녀들의 결혼관이 또 변했다. 혼인대상을 제대군인에서 과학자 내지 기술자, 즉 인생에 쓸모 있는 기술의 소유자, 아니 정확히 말해 ‘밥벌이 기술’의 소유여부가 성공적 남편감의 기준으로 자리 매김 된 것이었다. 부가조건으로 노동당 입당여부도 첨부되었다. 사람들의 사고가 보다 현실적인 쪽으로 이동한 것이었다. 당시 여성들 속에 “여자는 시집 잘 가면 황후요, 잘 못 가면 거지 된다.”는 말이 유행되었는데 이것은 ‘성공적인 결혼’ 신화가 그 시기 여성들 속에 다분히 작동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그와 때를 같이 하여 도시 처녀들 속에 ‘군관(軍官)총각’을 남편감으로 택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풍토가 발생하였다. 이런 사고방식은 엷은 먹물 깨나 머리에 배인 처녀라면 누구에게든 통하는 불문율이었다. 왜 군관총각 거세콤플렉스가 당시 처녀들 속에 만연했을 가? 그 첫째 이유는 군관 총각들의 무학(無學)이었고(왜 그런지 특히 평양처녀들 속에 군관총각은 무식하다는 표상이 특별히 각인 되어 있었다.) 다음은 그들의 비(非)정착성 때문이었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처녀들의 총각선택기준은 또 다른 변화를 보였다. 이번에는 ‘사람구실 할 수 있는’ 제대군인도 기술자도 아니었다. 돈 있는 사람, 돈벌이 할 수 있는 총각이면 무조건 오케이였다. 입당이요, 제대군인이요 하는 너울들은 뒤발로 이미 차버린 뒤였다. 남편감으로서 제대군인의 이미지가 실추해 버린 지는 한참 되었지만, 그전까지 이상적 남편감 계열에서 뒷전에 밀렸던 인민군 군관총각들은 ‘생활상 편의를 위한 남편 감’으로 톱스타 계열에 껑충 뛰어 올랐다. 배급공급이 중단된 상태에서 군관들은 배급을 꼬박꼬박 다 준다는 것이 그 절박한 이유였다.

“남편 칭찬하는 여자는 행운아든가 아니면 바보 든 가, 둘 중 하나야.”
1990년대 중반기에 결혼여성들이 입에 올리기 시작한 이 말은 지금까지 여성들 속에 암암리에 작용해 오던 ‘성공적인 결혼’ 신화의 총체적 파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남편을 구름에서 떨어진 특정한 인간이 아니고 생활 속에 함께 자란, 자신처럼 결함도 약점도 지닌 경우 내지 자기보다 사고력이 떨어지는 측면도 있을 수 있는 ‘본능 그대로의 남자’를 보아내기 시작한 것 이었다.

북의 탁아, 유치원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

남측에서 임수경이 전대협 대표로 참가했던 1989년 7월 제13차 세계청년학생 평양축전 때 있은 일이었다. ‘백두-한라 대행진대 환영 평양시 군중대회’ 연단에 그녀가 올랐는데 그의 입에서 나온 첫 말이 이러했다. “엄마! 아빠! 전 평양의 하늘아래 있어요! 여긴 지금 비가 내려요.” 서울의 하늘을 향하여 철부지마냥 울먹울먹해 외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나는 문득 아, 북한사람들은 저 인간적인 목소리와 얼마나 등지고 살아왔었나 하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13년간 투병의 삶을 살다가 유명을 달리한 나의 어머니, 계모를 맞으면서 첨예화된 나와 아버지와의 해결 불가능했던 갈등, 전대미문의 식량난으로 생활의 균형을 잃은 둘째, 셋째오빠의 가족친지들에 대한 맹목적인 의존심. 나에게 있어서 가족은 나의 발전을 가로막는 화근덩어리 외에 더도 덜도 아니었다. 누군가 “나는 할 수 만 있다면 가족을 쓰레기처럼 버리고 싶다.”라고 한 말은 당시의 나에게 가장 적중한 듯 했다. 친구는 선택이 가능하지만 가족은 나의 의지에 의해 결정된 인연이 아니라는 점은 나의 반(反)가족주의 관념을 더더욱 부채질했다.

이러한 현실은 비단 나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식량난이라는 대 위기를 맞으며 북한은 가정의 총체적 파산이라는 극단적 현실에 직면하였다.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때려 내쫓고, 시어머니가 금방 해산한 며느리 등에 아기를 업혀 천리밖에 장사 내보내고, 김일성대 김책공대 출신 자녀 7남매나 둔 노인이 거처할 데 없어 이 자식 저 자식의 집을 방랑하다 객사하고, 몸 팔아서라도 집 식구들에게 죽이라도 끓여줘야 하는 게 아니냐며 아들이 엄마를 때려죽이고, 그런 오빠를 누이동생이 칼로 찔러 죽이고…. 이것이 내가 떠나기 직전까지 북한이 처해있던 혈육애의 현 주소였다.

한국에 와서 비교적 여유를 가지고 나와 북한인들 속에 침식되어 있던 반가족주의 원인이 무엇이여 어디서부터 그 단추가 잘못 꿰어졌는가를 곰곰이 따져볼 기회가 있었다. 물론 이유는 여기저기서 나타났지만 가장 근본적 단서는 북한의 대외선전용 1호인 탁아, 유치원제도에 있었다. 아침마다 안 떨어지겠다고 울음과 발버둥질로 항거하는 어린것을 놀이시설도 별로 없는 감옥 같은 유치원, 탁아소에 냉정하게 떼어 맡기고 엄마(간혹 아빠)들이 자기 일터로 종종 걸음 칠 때 그 걸음걸음이 부모자식간의 살인적 반목을 미리부터 예고하고 있었다. 북한은 탁아, 유치원제도를 내올 때 부모와 자식이 떨어져 있는 시간이 가져올 정서적 공백을 메우기 위한 방법들도 또한 연구되었어야 하였다. 물론 부모가 자식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리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나 부모와 자식이 만나는 짧은 시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함으로써 현재의 탁아, 유치원 제도가 불러오는 가족적 유대의 결핍을 보완하는 제도도 동시에 연구 도입되었어야 하였다.

‘남남북녀’의 허구

나는 처음 만나는 한국 사람들로부터 “미인이시네요, 정말 ‘남남북녀’란 말이 맞네요.”라는 말을 가끔 듣곤 한다. 내가 미인이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을 추켜올리는 데 아주 능숙 능란한 한국문화가 생산해낸 상투적인 인사법이라는 것을 깨닫는 데는 참 많은 시간이 요구되었다. 게다가 여성학까지 공부하고 보니 그 말속에 ‘북한 여성을 대상화하는’ 뜻이 깔려져 있다는 별로 달갑지 않은 의미까지 알아버렸다.

‘남남북녀’ 담론은 그 생산 초기 특정집단(남쪽의 남자와 북쪽의 여자)의 미적 자질에 대한 일반화라기보다 위치적 개념으로 사용되어진 듯싶었다. 큰 고분 발굴시 왕과 왕비로 추정되는 남여의 위치가 전자는 남쪽, 후자는 북쪽에 있었고 견우 직녀성의 위치도 남성성을 상징하는 견우성은 남쪽에, 여성성을 상징하는 직녀성은 북쪽에 있다는 관찰(별들에게 성별의 위치가 바꾸어져 명명되었을 수 있었을 텐데도 불구하고)들은 남남북녀 담론이 그 시초에는 지금과 다른 의미로 활용되었을 수 있을 가능성을 시사해주고 있다.

그러면 ‘남남북녀’로 표현된 남한 남성의 한 때의 ‘북녀(北女) 열기’는 어떻게 분석해야 옳을까. 한국사회 지배집단의 ‘자기집단 애호’로 볼 수가 있다. 한국사회의 급진적 경제발전과 페미니즘 의식의 급성장으로 위기를 느낀 남한 남성 집단이 경쟁자집단(남한 여성 집단)을 부정할 필요가 요구되자 북녀 응원단을 통하여 자기의 경쟁대상에 대한 간접부정을 표출한 것이었다. 이 말은 남한 남성 집단이 남한 여성을 간접 부정한 것 이상으로 북한 여성을 부정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남한 남성이 경쟁자를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하기에 아무 거칠 것 없을 정도로 북한 여성을 가볍게 여긴다는 의미가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면 ‘남남북녀’론은 한반도에 전횡하는 지역주의, 편 가르기가 낳은 증오와 편견의 산물이라고 정의 할 수도 있다.

이러한 내면들을 터득하자 나에게는 ‘남남북녀’란 말이 그렇게 꺼림직 하게 들릴 수가 없었다. 그것이 여성의 입을 빌려 발화되는 때도 많은 데 그렇다고 그 말속의 지배자적 속성이 제거되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게다가 한국사회 남성들은 한술 더 떠서 ‘남남북녀’론에 북한 여성의 순정과 순종의 ‘미덕’까지 결부시키는 것이었다. 참 웃기는 얘기가 아닐 수 없었다. 그들의 견해대로 본다면 북한사회에서 여성은 정조가 하나같이 순결하고 남성에게 덮어놓고 순종하는 풍조만이 만연되고 있다고 해석이 되는 데, 북한이 정말로 순결, 순정이 주요 문화코드로 작동하는 사회라면 대량의 여성들로 미인군단을 형성하여 아시안게임에 응원단으로 보내는, 즉 국가가 나서 여성을 집단적으로 대상화하는 이런 ‘집단 성폭력’ 행위는 절대 벌이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리고 가슴 아픈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그 사회에 만연되는 성적 해탈의식에 알든 모르든 잠식되어 있지 않았다면 30만에 이르는 탈북자(그 중 과반수가 여성이라고 함)들의 지금도 멈출 줄 모르는 북한 탈출행진은 결코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것 이었다

남북 여성문제 협상을 위한 제안

지구상의 유일한 분단국인 남북 한반도는 국토통일의 역사적 과제를 현재의 삶을 사는 매 개인 앞에 제시하고 있다. 특히 북한이 인구 200만 이상을 아사로 죽인, 기아와 독재가 범람하는 인권유린지대로 보다 급속히 전락해가고 있는 사정은 이 과제의 절박성을 한결 더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다. 이러한 실정은 북한의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본격적 관심을 요하는바, 이번에는 남쪽에서 북한 여성대표 측과 협상을 가질 경우 상정하여야 할 문제에 대해서만 짚고 넘어가려고 한다.

현재 남한에서는 성폭력, 성희롱, 성 매매, 아내구타 등의 성차별 문제들이 쟁점화 되어 사회구성원들의 의식을 변화시키고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권익을 옹호해내는데 일련의 성과들을 달성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여성의 인격이나 존엄을 지켜내기 위한 초보적 방법조차 개발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북한사회인들은 자기들의 가부장적 의식을 완화시킬 일말의 기회도 갖지 못하였고 이러한 북한 내부 실정은 성희롱, 성폭력 등 남한에서 일정에 오르고 있는 제1차적 성차별 문제들을 남북한 여성문제 협상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데 대해 심사숙고하게 한다.

가정폭력도 이상적인 협상대안은 아니다. 인간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힐 다양한 기회를 갖지 못한 북한인들에게 이 문제는 자칫 ‘남편 타도’의 구호로 들릴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정은 북한인이 유일하게 인식하는 ‘자유의 장’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북한인의 자유의 마지막 마지노선을 허물어버리는 것은 예상치 못한 충돌을 야기시킬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러면 무슨 문제라야 그들의 자극을 최소화하면서 양측의 직접적 이해관계를 이끌어내어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가는 데 기여할 수 있을까? 그것이 바로 여성의 가사부담과 자녀보육문제가 아닐 가 생각된다.

가사부담이나 자녀보육문제는 한국에서도 아직 별 묘안이 없는 상태이고 전통적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하도 절묘하게 융합이 되어 해결이 가장 어려운 난제의 하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북한(독재자 김정일이 아닌)과 눈높이 맞추는 입장에서 이 문제를 부디 들고 나와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러한 안건에 관한 협상에서 특별한 대안은 발견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진지한 협의는 이루어 질 것으로 기대가 된다. 이러한 자세는 보다 더 성숙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단서가 되며 남북한 여성들이 서로를 이해해 가는 귀중한 장으로 전환되어 질 것이다. 이것은 더 나아가 북한의 모든 사회관계와 권력으로부터 김정일을 차단시키고 고립시키는, 즉 북한인 내부로부터 인권의식을 산생시키는 중요 시발점이 되어질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의 남북한 대화는 여성문제에서부터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일방적이고 가르치는 식이 아니라 토의하고 알려주고 고민하고 이해하는 진지한 눈높이 맞춤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 북한 여성들이 성희롱, 성폭력, 성 매매, 아내구타 등에 대한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고 스스로 그에 대해 들고 나오도록 설득시키고 인내해야 한다.

북한여성들이 성 매매, 성희롱, 성폭력, 아내구타와 같은 본질적 문제를 들고 나오지 못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것이 정치적 맥락과 예민하게 잇닿아 있다는 데도 있다. 이 말은 김정일 전제정치가 사라지기 전에는 그 문제 협상이 불가능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남북한 대화나 통일을 위한 가장 이상적 방안은 어떤 방법이냐를 논하기에 앞서 그에 임하는 우리의 자세에 있다. 이는 오늘 날 한반도인의 애국적 사명의식을 검증해내는 하나의 시금석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