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편지
용감하다, 민주노동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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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1월 7일 민주노동당은 ‘재중 이북경제유민 진상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의 보고서를 읽으며 저는 민주노동당이 어떠한 정당인지를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자칭 타칭으로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으로 불리더군요. ‘좌파정당’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저는 민주노동당을 ‘용감한 정당’이라고 부리기로 했습니다. 용감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행동을 했기 때문입니다.
민주노동당의 보고서를 보고 나서 우선 제 여권을 펼쳐보았습니다. 출국 확인이 찍힌 도장을 세어보니 20여 개. 그 중 15번은 중국을 방문한 것입니다. 이사하면서 여권을 한번 분실한 적이 있으니 실제 방문 횟수는 그보다 많을 것입니다. 중국 방문 가운데 한 두 번을 제외하고는 대개 탈북자 인터뷰를 위해서 갔습니다. 지금까지 중국에서 만난 탈북자들을 얼추 계산해보니 심층 인터뷰한 사람만 100여명. 대강 이야기를 나눈 사람까지 합치면 그 3-4배는 족히 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다른 분들이 저를 소개하면서 ‘탈북자 문제 전문가’라고 하면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쑥스럽기만 합니다. 아직도 배워야 할 것이 많고도 많은 저에게 ‘전문가’라는 호칭은 과분하기만 합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의 보고서를 읽고 나서, 앞으로 저는 이런 지나친 겸손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용감한 민주노동당을 본받아 저도 용감히 전면에 나서기로 했습니다. ‘북한 문제 전문가’라는 표현은 여전히 과분하지만, 앞으로 저를 ‘탈북자 문제 전문가’라고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것 같습니다. 4박 5일짜리 조사를 갔다 와서 ‘진상조사결과’라는 것을 내놓는 민주노동당에 비하면 저는 그냥 전문가도 아니요,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최고 전문가’이니까요. 조용히 잠들어있던 저를 흔들어 깨워주고 ‘최고 전문가’의 지위로까지 격상시켜준 민주노동당에게 이 지면을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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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의 보고서에 나온 조사일정은 이렇습니다. 10월 30일에 중국 옌지에 도착했습니다. 첫날, ‘탈북문제 전문가’라는 어느 비디오 저널리스트를 만났고, 중국 조선족 작가 두 명을 만났습니다. 다음날 중국 투먼 일대를 답사하고, 조선족 전도사와 교수를 만난 후 탈북자 한 명을 인터뷰했습니다. 셋째 날과 넷째 날, 옌볜 조선족자치주 정부 및 공안국, 출입국관련부서 관리들을 쭉 만났습니다. 매일 탈북자 한 명씩을 인터뷰했습니다. 다섯째 날인 11월 3일,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1월 7일, ‘진상조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출국과 귀국일을 제외하고 사흘 동안 탈북자 세 명을 만나보고나서 탈북자 문제의 본질을 깨닫고 그들을 ‘경제유민(經濟遊民)’이라고 호칭하며 그 진상을 밝혀내는 예지력과 선견지명, 투시력, 분석력…….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저는 처음에 보고서 내용을 전해 듣고는, 민주노동당이 북-중 국경지대를 누비며 한 40일 동안 집중 조사라도 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4박 5일이라니, 내용을 더 이상 살펴볼 필요도 없겠더군요.
민주노동당의 이번 보고서는 크게 세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우선 조사단의 목적과 구성, 일정을 소개하고, 다음으로 중국 정부의 입장을 전하며, 마지막으로 민주노동당 조사단의 기획입국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이쯤 되면 가난한 노동자, 농민들의 정당이라는 민주노동당이 비싼 국제항공료를 써가며 바다 건너 중국까지 왜 갔는지 한숨만 나옵니다. 고작 ‘중국 지방정부 관리들은 탈북자 문제에 대해 이렇게 파악하고 있다’라고 대변해주기 위해 중국에 간 것일까요? 남한의 권위주의 정부 시절, 국제인권단체의 관계자들이 남한의 인권실태를 파악한다고 들어와서 법무부장관이나 경찰청장을 만나고 한국인 3명과 잠깐 이야기해 보고는 돌아가, “한국의 인권문제, 이상 없다”거나 “한국에 양심수란 없다”라고 주장했다면 민주노동당은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요?
애초에 민주노동당 ‘조사단’이라는 사람들이 탈북자 문제를 진지하게 검토하고 살펴볼 의지가 있었는지 조차 의심스럽습니다. 이번 보고서에 보니 조사 목적은 이렇습니다.
① 남북관계 단절의 주요원인 기획탈북 및 입국의 문제점 파악
② 왜곡되어 있는 탈북문제의 본질을 파악하여 올바른 해법 제시
③ 탈북문제의 핵심인 탈북브로커들의 문제점을 파악.
그들은 재중 탈북자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에 대해서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탈북자들이 한국에 많이 오고 있고, 그것은 문제다. 그 문제점을 찾아내야겠다. 이미 자신들이 이러한 결론을 분명히 세워놓고 시작하는 조사라는 것이 과연 제대로 된 조사라고 할 수 있을까요? 대학생 리포트도 이런 식으로는 쓰지 않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민주노동당의 이번 조사는 외화 낭비해가면서 ‘요식행위’한 것 밖에 되지 않습니다. 원내에 처음 진출한 민주노동당이 정치권의 안 좋은 것은 재빨리 배워가고 있구나 하고,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어야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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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보고서 내용에 조목조목 비판할 것이 많지만 지금까지 발행했던 Keys만 읽어보아도 이번 보고서가 순전히 엉터리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을 터이니 생략하겠습니다. 다만 저는 민주노동당이 ‘전태일 열사’를 능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민주노동당의 보고서를 읽고 나니 저는 전태일 열사가 생각났습니다. 민주노동당 출신으로 국회의원이 되신 분들, 총선에 출마했던 분들, 당 주요 간부들의 자기 소개서를 보니 많은 분들이 전태일 열사를 존경하고 있고, 또 전태일 열사 때문에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됐다는 분들이 많더군요. 전태일 열사가 어떤 분입니까? 1960년대 우리나라의 열악한 노동현장의 실태를 세상에 알리겠다고 본인이 직접 설문지를 작성해 조사하며 뛰어다녔던 분입니다. 순진한(?) 투쟁 방식이긴 했지만 노동자들의 진정서를 받아 노동청에 제출하기도 했던 분입니다. 민주노동당은 탈북자 문제와 관련해서는 전태일 열사의 이런 의지와 열정을 따라 배울 생각이 없습니까?
전태일 열사는 생전에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종종 했다고 합니다. 의지와 열정은 높되 배운 것이 없어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몰랐던 안타까움에서 했던 말일 것입니다. 온통 한문으로 쓰인 노동법을 읽지 못해 끙끙댔던 전태일 열사였습니다. 지금 중국에는, 그리고 북한에는 수많은 ‘전태일들’이 있습니다.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도움의 손길 만을 기다리는 전태일이 있고, 북한을 자유롭고 민주화된 땅으로 만들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는 전태일도 있습니다.
이번에 민주노동당은, 이런 전태일들을 짓밟았습니다. 철저히 능멸했습니다. 물론 전태일을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잇속을 챙기는 일부 세력이 있긴 하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전태일을 돕고 있는 다수의 사람들 또한 능멸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이제 전태일을 운운할 자격이 없습니다. 힘없는 서민의 편이라고 이야기할 자격도 없습니다. 남한에서 민주노동당은 노동자, 농민의 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나 북한 인민에게 민주노동당은 철저히 독재자의 편, 기득권자의 편, 살인자들의 편입니다. 이번 보고서에서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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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것은 민주노동당의 모든 당원들이 그러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북한문제와 관련해서도 ‘전태일의 편’이 되어주는 민주노동당원 ? 일관된 진보주의자들이 있다는 사실 또한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있다’는 것만으로 안도할 일이 아닙니다. 하루빨리 그분들이 잘못된 민주노동당을 바로 잡아주어야 합니다. 절박한 문제입니다.
앞에서 민주노동당이 ‘용감하다’고 했습니다. 무식하면 용감해지는 법입니다. 저는 중국과 북한에 있는 전태일들에게 남한의 정치지형과 민주노동당의 내부 세력구도를 설명해 주며 그들을 설득합니다. ‘몰라서 그런 것이니 이해해 달라’고, 원래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고 이야기해 줍니다. 그럴 때는 제가 마치 민주노동당 대변인이라도 되는 듯한 기분입니다. 이번 보고서는 정말 ‘몰라서 그런 것’으로 너그러이 보아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현상이 자꾸 반복되게 되면 판단이 달라집니다. 중국과 북한에 있는 전태일들은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악랄해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북한의 수령독재와 남한의 민주노동당을 동일선상에 놓고 볼 것입니다. 멀지 않은 훗날 민주노동당은 이것으로 인해 큰 곤욕을 치러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전에 민주노동당이 바뀌었으면 합니다. 수령독재의 앵무새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수령독재와 당당히 맞선 민주노동당, 전태일을 능멸하고 깔아뭉갠 민주노동당이 아니라 그들과 손 맞잡고 고락을 함께 했던 민주노동당, 무식해서 용감한 것이 아니라 ‘잘 알아서 용감히 싸운’ 그런 민주노동당이 되었으면 합니다. 한 해가 저뭅니다. 2005년은 북한민주화의 원년이 되기를 바라며, 그 길에 민주노동당이 앞장 설 것을 기대합니다. 뜻 있는 분들의 동참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