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라 ‘뿌릴’ 자유, 삐라 ‘주울’ 자유

38호 (2003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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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 남한의 한 비전향장기수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1960년대 남한에 지하혁명당을 구축하려다 구속되었던 그는 당시 투쟁방법에 대해서 필자에게 말해주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것은 ‘삐라’를 뿌리는 방법인데, 당시 그는 ‘주한미군 철수하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등사기(謄寫器)로 직접 찍어서 밤중에 버스나 트럭 지붕 위에 올려놓았다고 합니다. 유인물 뭉치를 둥그런 돌멩이로 눌러놓고요.
위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고 운전사가 차를 출발시키면, 돌멩이가 굴러 떨어지는 동시에 유인물은 바람을 타고 날아 주위에 확 퍼지겠죠. 만약 발차시간이 아침이라면 그 효과는 극대화되었을 것입니다. 출근하던 사람들이 대체 무엇인가 하고 주워볼 테니까요. 당시 이야기를 듣던 저로서는 상상만 해도 ‘짜릿’했습니다. 제가 학생운동을 하던 때는 백주대낮에 대로(大路) 위를 행진하며 시민들에게 유인물을 나눠주던 시절(지금도 그렇지만)이라 ‘암흑 시절에 이렇게 목숨걸고 투쟁했던 선배들이 있겠기에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로구나’ 하고 존경의 마음을 가졌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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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민주화운동’이라는 말이 처음 제기되던 시기, 제가 다니던 대학의 신문에는 진보언론을 자처하는 한 월간지 기자와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습니다. 북한민주화운동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있던 그는 ‘끔찍한 착취와 탄압이 상상을 초월했던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도 노예들의 반란은 있었다’며 ‘북한에 정말 가혹한 인권탄압이 계속되고 있다면 왜 반란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느냐’는 식의 발언을 했습니다. 곧, 우리가 말하는 북한인권실태가 과장되었고, 북한 주민들의 자발적 충성이 있기 때문에 북한체제가 유지되고 있는 것 아니겠냐는 의도의 발언이겠지요.
지금까지도 이러한 질문을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물론 정말 순수한 궁금증에서 질문을 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고, 북한민주화운동을 악의(惡意)적으로 폄하하기 위해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전자(前者)라고 하면 북한의 실정을 차분히 설명을 해드리고 싶지만 후자(後者)의 경우에는 참 한심하다는 생각밖에는 안 듭니다. 이에 대해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의 한 젊은 탈북자는 한마디로 이렇게 답했습니다.
“북한은 삐라를 뿌릴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삐라를 주울 자유조차 없다. 이런 사회에서 도대체 뭘 할 수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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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노예제 사회에도 노예들의 반란은 있었다(대전제). 그런데 북한에는 없다(소전제). 그러니 북한도 나름대로 살 만한 나라일 것이다(결론).”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삼단논법(三段論法)입니다. 요새는 중고등학생들도 논리학을 배우니, 그들에게 물어봐도 이러한 논법은 완전히 엉터리라고 쉽게 지적할 것입니다.
우선 대전제는 맞습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스파르타쿠스의 반란’ 같은 것이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어지는 소전제는 전혀 근거가 없습니다. 북한에 반란이 없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확실하게 증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1990년대에 있었던 북한의 굵직한 반란사건만 하여도 6군단 쿠데타 모의사건, 황해제철소 노동자 폭동사건, 삼지연(三池淵) 김일성동상 폭파 미수사건, 남포 3군단 식량창고 습격사건 등 여러 건이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모르고 있나 봅니다. 그리고 이런 폭동과 쿠데타 모의에 참가한 사람, 그 가족들까지 얼마나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이들은 모르고 있을 것입니다. 북한 사람들은 소문을 통해 거의 알고 있는 사건들인데 말입니다. 북한 언론에서 이를 보도하지 않았을 따름이죠. 전제 자체가 틀린 것입니다.
한발 양보하여 소전제가 옳다고 칩시다. 북한에는 지금껏 어떠한 반란도 없었으며, 주민들은 반란을 계획하고 실행할 의지가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그러니 북한도 나름대로 살만한 나라’라거나 ‘북한주민들이 정권을 자발적으로 지지한다는 증거’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북한은 고대 노예제사회보다 더 가혹한 인권탄압이 자행되고 있다’라는 전혀 상반된 결론도 도출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기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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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남한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고초를 당한 분들이 많습니다. 장기 복역한 분들도 있고, 고문을 당하고, 사형을 당한 분들도 있습니다. 가족들까지 끌려가고 수난을 당하고, 입사나 채용에서 불이익을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운동을 포기한 사람도 있습니다. 공무원인 형의 진급이 가로막힌다며 울면서 매달리는 부모의 설득에 못 이겨 떠난 사람, 어려운 집안 형편 때문에 포기한 사람 등입니다. 대개 ‘가혹한 탄압이 두려워서’라기보다는 ‘자신의 신념이 두텁지 못했던 탓’이라고 배경을 설명해야 옳을 것입니다.
간혹, 남한에 온 탈북자들을 두고 “그 체제가 잘못된 줄 알았으면 거기서 투쟁할 것이지 왜 어디 와서 호들갑이냐”라는 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말을 들을 때마다 솔직히 정이 뚝 떨어집니다. 자기에게 똑같은 상황이 주어진다 했을 때 그렇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타인이 그 상황에서 그렇게 못했다하여 욕하는 것은 참으로 비겁합니다. 대(大)화재의 현장에서 불구덩이에 뛰어들어 용감히 사람을 구한 의인은 칭찬하여야 마땅하나, 그렇지 못한 사람을 ‘용기 없다’고 탓할 수는 없습니다. 특히, 기껏(!) 가족의 진급문제가 두려워 학생운동을 포기해야 했던 과거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이, 반란의 ‘반’자만 생각해도 온 가족이 몰살당하는 북한에서 살다온 사람들을 향해 ‘용기 없다’고 하는 것은 제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북한 사람들이 용기 없다면, 자신들은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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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호 Keys에는 신간서적 『김정일 리포트』를 소개하였습니다. 이 책에는 황장엽 씨가 1995년을 회고하면서 증언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 해 식량사정은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데도 김정일은 그런 사태를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오히려 독재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밀경찰망을 더욱 강화하고 조금이라도 반체제적 요소가 나타나면 주동자를 색출해 공개적 혹은 비공개적으로 재판도 없이 즉결 총살했다. 한번은 중앙당 내의 보위관계를 관리하는 요원이 나를 조용히 찾아와 말했다.
“사무실에는 도청장치가 되어있고, 카메라가 설치되어 모니터로 샅샅이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행동을 하면 모두 기록되니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그는 또 반(反)김정일 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된 학생들이 대부분 끝까지 굴복하지 않은 채 결국 총살을 당하러 가는 줄 알면서도 뒤에 남은 학생들에게 ‘저 먼저 갑니다’라고 덤덤히 인사를 남기고는 최후를 맞는다는 얘기까지 해주었다. 그런 광경을 매일 접하다보니 도저히 술을 안 마시고는 견딜 수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일본의 진보적 북한인권단체인 <구출하자! 북한민중 / 긴급행동 네트워크> (RENK)의 대표를 맡고 있는 리영화 일본 간사이(關西)대 교수는 평양의 조선사회과학원에서 1년 간 유학한, ‘재일교포 출신 북한유학생 1호’로 기록된 인물입니다. 유학기간 동안 수령독재사회의 실상을 똑똑히 알게 된 리 교수는 친하게 지내던 북한 학생 몇 명과 학습모임을 결성하였고, 분위기가 어느 정도 성숙하였을 때 학생시위를 제안했다고 합니다. 리 교수는 유학생활을 마치고 쓴 『두 얼굴의 조국』(시대정신)에서 당시 학생들의 답변을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우리는 재일교포 당신네보다 용감한 지도 모르오.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은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소. 나 혼자 희생된다면 내일이라도 당장 데모든 뭐든 할 수 있소. 하지만 이 나라의 탄압이란 장난이 아니오. 가족이나 친척까지 강제수용소로 보내지고 연로한 부모와 처자식까지 짐승 같은 생활을 시킬 각오가 필요하오. 입장을 바꿔놓고 당신이라면 할 수 있겠소? 한국에는 반체제 시위가 있는데 북한에서는 왜 없는지 아시오? 대답은 간단하오. 남쪽에서는 데모가 ‘가능’하지만 북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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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설명을 하지 않아도 이해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 북한에는 삐라를 뿌릴 자유가 없는 것이 아니라 뿌리를 ‘주울’ 자유마저 없습니다. 등사기로 유인물을 찍어 버스 위에 올려 놓을 수 있었던 남한의 ‘70년대’는 지금 북한의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입니다.
한번은 평양시에, 남한에서 보내는 삐라풍선이 평양까지 닿는 경우는 드물다고 하지만, 중심가 상공에서 풍선이 터졌습니다. 너풀너풀 삐라는 굴러다니는데 사람들은 그것을 바라보는 것조차 경계했다고 합니다. 호기심에 슬쩍 훑어보기라도 할 텐데 말입니다. 곧이어 보위부 요원들이 출동하였고, 순식간에 한 장도 빠짐없이 수거해 갔습니다. 그것이 어제, 오늘의 북한입니다.
얼마 전 한 인권토론회에서 만난 어느 단체의 활동가는 “중국도 인권문제가 있고 중동과 남미의 인권문제도 심각한 데, 왜 하고 많은 나라 중에 북한이냐?”고 묻더군요. 제가 자제력이 좀 부족한 관계로 순간 흥분해서 당시에는 차분히 답변하지 못했지만, 만약 북한에 삐라를 맘대로 주워 볼 자유만 있어도 저는 북한민주화운동을 하지 않겠습니다. 그의 말대로 다른 나라 인권문제 중에 해결할 문제가 없나 찾아보던지, 집안살림에 보탬이 될 돈벌이나 하겠습니다.
북한 인민이 지구상에서, 그리고 인류역사상, ‘가장(!)’ 가혹한 인권탄압을 당하고 있기에 북한민주화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 삐라는 영어의 bill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びら(비라)에 어원을 두고 있습니다. 옳은 표현은 선전물, 유인물, 전단 등임을 밝혀둡니다.