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편지
북한으로 돌아갑시다 - 다시 K형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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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형. 이 지면을 통해 형에게 편지를 띄운지도 벌써 3년입니다. 형을 알게 된지 몇 개월 되었을 때, ‘목숨값을 하자 - 존경하는 K형에게’라는 제목으로 편집자의 편지를 썼죠. 그때 편지에서 저는 ‘값’이라고 하면 무언가에 대한 대가로 들려 귀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남한에 온 탈북자들이, 죽을 수도 있었던 목숨이 살아 한국까지 오게되었으니 이제는 ‘목숨값’을 하자고 이야기했습니다. 탈북자들이 북한민주화운동의 전위에 서서 싸워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났습니다. 그동안 참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개인사로 본다면 형은 이제 꽤 유명한 인물이 되어 언론을 통해 근황을 전해들을 정도이고 저 역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던 형의 딸은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첫돌을 막 지났던 제 딸은 유치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얼마후엔 둘째 아이도 태어납니다. 아이들 커나가는 걸 보면 세월이 유수와 같습니다. 그동안 남한내 탈북자의 숫자도 크게 늘었습니다. 3년 전에, 남한에 온 탈북자가 1천 5백 명 ‘이나’ 된다며, 그들을 잘 조직해 투쟁하자고 주먹을 꼭 쥐며 결의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그 수가 6천을 헤아립니다. 한 해에 들어오는 숫자만 1천 5백 명을 넘습니다. 이러한 추세대로라면 몇 년 내에 ‘남한내 1만 탈북자’라는 말까지 나올 것 같습니다. 숫자가 늘어난 만큼 탈북자와 관련한 이런저런 뉴스도 끊임없이 들려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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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 460여명의 탈북자들이 전세기를 타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베트남에 체류하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알다시피 베트남은 한국으로 가기 위해 들르는 중간 기착 국가였습니다. 최종적으로는 A국가로 가야 되는데 그곳에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탈북자들의 숫자가 일정하게 정해져있어 베트남은 늘 ‘병목현상’을 보여왔습니다. 거기서 1년 이상 ‘대기’하고 있던 탈북자가 수두룩했지요. ‘저렇게 사람들이 쌓여가다가 반드시 무슨 일이 나고 만다’고 걱정했었는데 결국은 460여명이 한꺼번에 입국하는 것으로 마무리됐습니다. 그대로 뒀더라면 1천명, 2천명이 쌓여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이 한국에 오자 북한의 반응이 궁금했는데 정말 할 말을 잃게 하는 논평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8월 20일 북한은 민족화해협의회 명의로 ‘이른바 탈북자 문제의 진상고발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지요. 거기서 북한은 탈북자들을 “우리 사람들”이라고 호칭하면서 “남조선 당국은 북남관계 역사에 일찌기 있어본 적이 없는 468명이나 되는 우리 조선 공민들에게 탈북자라는 감투를 씌워 남조선에 강제로 끌어가는 용납 못할 반민족적 범죄를 저질렀다”고 주장했습니다. 졸지에 형과 형의 친구들은 ‘남조선에 강제로 끌려간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허허허, 그럼 이 편지는 납치범이 피랍자에게 보내는 편지가 되는 것이군요.

그 며칠전 북한은 대남선전기구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동원해 ‘남조선에 끌려간 동포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것을 발표했습니다. 거기서 북한 당국은 “남조선으로 끌려간 동포형제들”이라고 호칭하면서 “우리는 나서 자란 정든 고향과 사랑하는 가족, 친척들의 곁을 떠나 혈육 한 점 없는 외진 남조선으로 끌려간 당신들에게 아픈 마음으로 이 편지를 보낸다”고 글을 떼고 있습니다. 참으로 가증스럽습니다. 김정일 정권이 언제부터 탈북자들을 그렇게 따뜻하게 ‘우리 사람들’ ‘동포형제들’이라고 불러줬습니까. 개간나, 쌍간나, 씨를 말려버려야 할 종자들……, 이렇게 입에도 담기 힘든 욕설을 퍼붓고, 발길질하고, 고문하고, 구타하고, 철사 줄로 코를 꿰어 끌고 가던 놈들 아닙니까. 그런데 이제는 탈북자들을 ‘우리 사람들’이라니,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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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에 끌려간 동포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공화국의 품으로 어떤 방법으로든 다시 돌아오는 용단을 내릴 것을 호소한다”면서 “누구든지 따뜻이 맞이하고 환영해 마지 않을 것이다”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지요. 이에 대해 우리는 구구히 논평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유치한 플레이에 대꾸하는 것보다 북한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알리는 것이 가장 좋은 답변이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호 Keys에 실린 탈북자 수기 ‘살아있는 지옥’이 바로 그 답입니다. ‘살아있는 지옥’은 중국에서 체포되어 북한으로 송환된 탈북자들이 어떻게 처벌을 받는지, 가장 최근의 사실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처벌하면서, 이렇게 인권을 유린하면서 겉으로는 대단히 관대한 척, 부드러운 척…….

‘남조선에 끌려간 동포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의 내용이 언론에 보도되고 나서 남한에 있는 한 탈북자가 어느 인터넷 사이트 게시판에 올린 글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돌아오지 말라고 해도 우리는 간다”라는 제목의 글이었고, 내용은 제목에서 묻어나듯 “김정일 독재정권이 무너지면 북한으로 오지 말라고 막아도 우리는 우리가 살았던 고향땅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다짐이 담겨 있었습니다. 이것 또한 정답입니다. 남한에 있는 탈북자, 그리고 중국을 비롯한 이국에 체류중인 탈북자들은 김정일 정권이 타도되면 주저하지 않고 북한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들이 이국 땅에서 차별 받고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는 것은, 그러한 차별과 어려움보다 몇 배는 더한 고통, 즉 김정일 정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의 뿌리가 뽑혀나갔는데 계속 고생을 자처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형, 저는 북한의 선전 편지를 읽으면서 문득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형을 비롯한 남한에 있는 탈북자들이 그 편지에서 말한대로 정말 북한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하면 북한이 어떻게 나올까 하고 말입니다. 이왕 꺼낸 말이니 상상의 나래를 한번 펴봅시다. 형이 앞장서서 ‘북한 송환을 요구하는 탈북자 모임’ 같은 것을 조직합시다. 그래서 북한으로 보내달라고 남북한 정부에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힙시다. 서너 명이어도 좋고 수십 명이어도 좋고, 가급적 참가자는 많을수록 좋겠습니다.

북한 당국에 요구할 것은 많지 않습니다. ‘그냥 받아주기만 하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대신, 남한을 비롯한 국제사회에서 송환된 탈북자들의 신변을 걱정할 테니 정기적으로 조사단이 북한에 들어와 실태조사를 하고 돌아가는 것 정도만 요구하면 될 것 같습니다. “구태여 당신들에게 어떠한 죄도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믿고 돌아갑시다. 그리고 북한 땅 곳곳, 내가 살았던 고향땅으로 되돌아가 ‘썩어빠진’ 남조선의 실태를 알리는 선전원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합시다. 선전의 내용은 대단히 많을 것 같은데 예를 들어 남조선의 국회의원들이 ‘감히’ 대통령을 탄핵하려 했다는 이야기도 해주고, 밤이 되면 온 도시가 어지러울 정도로 밝은 ‘흥청망청’에 대해서도 이야기해주고, 인터넷이라는 ‘요물’로 전 세계의 소식들을 보고 듣는다는 이야기도 해줍시다.

선전원의 역할을 대단히 열심히 해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각자 담당 지역을 정해서 모든 시, 군, 구를 돌아다니고, 특히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 자본주의 사회의 실태를 잘 교육해주어야 하니 각급 초중등학교는 빠짐없이 순회 강연을 다니는 것이 어떻습니까. 아참, 인민군 각급 부대를 돌아다니면서 남조선 군대의 병영생활에 대해 가감 없이 이야기해 주는 것도 좋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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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은 이 정도로 하고, ‘남조선에 끌려간 동포형제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도하고 나서 김정일이 약간 초조했을 것 같습니다. ‘정말 돌아온다고 하면 어떡하지?’하고 말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저들의 주장에 정면으로 대응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북한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자세, 내 한 몸 안락을 위해서 남한으로 온 것이 아니라 북한을 개변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생각으로 탈북자들이 앞장서 싸워야 합니다. 저들은 우리가 위축되어 있는 줄 알지만 우리는 전혀 그렇지 않다고, 당당함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K형. 형은 북한 출신 북한민주화운동가이고 저는 남한 출신 북한민주화운동가입니다. 그러나 우리, 이른바 남출(南出) 북출(北出)을 따지지 말고 ‘납치범’이라는 공범의식(?)으로 하나가 됩시다. 무슨 납치범이냐고요? 이국 땅에서 고생하는 탈북자들을 자유의 땅으로 데리고 와 버린 납치범들이고, 종국에는 굶주림과 압제에 신음하는 2천만 동포 모두를 납치하여 북한을 민주주의 새 땅으로 끌고 갈 납치범들이며, 희대의 악당 김정일을 납치하여 국제사법재판소로 끌고 갈 납치범들입니다. 그 납치범의 소임을 다하자고 3년만에야 이렇게 펜을 들었습니다.

쓴다 쓴다 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편지를 띄웠군요. 하고 싶은 말이 태산처럼 많지만 나중에 소주나 한 잔 하면서 밤새 못 다한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합니다. 늘 변함 없는 모습으로 투쟁하는 형이 아름답습니다. 우리가 웃으며 북한으로 들어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습니다. 가슴 터지는 감격으로 다가올 그 날을 위해 건강에도 더욱 신경 쓰시기를 바라면서 오늘은 이만 편지를 접습니다. 형과 형의 가족에 늘 행복이 가득하길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